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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크시론

유크의 12주년, 다시 새로운 10년을 바라보며

[유크 144호] 발행인 이창배 목사

9월이 시작되고, 유크도 창간 12주년을 맞는다. 돌아보면 그 12년 발자취가 마치 가을바람이 지난 길목같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무가지를 잔잔히 흔들며 지나고.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알듯 모를 듯 푸르른 나무잎사귀에 알록달록 색상을 입혀 놓는다.  

한달을 하루처럼 사는 문서선교와 목회란 이중적인 사역을 해오면서, 그래도 도처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만큼은 이골이 난 12년, 발행호수만 144회째다. 그러다보니 고민도 생겼다. 일일이 사람을 다 기억치 못하는 헤프닝이 종종 일어난다. 분명히 본 듯한 사람인데, 정확히 기억이 안나서, 잊혀진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를 써야하는 일이 생긴다. 그래서 어느덧 나이 탓이라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참 고약한 일이다.

실상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참 복잡다난하다. 얼마전까지만해도 말짱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모하는 것도, 참 선한 사람이라고 여겼고 믿었던 사람이 한 순간 악한 일의 한 가운데 우뚝 선 것도, 온순한 양같던 사람이 갑작스레 늑대의 이빨을 드러내는 것도, 참 다양하게 겪고보며 오늘에 이르렀다. 때론 그 기억 속에 어떤 상처는 마치 칼로 베인듯 쓰리고 아프고, 불에 데인 듯 화끈거린다. 그래서 이따금 텅 빈 공간, 검게 물든 하늘, 우주, 더 높은 곳을 올려다 보게되는 버릇을 키워줬고, 후일 오히려 기도할 수 있게 됐음에 감사한다.

그러고보면 만나는 사람들에게서도 다양한 경험들이 있었다. 사역지에서 생긴 일들, 교회에서 생겨난 일들, 참 자랑할만한 착하고 선한 일들이 사실은 더 많다. 시간이 갈수록 남는 사람들 면면을 보면, 참 정감이 넘쳐나는 사람들이다 싶다. 그 이름만으르도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흐믓한 미소를 띄게 하는 사람들이다. 수없는 사람들이 지나쳤고, 부딪혔고, 내게 다가왔지만 결국 남는 사람들이야말로, 뒤늦게 알면 알수록 얼마나 귀하고 귀하던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또 감사를 드린다. 이렇게 시간은 지났고, 또 새로운 시간은 시작이 된다.

가을바람, 소슬바람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차가운 듯 시원한 바람, 끈적거리는 느낌이 없는 상쾌한 바람,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나무잎새 한잎과 함께 풀기없는 잔디 위를 굴러가는 바람, 그런 바람이 분다. 문득 감상이 서려온다. 어느듯 가을을 담그는 금잔디 위를 뒹구르고 싶다. 하염없이 어디론가 그렇게 가고프다. 구름 한점 없는 파란하늘에서, 눈이 부신 하늘로부터 때 이른 소슬바람이 불어온다. 여름내 달궈진 대지를 식히려나, 아직 무른 열매를 움츠리게 하려는가, 알 수 없는 그런 바람이 오늘은 유독 불어온다.

가을, 이 가을은 짓궂게 오던가? 9월이면 아직도 여름의 끝이 저만큼 남았을텐데, 벌써 가을 기온이 찾아든다. 그러고보니 가을은 먼저 마음으로 오는가 싶다. 언제듯 가을은 먼저 마음을 훑어낸 뒤에 찾아드는가 보다. 여름철이라면 그저 잊고 갈만하다했더니, 누군가를 이별이나 한 것처럼 속수무책 시름을 남겨놓는다.

어떤 사람이 홀연히 먼길을 떠났다. 남겨둘 사람을 남긴 것이 아니라, 정작은 남았어야 할 사람이 먼저 간 것이다. 그래서 슬픈 가을이 오는가보다. 무어라 위로할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얼굴만 보아도 눈물이 고인다. 그 상심과 고통이 얼마나 크던지, 그 가슴이 무너졌음을 절절이 느끼며 이 가을을 맞는다. 유럽의 목회현장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 그렇다. 작고 연약한 교회일수록 상실의 고통이 큰 것을 알게 된다.

교회가 작다는 이유때문에 버림의 대상이 된다? 교회가 인적인 숫자의 부족함 때문에 떠받칠 재정이 부담스럽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교회학교 교육시스템이 없다고 옮긴다? 누구때문에, 무엇때문에, 어떤 동류에 따라서, 아님 더 좋은 교회환경을 찾아서, 오늘도 푸른초장, 쉴만한 물가를 찾아 옮겨다니는 유목신앙인들로 디아스포라 목회현장은 의기소침하다. 그 상심과 상실의 아픔이 가을바람에 오버랩된다. 가을바람에 속절없이 굴러가는 낙엽처럼.

한국교회 방문소감
언젠가 독일목회자들을 모아, 한국교회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자 비싼 여비를 들여가며 한국방문을 하고 온 후에 나온 말이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아마도 이 질문은 당신들 독일교회가 무시하는 한국교회가 이만큼 발전하고, 세계적인 교회로 도약한 것에 대해서 이만하면 인정할 수 있지 않느냐는 우회적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어떤 독일목회자가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이번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교회의 큰 부흥과 역동성과 기도의 뜨거움을 아주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지울 수 없는 의문이 있는데, 말해 주시겠습니까?” 그러며 한 질문은 “서울에 있는 몇몇 초대형교회들을 찾아갈 때, 그 엄청난 규모와 성도들을 보며 놀랐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초라한 작은 교회들, 상가빌딩 틈틈히 내건 십자가의 작은교회들을 수없이 보았는데, 저들도 다 같은 형제 자매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엄연한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설명을 부탁합니다.”

아마도 한국교회가 처한 자유 시장 경제주의에 입각한 교회경쟁체제(?)를 서구적인 제도권 교회들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러니라고 본다. 그러나 더 깊은 고민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이다. 오늘도 우리의 목회현장에서는 자기 희생없이, 십자가의 고통없이 영광을 얻고자는 무분별한 신자들의 수평이동현상이 두드러진다. 소위 교회를 가지고 브랜드 마켓팅 시대 운운하는 얼빠진 목회자들이 있음도 사실이다. 예수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보다 브렌드화 된 교회가 본질이 되는 몰지각한 교인의 양산 또는 배임은 결국 오늘날 교회가 맞게 된 역풍이 아닌가?  

만종 그리고 이삭줍기
몇 해 전 파리근교의 퐁텐블로(Fontainebleau)숲 어귀에 있던 바르비종(Barbizon) 마을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여기에서 밀레 그림의 원작무대가 된 광활한 밀밭의 끄트머리에 서봤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밀레의 만종과 이삭줍기 등 불후의 명작의 고향이기도 한 거기에서 가난하지만, 그 운명적 가난에도 불구하고, 사시사철 식물을 내는 대지를 사랑하면서, 겸손하고, 경건하게, 늘 감사로 살아가는 농부 부부의 신앙을 만나며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만종 그림의 뒷이야기로도 전해지는, 가난한 부부가 처한 가난한 삶 때문에, 변변한 치료도 못받고 결국 질병으로 죽은 어린아기를, 황혼이 짓드는 저녁, 멀리 들판을 건너서 어슴프렘 어둑어둑해진 교회당의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땅에 묻고,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숙연한 장면이 머리속을 감돈다. 이따금 눈을 감으면 이 그림이 뇌리에 떠오르고, 나에게 닥쳐오는 그 어떤 시련이 폭풍 같고, 거센 파도와 같을지라도 나도 감사하리라 마음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니 또한 감사하다.

오늘, 유럽의 다양한 선교사역과 디아스포라 목회 현장에서 작지만, 초라하지만, 큰 영광의 빛은 없지만, 외롭고 힘든 사역의 길을 묵묵히 걷는 사랑하는 동역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위로를 나눈다. 뜨겁게 마음의 사랑을 드린다. 아울러 변함없이 몸 된 주님의 교회를 지키며, 평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마음으로 축복한다.
유크의 11년, 새로운 10년을 내다보며 이제 그 십일조를 드리는 마음가짐으로 각오를 다짐한다. 「만종」처럼, 그래도 감사하자, 주님의 교회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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