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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강단

“하나님의 무한하신 손에 맡기라”

[지상설교]  김헌종 목사/ 폴란드 바르샤바한인교회

설교본문 : 창세기 12:1-3

오늘은 제 19회 동유럽선교사수련회 마지막 날입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이 모임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매년 이 모임이 끝나고 나면 그 다음 일년을 한결같이 이날을 사모하면서 여러분들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려왔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마음으로 일년을 보내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저는 폴란드에서 왔습니다. 폴란드라는 나라는 문자 그대로 Pol이 평원이라는 뜻이 있는 것처럼 평원의 나라로 산이 거의 없는 유럽의 곡창입니다.  제가 사역하는 바르샤바는 이 나라의 수도로 바르스라는 어부가 사바라는 인어를 비수아 강변에서 낚아서 같이 살았다는 전설을 가진 인어신화의 도시입니다.  

저는 30년전에 아프리카 나이제리아 대사관에서 근무하면서 한인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다른 분들은 골프를 치러 다녔지만, 저는 외교관으로 있으면서 교회를 섬겨야 했기 때문에 운동을 즐길 시간이 없었습니다. 우리 한인들을 위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수요, 금요예배까지 드렸으니 저를 위한 시간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현지인들 신학교를 돕고, 신학생들의 등록금을 대주는 것으로 저는 그들을 아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그러던 하루는 아내를 따라 노천시장을 갔습니다. 수많은 흑인 아이들이 따라와서 시장바구니를 들고 자기가 먼저 저를 돕겠다고 귀찮게 따라붙습니다. 시장을 보고나면 들어다주고 팁을 받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저마다 튀는 행동을 하려고 목청을 크게 하고 저를 부릅니다.  “굳모닝 새끼야!” “굳모닝 새끼야!”

한국인 근로자들이 공사를 하러 아프리카에 와서 영어를 못하니까, “야 이새끼야!”혹은 “이새끼들아!”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들은 “이 새끼”가 “헬로(Hello)”정도로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열명도 넘는 애들한테 “이 새끼! 이 새끼!”하고 욕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화가나서 “이 새끼가 누굴보고 새끼래!”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몹시 화가 났었습니다. 그것도 곰곰히 따져보면 우리보다 못하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꽉찬 밑바닥의 생각이 들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회개합니다.

제 둘째딸이 어렸을 적에 선교지인 아프리카에서 살 때에 가난한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꽉차 있었다고 합니다. 대학병원에 교수로 있으면서 레지던트들이 가장 잘 가르치는 교수라고 뽑혀서 상금을 3천불 받았다고 하니까, 우리집 사람이 당연히 엄마에게 주겠지 했는데 딸은 그것을 집 앞에 있는 아프리카교회에다가 헌금을 해버렸습니다. 그 때 우리 집 사람이  회개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 나는 아직도 어쩔 수 없는 속물입니다. 왜 그걸 엄마에게 줄 것이라고 바랬을까요? 저는 아직도 죄인입니다.”그렇습니다. 아직도 매일 매일 거울을 닦듯이 죄를 씻고 살아야 하는 죄인입니다.

해외생활 30년, 이제 저도 은퇴를 앞두고 있습니다. 저도 디모데를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온 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하루를 시작할 때 회개하고 하루를 닫을 때도 회개합니다. 1967년 월남에서 맹호부대 소대장으로 참전한 후 해외생활을 1983년부터 지금까지 딱 30년이 됐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중세기 때에 카톨릭은 수도원이 성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을 찾아왔던 이유들은 카톨릭이 부패하고, 사회악이 만연하여 염세주의자들이 늘어났고 그리고 무엇보다 형식화된 신앙으로 영적 갈등이 심화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려면 세 가지 서약을 해야 합니다. 첫째는 결혼을 포기하고 독신생활을 서약해야 합니다. 둘째는 재물을 포기하는 빈궁생활을 서약해야 합니다. 셋째는 자기를 포기하고 수도원의 규칙에 복종하는 서약을 해야 합니다. 이 세가지 서약에 동의해야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서약은 곧 포기를 의미합니다. 프랑클린이 어렸을 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시장에 따라갔다가 딸기가게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가게주인이 어린 프랑클린이 예뻐서 딸기를 한 웅큼 손에 집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대도 손을 내밀어 집지 않고, 가게 주인에게 “아저씨가 집어주세요.”라고 요청하여 가게주인이 한 웅큼 집어준 딸기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어머니가 “왜 네 손으로 딸기를 집지 않고  가게주인 아저씨에게 집어달라고 요청했니?”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 프랑클린은 “어머니, 제 손보다 가게주인 아저씨의 손이 더 크지 않아요?”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손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큰 손에 맡길 때 그 포기는 실패가 아니고 성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 손이 짧아졌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손 대신에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하나님께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도 이 포기를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아브람과 같은 포기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빈손이라야 하나님이 무얼 쥐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브람은 첫째 고향을 포기했습니다.
창12:1절에“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고향을 포기케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집착하였던 자기집, 자기고향,  자기 친척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75세 된 노인이 자기가 평생 이루어놓은 집과 친척들, 이웃을 두고 미지의 땅을 향해 떠난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고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분부하셨을 때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아비집을 떠났고, 정들었던 고향을 떠났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위대한 철학자였던 키엘케골은 아브람이 떠난 사건을 가리켜 “지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건 세상적인 가치관이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은 아브람에게는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이 아브람의 떠남이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스데반이 설교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아브람의 떠남을 말씀했습니다. 히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고향과 본토를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세상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늘나라 본향을 향해서 걸어간 하늘 지향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결같이 모두 고향과 집을 떠난 나그네들이었습니다.

미국을 건국한 청교도들도 영국의 고향을 포기하고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성경 속의 위대한 인물들은 전부 고향을 떠나면서 큰 사역이 시작됩니다. 모세는 바로의 왕궁을 버리고 차기 왕권을 포기하므로 동족을 구원하는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떠남은 불행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요, 하나님의 사랑받는 비결이요, 축복받는 길입니다.

아브람은 평생 닦아놓은 삶의 기반, 조상에게 물려받은 유산들을 놓고 하나님의 말씀이냐, 고향이냐를 선택해야 할 때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택했습니다. 아브람은 위대한 선택, 위대한 결단을 한 것입니다.

둘째로, 아브람은 기득권을 포기했습니다.
조카 롯과 헤어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땅은 좁고 가축들은 늘어나고 아브람과 롯이 동거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여기에서 아브라함과 롯의 인생관의 차이점을 보게 됩니다. 창13:8절에 보면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의 삶의 방식은 경쟁에 이기고 투쟁해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고 화평을 구하는데 있었습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도 서로 협력하고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아브람과 롯의 차이는 양보냐 독점이냐의 문제였습니다.

창13:9절에 보면, 아브람은 삼촌이라는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인 조카에게 권리를 양보했습니다. 양보라는 말은 특권을 돌려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물려 받은 것을 돌려주거나 화목과 화평을 목적으로 절충, 타협, 조정한다는 뜻입니다.

마5:39-41,“누구든지 오른쪽 뺨을 치면 왼쪽 뺨도 돌려대며,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려거든 겉옷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리를 가자 하거든 십리를 동행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칼빈은 주님의 이 말씀을 두고 적극적인 선이라고 했고, 무디는 적극적인 양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적극적인 선, 적극적인 양보를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롯은 어떻게 행했습니까? 요단 온 들은 물이 넉넉하고 가축을 가르기에 너무나 좋아 보였습니다. 땅을 보니 애굽의 나일강변의 비옥한 옥토같아 보였던 것입니다. 롯은 선뜻 이 땅을 먼저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옥한 땅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불로 심판을 받아 송두리째 없어지고 멸망의 땅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양보가 있는 곳에 덕이 있고,독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 하나님의 기름진 축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중에 성전면세의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성전세를 바칠 때에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요, 주님은 성전세를 받아야 할 분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에게 지시하여 성전세를 바치게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셋째로 독자를 포기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백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은 가히 아브라함의 전 생명이요, 전 재산이요, 전 소망이요, 자기보다 중한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아브람이 얼마나 이삭을 자기 생명 이상으로 사랑하는 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람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엄청난 분부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번에도 하나님의 분부에 순종했습니다. 아들을 잡아 칼로 죽여서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에 순종해서 아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아브람아, 아브람아”연거푸부르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소리 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들을 바치려는 아브람의 중심을 보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엄청난 복을 주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창22:16-17, “내가 나를 가르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를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치는 것은 잃은 것 같지만 잃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생업과 부모를 다 버린 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과 그물 깁는 것을 보신 주님이 부르셨을 때 저희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기 위하여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10:29-30)

결론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사도 바울도 주님 이외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바울에게서 최고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었습니다. 그가 배운 심도있는 학문도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비하면 초등학문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모두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인 부자가 되고 높아지고 권세를 부리고 명예를 갖는 모든 것이 바울에게는 배설물과 같았습니다.

본문 2-3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복의 근원이 되고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나를 인하여 누군가 복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요, 기쁜 일입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서 많은 사람들이 물을 마시는 복을 나누는 귀한 존재가 되었는데, 그 우물을 파는 일을 제일 먼저 시작한 사람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창26:18에 보면,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팟던 우물들을 다시 팟으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아브라함은 고향을 포기했습니다. 그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요단들을 선택할 기득권을 포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생명보다도 더 귀한 이삭을 포기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하여 네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 즉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네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창22:16-17)고 축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냥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그냥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한 분 의지하여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오신 선교사님 여러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심같이 여러분들을 축복하여 주시고 여러분들의 자녀들 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흘리신 눈물을 닦아 주시고 기쁨의 옷을 입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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