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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복음을 갈망하며 기다리는 사람들

[루마니아 통신]  정홍기 선교사/ 시온장로교회 – <4>

1. 공산주의: 완벽한 이상
칼 막스(Karl Marx) 와 프리드릭 엥겔스 (Friedrich Engels)에 의해 1848년 작성된 공산당 성명서가    70여년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무지와 빈곤의 깊은 수렁으로 빠뜨릴 줄 누가 알았을까! 사회.정치 .교육 분야를 중앙 통제화 하고 생산의 집단체제를 형성하였으며 종교.관습.전통문화 등은 경제 결정론에 의해 이차적으로 취급되었다. 막스와 엥겔스는 가족을 “자본주의 제도, 공공연한 매춘”으로 사회의 목적에 위배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녀들의 건강,교육,영적인 생활 등을 부모들이 돌보는 것은 막시스트 사회에서는 허락을 하지 않았다.

막시스트자들은 공산주의가 사람들의 완벽한 성격개발에 적합하고 이러한 성격이 감정,욕심,   이기주의에 면역되면 완벽하고 우주적인 사람을 창조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직업분야에서 기술을 습득할 뿐 아니라 우주적인 사람은 범죄, 전쟁, 유아학대, 마약중독, 민족주의 그리고 모든 자본주의 경제 분야에서도 면역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언젠가는 자본주의 사회는 파괴되고 모든 반사회주의 활동은 사라지며 풍부하고, 균형있고 활기있는 창조적인 사회가 일어날 것이라 했다. 하지만 완벽한 사회건설을 주장하던 막스주의자들의 이론과 사상은 1986년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 초프가 취한   글라스노스트 ( Glasnost ) 와 함께 자본주의 사회를 따르기 위한 힘든 행보를 해야만했다.  1989년 11월9일 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시작된 공산주의의 붕괴는 불가리아, 체코 슬로바키아,루마니아로 이어지면서 세계의 냉전 체제를 종식하였다.

“종교는 아편” 이라 하여 핍박을 당하던 이곳의 성도들에게 한 권의 성경책 이라도 전해주기 위해 온갖 숨은 노력을 다해오던 서방의 교회들에게 얼마나 값진 선물인가!  우리는 북한을 능가하는 독재정치로 유명했던 니콜라이 차우세스크의 나라 루마니아에서 유럽 속의 한국교회를 꿈꾸며 넓고 비옥한 땅의 한 모퉁이를 일구어가고 있다.

2. 루마니아 개요
서쪽의 다뉴브강 줄기와 흑해사이 에 놓여있고 장엄한 산들과 비옥한 농토들로 둘러싸인 루마니아는 공산주의로 구성된 나라들 틈바구니에서 살면서( 소련, 헝가리, 불가리아, 유고 슬라비아) 빈곤과 무지가 팽배한 채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위한 힘든 행보를 하고 있다. 외형상으로는 남부 유럽 사람들과 비슷한 이들은 2세기에 침공한 로마인들과 자국민인 “다치아인” 들 사이의 결혼으로 로마인의  후예라는 긍지를 갖고 살고있다.  2차대전을 치루면서 보인 변태적 행동으로 “국가가 아닌 집단”이라는 취급을 유럽인들에게서 받기도했으나 지금은 유럽의회에 32번째 회원국이 되었으며 E.C 와 나토가입을 통해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고자 애쓰고 있다.

2,400만 인구 중 88%만이 루마니아 인종이며 2백만 트란실바니아 헝가리인과 독일인, 집시 등이 살고있다. 한때는 발칸 반도의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였으나 공산주의와 차우세스크의 광적인 통치로 지금은 동구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전락해있다.  1989년 12월 티미소아라에서 시작된 혁명으로 공산 차우세스크 정권이 무너지고 일루에스크가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그대로 가진채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어 개혁의 행보는 느리기만 하다.  공산주의 사회구조 이후 철저하게 분열된 삶으로 인해 소망이 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활짝 열려진 추수밭이기도 하다.

1) 왕조 시절의 루마니아
5-6세기경 다치아라고 부르는 원주민과 로마 식민주의자들과의 융합으로 라틴계 루마니아 민족이 형성되었으며 국가명은  “로마인들의 땅” 이라는 뜻을 의미한다. 루마니아인들은 헬라인과 알바니아인들에 이어 발칸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 중 하나이며 터어키,러시아,헝가리 등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언어와 종교를 완고하게 유지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루마니아인들은 두개의 공화국인 몰다비아와 발라치아로 나뉘어 살면서 어떤 때는 터어키인들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한동안은 콘스탄티노플의 헬라 상인들에 의해 다스려지기도 했다.  19세기 오토만 제국이 무너지면서 몰다비아와 발라치아가 독립을 얻자 1859년에 크루자의 알렉산드라 왕자를 통치자로 선출한 후 1861년에 찰스 왕자가 카롤왕 1세가 되었다.  루마니아인들은 스스로를 헝가리인들과 게르만인들 그리고 슬라브인들과 구별하기위해 프랑스어를 개발하였으며 부쿠레스트를 발칸의 파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루마니아는 트란실바니아와 듀얼군주의 영토인 바나트부코비나를 약속받고 연합군에 가담하였다. 1961년에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가 철저하게 패배하였으며 독일인이 부쿠레스트를 점령하고 불가리아인들이 도뷰르자를 되찾아가자 평화를 청원한다. 1918년 루마니아는 연합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의 세력을 의존한다. 그러나 연합군이 터어키와 불가리아를 파괴한 후 다뉴브강을 건너오자 약삭빠르게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후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2차대전시 무정하고 가차없는 보복을 받으며 히틀러의 동맹군에 강요되었으며 소련군의 부쿠레스트 입성을 계기로 45년 동안 비참한 공산주의 치하에 놓이게 된다.

2) 공산주의 시절의 루마니아
1944년 10월 윈스턴 처칠이 모스크바의 스탈린을 방문하여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소련의 지배하에 놓이도록 합의한후 루마니아는 아무런 저항없이 길고 비참한 공산주의의 통치에 들어가게 된다. 1948년 공산주의자들에게 권력이 완전히 이양되면서 비밀 경찰을 통해 국민생활의 모든 영역을 감시받게 된다. 공산당들은 이전의 지도자들을 차례로 숙청하였으며 농업의 산업화와 집단화를 이룩하였다. 하지만 이 집단화로 인해 유럽에서 가장 풍요로운 농경지를 가지고 있는 루마니아는 기아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1961년 공산당 보고에 의하면 군인들이 집단농업에 강요되기도 했으며 80,000만명 이상의 농민들이 반대하다 시련을 당하기도 했다. 수만명의 루마니아인들이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고 180,000명이 징병에 끌려갔으며 완공이 되기도 전에 방치된 다뉴브 흑해간 운하건설을 위해 많은 사람이 강제 노동에 끌려가기도 했고 실제로 이기간 동안 60.000명이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많은 정교회들이 새 정권에 팔렸으며 공산주의자 신부들이 주교로 임명된 후 많은 반대자들을 숙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유태인들을  핍박하여 강제이주를 시키기도 하였다. 많은 반대자들을 간교한 계략과 모함으로 제거한 후 게오르게이유 데주 (Gheorghiu Dej)라는 자가 스탈린의 후광을 업고 제 1대 공산당 서기장이며 수상이 되었다. 다른 공산주의 자들이 집단적인 지도력을 작용하며 레닌주의의 근본적인 강령을 주창하는 반면 루마니아 공산당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탈린주의에 철저하게 복종하였다.
루마니아 공산당은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적극 지지하면서 모스크바로부터의 독립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결국 1958년 소련의 마지막 군대가 루마니아로 부터 철수 하자 게오르게이 데주는 경제와 외교정책에서 조심스러운 독자정책을 펼쳐나갔다. 1965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 루마니아 국민의 아며지요, 맏형인” 니콜라이 차우세스크(Nicolae Ceausescu) 가 많은 동지들의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이 되었다.

3) 차우세스크의 독재정치
1967년 대통령이 된 차우세스크는 소련식 공산주의 통치를 탈피하고 이스라엘의 6일 전쟁 이후 외교적 관계를 단절하였으며 1968년 소련의 체코침공을 반대하고 공개적인 비난을 가하기도 하였다. 곧이어 바르샤바 조약(Warsaw Pact) 가입하였으며 부쿠레스티를 외교적 중심지로 사용하며 미국과 영국 그리고 서방으로부터 호감을 얻기도 했다. 부인 엘레나와 자녀들 그리고 친척들을 등에 업고 기괴한 성품으로 과대망상적인 독재정치를 편 차우세스크는 스스로를 “ 카르페티안 산맥의 위대한 수호신 “ 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1988년 그의 70회 생일때 공산당이 차우세스크를 찬양한 내용을 보면 그가 얼마나 철저한 사상교육을 시켰는가를 알 수있을 것이다. “루마니아 국민은 우리의 동지인 니콜라이 차우세스크, 뛰어난 군사적 혁명가요, 영웅 중의 영웅이요, 현대의 건축가인 동시에 백성들의 가장 사랑받는 아들인 차우세스크에게 깊은 존경과 경의를 표합니다.” 라고 하면서 찬양을 하였다. 하지만 차우세스크 자신은 극히 타락한 생활을 했으며 자신의  궁전을 시내의 중심가에 짓기 위해 19세기 많은 건물들을 파괴하였으며 많은 백성들을 무지와 빈곤의 삶으로 전락하게 한 후 자신은 그 궁전이 완공도 되기 전 혁명군들에 의해 총살을 당한 채 커다란 궁전을 떠나갔다.

4) 공산주의가 남긴 상처들
혁명 이후 루마니아에 들어온 사람들은 루마니아의 넓고 비옥한 농토와 곳곳에 들어선 아파트촌 그리고 자유로와 보이는 외관의 모습을 보면서 공산주의의 잔악상을 잊게 된다. 우리역시 1990년 이후 단기 전도 활동을 펴면서 복음을 갈망하는 수많은 영혼들 속으로 왔다. 하지만 회칠한 무덤사이로 들어온 것 같은 우리의 선교사역은 고통과 수고의 연속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정보가 차단되고 모든 취미가 금지 당했으며 모든 오락이 폐쇄된 채 모든 생활이 비밀경찰에 의해서 감시되었다. 오직 일하고 음식을 사기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유일한 생활이었으며 고기를 사거나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기위해서는 밤새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개인이 구입할 수 있는 양이 정해지기도 했고 신분증이 요구 되었으며 타 도시에서 여행할 경우 음식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자연히 여행이 제한되기도 하였다. 겨울철에는 난방이 부족하여 하루에 난방사용량이 4시간 밖에 안되었으며 방안의 추위를 피해 따스한 햇빛을 쬐기위해 집밖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전기 또한  충분치 않아 60와트 이상은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외국인과의 대화를 불법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타자기나 컴퓨터 소지자는 경찰에 모두 신고하게 되어있었으며 전화도 두가정이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시민 생활이 감시당하기도 하였다.

인구를 2000년대 까지 삼천만으로 늘이기위해 모든 여자들로 하여금 5명 이상의 자녀를 낳게 했으며 낙태가 금지되고 3개월에 한번씩 의무적으로 부인병에 대한 검진을 받게 하였고 이 모든 것을 감시하기위해 철저한 비밀 경찰을 두고 있었다. 결국 막스주의자들의 주장하던 공산주의의 완벽한 이상은 많은 가정을 파괴하고 대부분의 시민들을 무지와 빈곤으로 전락시키고 막을 내렸다.

오늘날 공산주의가 남긴 상처를 보면 이혼으로 인한 가정파괴와 청소년들의 타락, 권위주의적인 행정, 낡은 주택, 게으름, 빈부격차, 의심, 시기, 질투, 실업률, 이기주의,  무지에 의한 교만, 각종 질병등이 한데 어울려져 있어 주님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마 9:12) “ 말씀을 절실하게 한다.  정교회의 영향 아래 있었고 공산주의였던 이곳의 높은 이혼율을(외관상으로는 50% 이상으로 보임)보면 공산주의 체제의 상처를 실감할 수 있다.

19-29세 사이의 인구 5,215,000 명중 결혼한 사람이 196,400 명이고 이혼한 사람이 56,000명이다. 이중 3,455,000명은 활동이 가능하고 2,844,000명은 직업이 있으나 812,000명은 실직자며 나머지는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이다.  0-9세 사이의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젊은 여성들이 1,651,656명이며 15-29사이의 여성인구 2,560,632명 중 아이 하나를 가진 이가 507,632명 아이 두 명을 가진 사람이 317,863명 셋 이상 가진 사람이 150,000명 이상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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