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목회칼럼 > 교황 직을 정착시킨 인물 _레오 1세
목회칼럼오피니언

교황 직을 정착시킨 인물 _레오 1세

[로마칼럼] 한평우 목사, 로마한인교회

힘이 주어질 때 긴장하고 조심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볼 때 레오 1세는 서로마 황제보다 더 큰 국민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황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두 번씩이나 건져냈다. 겁 많은 황제는 이런 위기를 보고 줄행랑을 쳤는데 말이다. 이처럼 서로마를 위기에서 두 번씩이나 구원하였으니 그 위세가 어땠을 까 싶다. 그는 이런 위세를 몰아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였다…

역사를 보면 상황이 어떤 개인을 영웅으로 만들어 주기도 하고 역적이 되게도 한다.역설적인 말이 되겠지만 아마도 풍신수길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면 이순신 장군은 영웅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주 평범한 지방의 고을 원님 정도로 일생을 보냈을지 모른다.역시 레오 1세가 수많은 교황들 중에서 두 사람에게 만 붙여주는 대(Magnus)교황이란 칭호를 받게 된 이유도 당시 서로마의 정정 불안 때문이었다.

5세기 서 로마는 정치적으로 아주 무력한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서 꺼져가는 등불처럼 망하기 일보 전이었다.
1천년동안 세계를 호령했던 로마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분할정책에 의해 동, 서로 나누어졌고, 서 로마의 수도도 밀란으로 옮기게 되었다.
밀란으로 옮긴 이유는 알프스 산이 가깝기 때문에 준동하는 게르마니아 족들의 침략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장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만큼 로마는 국력이 쇠약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로마의 유일한 자존심은 바티칸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티칸이야 말로 베드로의 후계자가 거하는 곳이었기에 불안한 로마인들의 영적 안식처가 될 수 있었다. 1차적으로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자 소위 힘 있는 자들이 보따리를 싸았고, 또 수도가 밀라노로 옮겨감으로 모든 정치가들이나 출세를 지향하는 자들 및 이권에 밝은 자들이 보따리를 싸 떠났기 때문에 로마는 패자들만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로마 사를 기록한 영국의 기본은 당시 로마의 인구가 120만정도로 밝히고 있으니, 로마는 인구가 점차 줄어드는 상황이 되었으니 그 쓸쓸함을 상상할 수 있겠다 싶다.
폐쇄된 대학교 주변의 풍광처럼—

레오 1세(Papa San Leone. Leo I, 400~476)는 피렌체의 토스카나 지방에서 태어났다.
토스카나 지방은 구릉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영화의 촬영지로도 선택되곤 된다. 아름다운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게 될 때 성품이 온화하고 감성적인 면이 강하게 된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대가들은 대부분 피렌체 주변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조또,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다빈치 등등–
레오는 사자라는 의미로 주교가 되어 두각을 보인 인물이었다. 고로 식스토 3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선출하였을 정도로–
그는 교황으로 있을 동안 중요한 일들을 처리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단에 대한 결단이었다.

콘스탄티노풀 근교의 수도원 원장 에우티케스(Eutyches-454)는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태어나심은 인성이 신성에 의해 흡수되어 신성만 지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단성설(Monophysitism)인데, 레오는 그를 단죄하고 그리스도는 한 위격 위에 두 본성을 지녔음을 온 세상에 선언하였다. 또한 그는 칼케돈 공의회를 열어 신앙 고백 문을 발표하였는데, 그리스도는 함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다, 신성으로나 인성으로나 모두 완전하다. 신성과 인성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혼합되지도 변화하지도, 구분되지도 분리되지도 않는다. 이런 결의를 한 것은 성령께서 회의에 개입하신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신학적으로 잘못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사람을 하나님께서 공의회를 통해 역사하셨다. 그는 성령의 도움으로 신학적 물줄기를 바르게 돌려놓은 사람이다.
또한 그는 국가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지혜롭게 대처하곤 하였다. 로마가 무력해지자 주변의 사나운 무리들이 기회를 노리고 쳐들어 왔다. 그 중에 가장 강력한 무리가 바로 유럽의 간담을 서늘케 만든 훈족의 아틸라의 침략이었다.
당시 구라파에서는 아틸라를 얼마나 두려워하였던지 어린아이가 울 때, 우리나라에서는 “울면 호랑이가 온다”고 했는데 구라파에서는 “울면 아틸라가 온다”고 했다고 한다.

아틸라에 대한 소문이 얼마나 많았던지 작곡가 베르디(Giuseppe Verdi1803-1901)는 아틸라(Attila)라는 오페라를 만들기까지 했다. 아틸라가 로마를 향해 진격하여 올 때 황제는 그를 막을 힘이 없었다.
그는 레오 1세에게 간곡하게 중재를 요청하는 바람에 그 어려운 일에 나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두 사람의 원로원을 데리고 아틸라가 진을 치고 있는 만토바(Mantova)에 있는 그의 진영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그와 협상하여 물러가게 했는데 잔인하고 사나운 앗틸라를 물러가게 한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있다. 하나는 동 로마처럼 많은 황금을 주고 물러가게 했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서고트족의 대장 알라릭이 신성한 로마를 약탈한 후 갑자기 비명횡사를 하였는데, 당신도 그럴 수 있다고 겁을 줌으로 두려워하여 물러가게 했다고 한다.
또한 레오가 보좌관으로 원로원 두 명을 데리고 적진에 갔을 때, 베드로와 바울이 칼을 빼들고 레오 1세를 보호하는 형상을 앗틸라가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이 형상을 르네상스의 대가 라파엘은 바티칸 박물관에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아무튼 잔인하고 사나운 앗틸라가 로마를 약탈했다면 그 파괴는 상상할 수 없이 컷을 것이다.

레오 1세는 로마를 또 한 번 구원했다. 반달족의 지도자 겐세리크가 로마를 약탈하기 위해 로마 근교 오스티아에 진을 치고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겐세리크는 로마인들이 먹어야 할 오스티아 항구에 저장된 수많은 곡물창고에 불을 지르겠다고 위협하며 협상조건을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레오 1세는 그를 만나기 위해 또 다시 적진으로 찾아가야 했다. 이번에는 그를 완전히 물러가게 하지는 못하였으나 몇 가지 조약은 할 수 있었다.
즉, 기독교와 관련된 시설과 사람을 죽이지 않도록 했고,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죽이지 않도록 하고, 포로를 고문하지 않도록 협의하였다. 겐세리크 역시 기독교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세상의 어지러움 속에 사람들의 마음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 궁금해 했다.
천년동안 세계를 호령했던 로마가 처참하게 망해가는 상황을 들은 어거스틴은 이 세상국가가 아닌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는 의미로 신의 도성이라는 책을 쓸 수 있었다.
고로 어떤 면에서 볼 때 레오 1세는 서로마 황제보다 더 큰 국민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황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두 번씩이나 건져냈다. 겁 많은 황제는 이런 위기를 보고 줄행랑을 쳤는데 말이다.
이처럼 서로마를 위기에서 두 번씩이나 구원하였으니 그 위세가 어땠을 까 싶다. 그는 이런 위세를 몰아 로마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하였다.
로마감독의 수위권에 대해서는 스테파누스 1세(254-257)가 처음 주장하였고, 다마수스1세(366-384)가 강력하게 주장하였지만 역사적으로 로마의 감독을 교황으로 칭할 수 있는 사람은 레오 1세다. 그는 교황 직을 정착시킨 인물이다.
또한 그는 이 교도의 최고 사제를 가리키는 말이었던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전에 로마황제들이 사용하던 명칭)란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누구나 강력한 힘이 주어질 때 자신의 자리를 견고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큰 교회를 목회하는 분들이 자식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힘의 특성은 나누어 줄 수도 없고 누구에게 넘길 수도 없다.
고로 힘이 주어질 때 성도는 심각하게 긴장하고 조심해야 한다. 진리를 훼손하지 않도록 말이다.

댓글 남기기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Previous Next
Close
Test Caption
Test Description goe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