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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힘썼던 신앙인-주기철 목사

[순교자]  주기철 목사(1897-1944) 이야기

주기철 목사(1897-1944) : 일제 말엽, 신사참배 반대로 항거하다가 평양 형무소에서 순교한 주기철 목사는 경남 웅천 사람이었다. 1912년 오산학교에 입학을 하여 민족정신이 강한 조만식과 이승훈의 가르침을 받은 어린 주기철은 강한 애국심을 갖게 되었다. 1921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며 자신의 몸을 주께 바치기로 작정하였다.

1938년 2월,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고 반대하는 주목사를 체포하였다. 5개월 후인 7월에 풀려났지만 주목사는 2차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으나 다시 3차 체포되었다. 1938년 9월, 제 27회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할 수 있다고 결의를 하였다. 회가 신사참배를 할 수 있다고 결의를 하였기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치안을 어지럽힌다 하여 요시찰 인물로 지목이 되어 항상 형사들이 따라다녔다. 1940년 8월, 신사참배 반대자를 모두 체포하라는 지령이 내려져 전국에 반대하거나 반대운동을 하는 인사들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주기철 목사는 네번째 체포되었고, 마지막 길이었다.

1941년 3월 20일, 평양 노회가 모여 주기철 목사를 목사직 파면을 결의하였다. 1개월 후인 4월 23일, 부활주일에 평양 노회는 주목사를 잃은 산정현 교회가 주목사와 같은 노선을 걸으며 신사참배를 반대하기 때문에 교회 문을 못박았다. 교회에 교인들의 출입을 막은 것이다. 이것은 일본 경찰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조선 예수교 장로회 평양 노회가 그렇게 한 것이다. 1941년 4월부터 전국에 있는 신사참배 반대자나 반대 운동 인사들을 모두 체포되었다. 경남 지방에선 한상동, 주남선, 최상림 목사, 전라 지방에서 손양원 목사, 경남 일대의 최덕지, 손명복 전도사, 이현속 장로 등이 다 체포되었다. 1941년 11월, 평양노회에선 주기철 목사 가족들을 사택에서 쫓아냈다.

비정한 일이었다. 일본에 아첨하는 교직자들이 주목사의 가족들을 비국민이라 하여 추위가 오는데 밖으로 내쫓아버린 것이었다. 형무소에 수감중인 주기철 목사는 돼지 사료같은 식사로 목숨을 이어가기가 어려웠고 이때부터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부인인 오정모 사모가 면회를 왔을 때, 주기철 목사는 “난 더 견지지 못할 것 같소. 나는 주님의 맡기신 일을 감당하다가 가지만 어머님께는 미안합니다. 어머님께 효도하지 못한 불효 자식임을 생각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팔순이 넘은 노모를 두고 앞서 가는 불효 자식을 대신하여 당신이 어머님 많이 위로하시고 봉양 잘 해 주시오”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4월 20일 주기철 목사는 별세하였다. 그는 많은 일을 하지 않았다.

교회를 개척하거나 대형 교회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신앙의 굳은 지조를 지켜 순교의 꽃을 피운 것이었다. 그는 순교자로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순수신앙의 뿌리를 남겨 놓았다.
– 심군식, [한국교회 인물 25人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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