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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김승천목사]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

사랑하지 않으면 아플 이유도 없겠지만 생명 같은 사랑이기에 그 고통은 다 헤아리기 어렵다. 하나님은 왜 장미에 가시를 주셨을까? 결혼이라는 숭고함속에 왜 아픔을 두셨을까? 가정이라는 행복의 울타리를 왜 고통이 넘어들어 오도록 하셨는가?

결혼에 비유한 고난의 의미

교회를 출석하는 한 자매가 프랑스 형제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식을 얼마 앞두고 기도를 받기 위해 두 사람이 찾아왔다. 결혼을 하기 원하는 여자를 따라서 교회에 처음 나오기 시작하는 프랑스 형제에게 무슨 말을 해주면 좋을지 몰랐다. 성경공부를 시작하기에는 그들이 할애하기로 마음먹고 온 시간과 너무 차이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득 한가지 생각이 났다. 그림을 한 점 보여주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될 것 같았다.

15세기에 유화를 처음으로 그리기 시작한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의 ‘아놀피니 부부의 초상’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컴퓨터를 열고 그 그림을 보여주면서 그림에 담겨진 의미들을 하나씩 설명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결혼이란 이런 의미를 담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림 속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촛불이 하나만 켜져 있는 것은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것을 의미한다.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고 두 사람이 신을 벗고 있는 것은 그들이 거룩한 곳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발밑에 강아지가 있는 것은 서로에게 충절을 의미하고 뒤편에 기도를 상징하는 염주와 노동을 상징하는 빗자루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남자가 오른 손을 들어서 서약하는 것이나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는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그림의 정 중앙 뒤편에있는 볼록 거울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그 볼록 거울 주변에 그려진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설명했다.

결혼이라고 하는 것이 모두 행복하기를 원해서 들어서는 길이지만 실제로 그 길은 쉽지 않은 고난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엇갈리는 감정들을 이해해야 하고 서로 다른 생활의 방식을 맞추어야 하며 수도 없이 발생하는 많은 일들을 매끄럽게 대처해야 한다. 때로 한쪽이 실의에 빠질 수도 있고 병에 들 수도 있고 문제 속에 넘어질 수도 있다. 서로 같지 않은 마음 때문에 아프고 이해받지 못해서 슬플 수 있다. 결혼의 문에 들어서기 전에 보는 핑크빛이 핏빛으로 나타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결혼은 그래서 십자가의 길이다. 하지만 십지가의 길이 그냥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마침이 있는 것과 같이 결혼에도 그처럼 영광스런 길이라고 하는 것을 말했다. 결혼식 주례 때마다 “뼈 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라” 는 말씀을 하면서 고통 중에 고통이 될 때 기쁨 중에 기쁨이 될 수 있다. 즉 상대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될 때 상대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는게 결혼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결혼이란 틀림없이 슬픈 십자가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이다. 그러나 그 길은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길이다.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시간이 흐르면 가정에 아이들이 생겨나고 더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날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듣는다. 천수(天壽)를 다하고 떠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가족 중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 사람이 생길 때 온 가족은 깊은 고난에 빠져들게 된다. 배후자의 죽음이 남겨진 자를 휘청거리게 하고 푸르른 청춘의 자녀를 앞세운 부모는 가슴에 자식을 묻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아플 이유도 없겠지만 생명 같은 사랑이기에 그 고통은 다 헤아리기 어렵다. 하나님은 왜 장미에 가시를 주셨을까? 결혼이라는 숭고함속에 왜 아픔을 두셨을까? 가정이라는 행복의 울타리를 왜 고통이 넘어들어 오도록 하셨는가? 우리는 기쁨과 슬픔의 뒤섞임을 이해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해하고 싶지 않음이다.

전도서 7장 14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하게 하신 이유가 장래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 왜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는가?

하나님의 의도는 명확하다. 매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이다.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이나 해가 쨍쨍하든지 바람이 세차게 불던지 매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기쁜 날도 하나님으로 행복하고 슬픈 날도 하나님으로 의미 있는 날을 살기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광야 백성에게 만나를 주실 때 일년치나 한 달치 아니 일주일치도 아니고 매일의 양식을 주셨다.

하나님을 매일 보면 어떤 날이든 살 수 있다. 고난 주간은 우리가 더욱 슬퍼해야 하는 주간이 아니라 우리가 더욱 주를 바라봐야 하는 주간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이있음을 고백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김승천 목사/ 파리 퐁뇌프장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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