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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AFC선교회, 동유럽 최초 한국인 선교사 “파송”

[루마니아 통신]  정홍기 선교사/ 시온장로교회 – <2>

막시스트자들은 공산주의가 사람들의 완벽한 성격 개발에 적합하고 이러한 성격이 감정,욕심,이기주의에 면역되면 완벽하고 우주적인 사람을 창조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직업분야에서 기술을 습득할 뿐 아니라 우주적인 사람은 범죄, 전쟁, 유아학대, 마약중독, 민족주의 그리고 모든 자본주의 경제 분야에서도 면역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완벽한 사회건설을 주장하던 막스주의자들의 이론과 사상은 1986년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 초프가 취한 글라스노스트 ( Glasnost ) 와 함께 자본주의 사회를 따르기 위한 힘든 행보를 하고 있다.

공산주의 시절의 삶은 모든 정보가 차단되고 취미가 금지 당했으며 오락이 폐쇄된 채 모든 생활이 비밀경찰에 의해서 감시되었다. 오직 일하고 음식을 사기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유일한 생활이었으며 고기를 사거나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기 위해서는 밤새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개인이 구입할 수 있는 양이 정해지기도 했고 신분증이 요구 되었으며 타 도시로 여행할 경우 음식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자연히 여행이 제한되기도 하였다. 겨울철에는 난방이 부족하여 하루에 난방 사용량이 4시간 밖에 안되었으며 방안의 추위를 피해 따스한 햇빛을 쬐기 위해 집밖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외국인과의 대화를 불법으로 간주하기도 하였고, 타자기나 컴퓨터 소지자는 경찰에 모두 신고하게 되어 있었으며, 전화도 두 가정이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시민 생활이 감시 당하기도 하였다.

혁명 이후 루마니아에 들어온 사람들은 루마니아의 넓고 비옥한 농토와 곳곳에 들어선 아파트촌 그리고 자유로워 보이는 외관의 모습을 보면서 공산주의의 잔악상을 잊게 된다. 우리 역시 1990년 이후 단기 전도 활동을 펴면서 복음을 갈망하는 수많은 영혼들 속으로 왔다. 하지만 회칠한 무덤 사이로 들어온 것 같은 우리의 선교사역은 고통과 수고의 연속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독재자 차우세스크가 무너지고 18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 사회 전반에 걸친 깊고 폭 넓게 뿌리 박힌 부패가 사람들을 낙심시키고 좌절케 하며 낮은 임금과 높은 물가가 타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게 한다. 책임의 결여, 공공 시설에 대한 방조 및 무관심, 자발적인 사회 봉사 정신의 결여 등이 변화의 속도를 느리게 하고 있다. 게다가 기독교 신앙의 불분명한 활동이 부패와 도덕적 무질서에 관용을 베풀고 있으며 사회 규범으로의 기독교적 가치를 상실한 지 오래이다.  

루마니아는 유럽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교회의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오랫동안 공산주의 핍박과 통치로 인해 깊은 상처를 남기었다.  종교 없는 사회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회를 조성하였던 공산주의의 무신론주의는 루마니아인들의 가슴속에 깊은 영적 공백을 갖게 하였다.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지 23년이 지난 지금 영적인 공백은 물론이거니와 사회 전반의 문제들이 비전 있는 지도자를 갈망하고 있다.

나토의 회원국이 되고 유럽  연합에 가입을 하였지만 낡은 전통과 종교적 무지 그리고 편견과 교만으로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있다. 그러면서 발견한 것이 각종 의식과 죄들로 양심에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특별히 사회의 지도층에는 복음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단절되어 있음을 알았다. 의외로 정치인과 교수들 그리고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지 못해 무지한 중에 있으면서 빛을 찾으려고 갈망하는  것을 보면서 “경건한 지도자와 거룩한 나라를” 세우는 데 중심이 되는 사람들에게 사역의 초점을 맞추어 가고 있다.

루마니아에 가기까지
1981년 12월29일 아내인 이명자 선교사와 결혼 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메일 아침 영어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모임에 인도해 주셨다. 신학교 2학년일 때 메일 아침 영어성경을 외우며 다가올 선교적 도전을 준비하게 하셨다. 그 모임의 인도자는 한국 선교를 준비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으로 영어를 배우게 하였으며 마침 한국의 신학교에 유학을 온 국제 학생들을 초대하여 그 나라의 선교적 이야기를 듣게 함으로 우리에게 선교와 국제적 관심을 갖도록 일깨워 주었다.

그러던 중 주님께서는 또 다른 기이한 방법으로 나에게 한 사람을 알게 하였다. 나는 당시 화란의 국영 TV 방송국의 선교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프로듀서이며 설교가인 Feike Ter Velde 라는 사람의 기도 응답으로 그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그 때 한국 교회의 발전상을 우리 네덜란드 방송국 프로그램에 소개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 중이었으며 한국 교회 방문에 필요한 안내자를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방을 나왔습니다. 바로 그 때 정홍기라는 신학생이 저에게 말을 건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저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30년이 넘게 하나님의 일들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소개로 나는 카나다 선교사로 한국에 와있던 Clement Dreger 선교사를 알게 되었으며 그 분과 함께 매주 일대일 영어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나는 그 분에게서 선교사의 삶에 대해 그리고 북미 교회의 선교 역사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그 일대일 성경 공부는 후에 AFC 선교회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나는 그 모임의 인도자가 되어 선교모임을 인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1986년 암스텔담의 빌리그레이험 세계전도대회를 참석하는 계기로 유럽과 다른 국가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면서 선교적 비전을 갖게 되었으며, AFC 선교회를 중심으로 선교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세계 선교에 대한 나 자신의 비전을 구체화할 뿐만 아니라 한국 선교의 국제적 역할에 대한 필요성들을 절감해 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1989년 독일을 중심으로 전 유럽과 아시아의 타이완을 오가며 단기 선교 활동을 기획하는 기회를 갖게 하였다.

유럽의 대도시들을 다니며 노방전도와 라디오 방송국 인터뷰 그리고 교회를 방문하여 설교를 하면서 현지 교회 지도자들과 교류를 하게 되었고 그것은 자연히 나의 선교적 동기를 확고하게 하였다. AFC 선교회와 함께 유럽 선교의 단기 선교를 기획하면서 나의 선교사로의 삶이 준비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이 우리의 선교지가 되었다.  

선교지 선택의 동기에 대하여

1990년 3월 나는 독일의 교회와 스위스 신학교의 초청으로 유럽을 방문하고 있었다. 이 방문 중  유럽의 교회들의 영적 실상을 보게 되었으며 사람들이 자기들 안에 [유럽의 역사와 문화 속에]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고 아시아의 종교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진리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설교와 노방전도를 통해 한국인 선교사가 이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유럽 선교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과 가능성들을 이곳 교회의 지도자들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어느 날 스위스 신학교 의 교수인 Marco Gmur 친구의 권유로 1989년 12.22-25일 사이에 있었던 루마니아의 민주화 혁명에 대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스위스 기독교 방송국이 동 유럽 공산권의 붕괴를 서유럽에 알리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특별히 억압 속에 있던 교회들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때 친구는 나에게 “정 목사, 지금 본 루마니아에 두 가지가 필요하네, 붕괴된 사회의 재건을 위한 정치적. 영적 지도자가 부족하고, 자유를 찾은 교회에 성경이 부족하네. 그 동안 우리는 동유럽-루마니아 포함-성경을 몰래 전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왔는데 지금은 자유롭게 복음을 전 할 수 있게 되었네. 이제 루마니아 선교를 위한 한국 교회의 도전을 받아야 할 때이네.”

이후 나는 스위스 정부의 도움으로 1990년 8월 루마니아에 단기선교팀을 파견하도록 기획을 하였으며 그 동안 가끔 기도로만 생각하던 루마니아에 단기선교팀을 구성하여 인도하게 되었다. 이 역사적인 동구 유럽의 한국 선교 팀 방문에 하나님은 AFC 선교회를 통해 20여명의 팀을 구성하게 하였으며 그 역사적 첫 발을 1990년 8월 16일 내딛게 하였다.

그 역사적 단기 선교팀에 합류를 하지 못하고 [나는 이때 독일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루마니아 방문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갑작스런 외 아들 [당시 8세] 의 죽음으로 역사적인 루마니아 방문의 팀장 자리를 동료에게 부탁하고 아들의 장례를 치러야 하였다. 후에 이 아들의 죽음은 우리의 루마니아 사역에 순교적 바탕이 되고 있음을 느끼며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있다.] 안타까워하는 나에게 단기팀원들은 하나같이 희어져 추수하게 된 루마니아를 위해 긴박하게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권유하였고 이것은 우리 AFC 선교회가 동유럽에 최초의 한국인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이 때부터 AFC 선교회는 선교사 파송 단체로 역할을 하기 시작했으며 나의 선교적 방향이 유럽으로 정해져 가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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