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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The Homeless Jesus: 예수: 노숙자

[루마니아 통신]  정홍기 선교사/ 시온장로교회 – <3>

주로 열린 포장 마차를 타고-한 떼를 이루어 [앞에는 남자 뒤에는 여인들과 아이들 옆에는 개들] -여행자 같이 사는 짚시 들은 동 유럽을 중심으로 유럽에 흩어져 있다. 돌아갈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어 살고 있는 이들 [물론 돌아갈 고향이 없는 이들이다. Nostalgia-a return home- for utopia-no place] 에게 인생은 “긴 여정이” 이나 노숙자와는 다르다.

나는 옥스포드, 암스텔담, 프라하, 프랑크푸르트, 부카레스트에서 노숙자들을 보았다. 원래 자기 집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집을 잃고 거리에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처 없이 떠 도는 짚 시들과는 다르다. 짚 시들은 어디든 머무는 곳이 자기네 집이다. 하지만 노숙자는 한 떼 집이 있었기에 그 집안에 있는 가정을 그리워한다. 마치 나의 친구 마르코스가 이혼을 한 후 모든 것을 부인에게 빼앗기고 아프리카의 콩고의 도시를 헤 메이다 자식들을 보기 위해 스위스의 어딘가로 불러내는 것처럼 가정을 그리워하는 노숙자들이 오늘도 우리 주변에 있다.     

나는 2004년 6.18일 브룩셀에서 채택된 유럽 연합의 헌법이 “서구 문화와 기독교 신앙의” 결별을 선언 함으로 예수를 노숙자로 몰아내었다고 간주한다.

각 회원국들의 국가적 독특성과 인권의 존중, 정의로운 사회와 환경에 치중하고 문화와 종교 인본주의의 유산에 바탕을 둔 헌법은 민주주의와 평등, 자유, 법에 의한 통치를 헌법의 강령으로 가지고 있지만, 유럽 문화의 기초가 되는 기독교적 유산의 가치를 헌법 전문 어디에도 삽입하지 않음으로 서구 문화와 기독교 신앙’이 결별을 하면서 예수의 거처를 허물어 내렸다.     

헝가리의 대 주교인 Monsignor Peter Erdoe 는“기독교가 없는 유럽은 심장을 잃는 것이다”했으며, 독일의 엘머 브록은 [Elmar Brok, a European deputy from Germany]“유럽은 전반적으로 기독교 유산 위에 세워졌다”하였다. 반면에 기독교나 하나님을 헌법에 삽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중 아일란드의 인본주의 협회 Proinsias De Rossa 는 “헌법에 하나님이 언급 되는 것은 하나의 실수 그것도 커다란 실수 다” 했으며, 테리는 [Terry Sanderson, vice president of the UK’s National Secular Society] “우리는 하나님 이란 단어가 전문에서 빠진 것에 대해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 하나님이란 단어가 불필요하게 유럽을 분리하고 있다. 유럽은 세속주의로 연합 되어야 한다.” 고 말하기도 하였다.  

유럽은 영적 도덕적 유산인 기독교를 버리고 다원주의적인 문화적 유산을 기초로 헌법의 전문을 세웠다. “전문 1에 유럽 연합은, 자유, 평등, 민주주의, 다원주의 그리고 세속적인 법률의 원칙을 기초로 삼으며,인권의 보장과 인간의 기초적인 자유를 보장한다.

마틴 로빈슨이 10년 전에 유럽의 문화가 기독교 신앙과 점차적으로 이혼 할 거라고 했는데 이것은 완전한 결별이다. 기독교적 신앙과 가치는 더 이상 서구인들의 삶에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유럽의 문화는 어떤 것에도 권위를 인정 하지 않고 자신의 이상과 신념 가치 그리고 스스로의 도덕적 기준을 세워가며 권위에 순응 하지 않는 ‘권위의 위기’라는 문화적 위기를 맞고 있기도 하다.

카톨릭 신학자이며 튀빙겐 대학의 교수였던 한스 큉은 기독교 인이라 할 때 그것은 “ 삶의 모든 면에서- 아주 실제적인 면에서 까지- 무엇이 본질적인가를 그리스도가 주관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했다.  헌데 서구에서 기독교는 인간의 삶의 현장을 그리스도가 지도하게 하기는 커녕 기독교인이 사라져 가고 예수 그리스도가 잊혀져 가며, 성경이 고서가 되면서 하나님과 윤리적 규범들에 대한 모호한 생각을 가져가고 있다. 따라서 서구의 기독교가 앞으로 얼마나 지탱 할 것인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가 유럽에 알려지게 된 것은 사도바울이 마케도냐인의 부르심을 받고 빌립보에 이르면서부터 로마제국의 나라들을 거쳐 대륙과 스칸디나비아 대영제국 등에 전파되었다. 그렇게 전해진 기독교는 후에 유럽의 문명의 중심축을 이루게 되었다. 덴마크의 전 수상인 플레밍 코포드 스벤슨은 Flemming KofodSvendsen  강조하기를 “만일 복음이 유럽에 전해지지 안 했다면 유럽의 역사는 완전히 다른 역사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라 하면서 유럽에서 기독교의 중요성을 인정 하였다.

유럽의 문명은 대체적으로 기독교의 가치와 믿음에 폭넓은 바탕을 두고 있다 하겠다. 하지만 기독교의 가치와 신앙이 더 이상 유럽인들의 대중 문화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 경제, 교육, 커뮤니케이션 산업들이 더 이상 기독교의 가치관을 적용 하거나 가르치는 일에 중요시 하지 않고 있다.

현대화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앙과 이상, 전통 들은 서구 기독교인의 삶에서 철저하게 세속화 되어가고 있다. 현대화에 기인한 세속주의 는 창조주를 여분으로 만들고 기독교 가치와 신앙들을 대중의 삶에서 지워내고 있다. 인간도 신 이 될 수 있다는 동양의 종교사상이 개개인을 신비스러운 동양의 종교들에 관심을 돌리게 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유럽에서 예수가 노숙자가 되어가고 있는 주요 원인은 개인주의와, 현대화, 문화의 다원화 그리고 종교적 신비주의에 기인 한다고 본다.  

1. 개인주의
아베든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스티브 부르스 [Steve Bruce the professor of sociology at the University of Aberdeen] 는 종교개혁이 이성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현대과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동시에 기독교 연합의 붕괴의 시초라고 보았다.  
현대화에 대한 개념은 여러 면에서 종교 개혁과 관련이 있다.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은 종교적 혁신의 시발점 이기도 한 반면에 개인주의의 시발점 이기도 하다. 개인적 구원을 강조 하는 교리가 공동체적 교회 관을 약화 시키었다.
종교개혁은 참 진리인 신앙을 배우고 그 신앙을 따라 살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개인적 책임을 강조 하였다. 점차적으로 19세기 중반부터 개인주의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는 것에 자유를 갖는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 하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견에 옳은 것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찾게 되었고 세계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보여질 수 있다고 생각 하게 되었다.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 자연히 그리스도의 몸으로 서의 교회 관을 약화시키고 분열하는 경향을 가져오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개인주의는 공동체적인 개념의 신앙생활과 행동을 위협한다.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며 하나님의 뜻을 주관적으로 보게 되는 오류를 범한다. 물론 종교개혁의 개인주의는“너 자신이 너 자신에게 의무감을 가진다 하며 자신의 흥미와 자신의 의무”감을 강조하며 현대 서구 개인주의 생활의 흐름에 기여한 계몽주의 개인주의와는 다르다.

2. 현대화
프랑스의 사회학자 작스 엘룰은 현대서구 사회가 이룩한 현저한 업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아에 대한 중요성의 등장으로 개인을 부족과 자연, 그리고 우주에서 분리하는 것, 비평적 과학적 방법의 발전, 인간의 자유와 개인주의의 중요성. 이 세가지는 현대인의 삶에 서로 연결 되어 있으며 후기 현대사회를 붙잡고 있다. [Sweet, 1999]
보스톤 대학의 사회학 과 신학부의 교수인 피터 베자는 현대화란 고급화된 기술의 발달로 인해 경제가 발전 함으로 공공 기관과 문화에 여가로 생기는 것들 이라고 정의하였다. 현대화는 인간이 세상과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라 한다. 전에는 운명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이제는 선택의 여지에 놓여있다. 즉 모든 인간의 문제들이 기술로 인해 해결될 수 있으며 만약에 해결 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면 기술을 개발 하면 되는 것이다. 세계는 이제 만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미시간 대학의 로날드 잉게하르트 교수는 [Ronald Inglehart at the University of Michigan] 경제 발전은 도시화, 산업화, 대중 교육, 전문 직업, 관료화, 커뮤니케이션 발전 등과 같은 변화의 증후들과 관련이 있어 사회 정치적 변화들을 주도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 하였다. 당연히 소비와 관료화, 대량 생산 등과 관련된 문화와 정치적 변화를 결정 함에 있어서 그러한 변화는 필연적이라 하겠다. 현대화는 제조와 상업을 목적으로 도시 주변으로 사회를 형성해 가도록 요청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기술의 혁신에 의해 동력화되고 자본주의의 기초에 기인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현대화는 외적인 사회적 환경인 생산을 염두에 두므로 자연히 종교와 관련한 내적인 의식들엔 비 협조적이다. 그러므로 잘 발달된 현대화의 사회는 종교는 개인적 일로 사회의 생산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현대 도시사회의 일터는 책임감을 결여하게 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 신앙이나 도덕적인 것들에 대해 가볍게 여긴다. 도시는 자기들 만의 심리학적 환경을 만들어 내고 세계관이나 문화 종족 개인의 가치에 따라 함께 지낼 수 있는 친밀한 사람들의 그룹을 형성하게 한다.
현대화는 도시 중심의 삶을 기초로 사회적 변화의 과정을 포함한다. 당연히 변해가는 도시 생활에서 문화나 종교에서 다원화는 필연적이며 종교적 가치는 삶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된다. 내 생각에 현대화의 결과는 세속적인 정치, 문화의 다원화 그리고 도시화 기술로 인한 대량 생산 이다. 따라서 자유 민주주의에서는 생산의 판매와 분배가 우선이 된다.

현대화의 전통은:  
1] 과학이 종교의 자리를 대신했다. 과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신앙이 되었다.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볼 수도 없고 그가 이 세상을 주관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도 없다. 종교는 기독교를 포함해 도덕이나 윤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지 자연의 세계에 대해서 말할 필요가 없다.
2] 신앙은 개인적이지 대중적 진리가 아니다. 신앙 (Belief) 은 개인의 의견이나 (Opinion) 또는 가치관의 개념이다. 모두가 믿어야 하는, 믿을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Fact) 사실의 세계는 객관적 진리를 요구한다. 그래야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있다. 주관적 진리는 없다. 단지 그 사람의 의견일 뿐이다. 그리고 모두의 의견은 존중할 가치가 있다. 그 의견자체로서 누구도 그것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다. 모든 종교는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종교는 취향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그것이 당신의 적성에 맞습니까? 그러면 하십시오 (Does it work for you? Do it)
3] 새로운 대중 신조의 등장
현대사회는 대중 의견이 주요 신앙으로 수용되었는데 계몽중의 때부터 영향을 끼쳐왔다.
A. 계몽주의가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신앙 확신을 주장했다.
B. 선하다는 개념은 발전, 진보한다는 개념과 접하면서 과학, 교육, 정치의 변화 진보가 인류에게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준다고 믿는다.
C. 계몽주의 시대에는 인간이 중심이었지 하나님은 아니었다. 개인이 중심이고, 사회의 존재는 개인의 선택의 산물이며 개인이 사회의 중심이다. 사회에서의 의무는 중요치 않다. 광범위한 자유 민주주의를 선호한다.
D. 행복을 추구하는 세계관을 가져다 주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 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믿었다.

4. 문화의 다원화
유럽의 정치적 변화 중 하나는 그들의 이전 침략국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들이 유럽 문화와 종교적 변화를 초래한다. 즉 거절할 수 없는 다원사회를 조성하고 있다. 다양한 종족의 종교들이 유럽의 사회에서 혼합되면서 종교적 다원주의를 발전시켰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라고 전하는 것이 Ethnic 그룹의 신앙과 문화적 가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허락되지 않는다. 기독교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인정치 않는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많다. 종교와 도덕적 가치는 개인 선택의 문제이다. 신앙과 생활 스타일에 옳고 그름은 없다. 이 세상의 여러 종교와 가치들 중에서 구미에 맞는 것을 종교적 슈퍼마켓 (Religious Supermaket) 에서 고르면 된다. 그리스도가 유일하고 구원을 제공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됨을 받고 있을 뿐이다. 신앙 역시 여러 다른 신앙과 같은 것 중 하나이다.
니버에 의하면 기독교 종파들이 서로 자신들이 최상의 생활과 문화를 다루고 있다 하면서도 모든 것에 모든 것 되는 그리스도를 반영하지는 않고 있다 한다.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는 문화를 개혁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무시하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나라의 지식, 예술, 문화를 확장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종교 속에 묶여있는 그러한 문화들을 지워내기 위해 오셨다.” 헨스 클라우스너가 말 한 것처럼  “예수는 물질 문명과 관련된 모든 것을 무시하였다. 어떤 면에서 예수는 문명에 속하지 아니 하였다. 역사적으로 문명과 이념들은 자신들의 문화에 위협이 되는 그리스도를 배척 하였다. [Niebuhr, 4]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을 오늘날의 문명과 문화의 발달이 아닌 다른 세계에 두게 하였다.

결론
따라서 오늘날 후기 현대화와 정보기술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예수를 노숙자로 만들어 가고 있다면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망을 다른데 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 믿음과 진리 가치들을 유지해 간다 하면서도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 모든 분야에서 우리를 인도 하도록 내어 드리지 못하고 가치관과 소망을 이 현대화의 문명에 기대도록 함으로 우리의 신앙에서 이미 예수는 노숙자가 되어있다 하겠다.
그리스도인 이라 할 때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어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하나님은 손자가 없기 때문에 모든 개인이 인격적으로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 종교개혁이 전해준 전통적 가치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 하겠다. 하지만 예수를 믿음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공동체에 속하여 개인주의적 가치를 중요시 하는 삶을 살기보다 교회 공동체적 삶의 가치에 역점을 두어야 하는 것에서 유럽인들은 익숙해 있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문화라는 테두리 안에 묶이어 개 개인 그리스도인들을 무기력 하게 하고 있다. 무기력한 그리스도인들이 현대화의 짐에 깔려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다. 와서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는 그들을 외면하기는 너무 안됐지 않은가? 개인들의 삶에서는 아직도 예수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할 지 모르나 사회 문화 속에서 노숙자가 된 예수가 개인들의 삶에서도 노숙자로 버려질 날을 우리는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Flemming Kofod-Svendsen, Christianity and the Future of Europe Website; Hope for Europe, 1997 available from www.hfe.org.
That upheaval in the religious and political life of Europe can be conventionally dated as starting on the last day of October 1517, when Martin Luther nailed his list of complaints about the state of the Church to the door of the cathedral in Witte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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