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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위기진단오피니언

참된 교리를 가르치라

[한국교회를 말한다] 김남준 목사/ 열린교회

⑤ 교리교육 없이 그리스도의 제자는 없다

나는 칼빈의 가르침과 그가 남긴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칼빈주의자 김남준으로 불리고 싶지는 않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과 성품의 시행방식을 아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체계적인 가르침이 바로 교리이다. 베르나르두스(Bernardus)가 주장했듯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다.” 복음 교리는 충만한 사랑과 생명으로 역사하는 진리다. 우리의 피를 바를 교리는 시대와 분투함으로써 녹여낸 고백적 가르침이어야…

김남준목사

어느 해, 호주의 이민교회에 집회를 갔을 때의 일이다. 그곳에서 만난 목회자는 자신의 교회의 한 중직자를 소개하며 그의 깊은 신앙과 헌신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그리고 나와 그 도시의 몇몇 목회자들을 그 중직자의 집으로 인도하였다. 그 집에서 일행이 함께 점심식사를 대접받았는데,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나누는 동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덕분에 잠시 피로가 가시는 듯 했다. 그런데 내 옆에 앉아있던 그 중직자는 자꾸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렸다. 이윽고 그가 내 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목사님, 식사 후 다른 방에서 저좀 만나 주십시오.”

식사 후 일행들이 거실에서 차와 다과를 들며 담소하는 동안, 그는 나를 조용한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내게 황당한 질문을 했다. “목사님, 평생토록 간직했던 질문입니다. 만약 이 세상을 다 살고 죽었는데, 성경이 진리가 아니고 이슬람의 코란의 진리면 어떻게 합니까?”

교리란 무엇인가?

‘교리’(doctrine)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흔히 ‘가르침’ 혹은 ‘교훈’이라고 번역된다(딤전 1:3, 4:16). 신약 성경에서 사도나 목사, 혹은 교회의 가르침은 단지 성경적 사실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구원 역사나 내용을 해석하고 체계적으로 구성하여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제시된 가르침이다(눅 24:27, 행 5:42). 따라서 교리는 ‘건전한 기독교 가르침의 체계적인 진술’ 혹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체계적 진술’이다.
사람들은 흔히 ‘교의’(dogma)와 ‘교리’를 혼동한다. 교의는 보편교회에 모두가 받아들이기를 바라며 공교회의 결정을 거쳐 신조화된 신앙의 가르침을 지칭하며, 교리는 그것에까지 미치지 않는 복음 신앙의 체계적 가르침을 포함한다.
더 이상 요약할 수 없는 복음의 핵심은 이것이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Jesus died for us).”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하기 위해서는 그 진술의 뜻을 해석해 주고 체계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것은 곧 복음의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설교자들을 일으키는 사건이었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서 구약과 신약의 역사를 관통하는 구원사의 맥을 발견하였다. 그 맥의 중심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교리는 “복음에 대한 체계적인 가르침”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복음과 복음에 대한 체계적 가르침은 떼놓을 수 없는 것이었고, 이것이 바로 존 오웬(John Owen)이 “복음은 복음 자체의 복음 교리에 대한 지식이다”라고 말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복음의 관점에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갖는다는 의미이며, 신앙의 성숙은 복음교리의 빛 아래서 이 세 대상에 대한 보다 확고하고 체계적인 관점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는 흔히 생각하는 논쟁과 사변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17세기 화란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Petrus van Mastricht)가 지적한 바와 같이 “교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한 것이다.”

뼈대 없는 신앙을 경계하라

교회는 크게 세 대상을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교회 자신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인데, 마지막 목적은 신자 각 사람을 온전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온전하게 함을 의미한다(엡 4:12). 여기서 각 사람을 ‘온전하게’한다는 것은 사랑과 지식에 있어서 완전해지는 것이다. 지식은 복음을 믿고 또한 복음교리를 배움으로써 증진된다.
오늘날 조국교회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위기는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과 신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들을 교회 회원으로 받아주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한번 반성해 보자. 오늘날 교인들이 세례 문답을 위한 교리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가, 혹은 2종보통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 더 열심히 공부하는가?
그리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렇게 세례교육을 받은 후에는 제대로 교리교육을 받을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다. 여러 종류의 성경공부를 하지만 그 중 상당부분이 교제나 모임을 위한 동기부여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 결과 교인들은 오래도록 교회 다녔지만, 특별히 예수 때문에 변화된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갖지 못한다. 세상의 문화적 풍조나 도덕 기준에 대한 남다른 확신을 갖지 못한다. 세상의 문화적 풍조나 도덕적 기준에 대한 그리스도인다운 분별력이 없기에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는 삶을 살아가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것이다(롬 12:1~3)
성경에서 ‘제자’라는 말은 세 가지 범주로 사용되었다. 가장 좁게는 12제자를, 좀 더 넓게는 예수를 열렬히 따르던 사람들을, 가장 넓게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킨다(마 12:49, 10:1, 행 15:10). 오늘날에 와서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온전히 인정하고 하나님 나라의 소명을 따라 온전히 헌신하며 사는 신자를 ‘제자’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신자가 됨으로써 새로운 사상을 가지고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행 5:38, 28:22). 그 삶은 사상을 따른 것이고, 그 사상은 조직화된 진리의 체계를 가리키는데 이것이 바로 교리다.
따라서 신약 성경이 가리키는 제자는 예수 사상을 가진 사람이다. 예수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경험과 복음 교리의 이해를 통해 습득되며, 제자의 삶은 이 사상을 따라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에 헌신한 삶이다. 그러므로 교리 없이 흐느적거리는 연체동물 같은 신자는 진정한 예수의 제자일 수 없다.

체험된 교리로 살게 하라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개혁교회나 청교도주의의 교리를 매우 강조하면서, 자신들이 지지하는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따르는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교회와 지체들을 배도의 길을 가는 무리들로 보고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신자의 음울한 정신을 거룩함의 표지로, 사소한 교리적 차이에 교회를 기꺼이 파괴할 수 있을 것 같이 행동하는 것을 경건의 증거로 여긴다.
지난 세기에 청교도 신학과 삶으로 목회했던, 영국의 윌리엄 스틸(W. Still)은 이런 잘못된 신앙의 경향을 가리켜, 정통적 청교도 신앙의 계승자들과 구별하여‘신청교도주의’(Neo-Puritanism)라고 불렀다. 청교도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개혁신학과 청교도주의 위대한 전통은 그 거룩한 사랑과 충만한 생명력에 있다. 그것은 단지 대쪽같은 교리지상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개혁주의와 청교도 신앙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들이 믿는바 성경적인 교리를 깊이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것이 된다. 그리하여 자신의 확고한 신학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신앙의 근본 조항이 아닌 한,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교파의 사람들을,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가르친 것처럼 ‘토투스 크리스투스’(totus Christus) 곧 ‘보이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김’으로써 끌어안고, 그 포용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보편교회를 향한 사랑을 입증하여야 한다.
나는 칼빈의 가르침과 그가 남긴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칼빈주의자 김남준으로 불리고 싶지는 않다. 위대한 청교도 존 오웬을 일생 탐구했지만 오웬주의자로 기억되고 싶지 않고, 사실상 뉴잉글랜드의 마지막 청교도 조나단 에드워즈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에드워즈주의자로 일컬어지기를 사양하며, 내가 기독교 작가들 중 유일하게 ‘천재’로 인정한 아우구스티누스 앞에서 무릎을 꿇는 마음으로 일생동안 배웠지만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로 불리고 싶지 않다. 그러한 스승들에게서 배웠으나, 나는 단지 나이고 싶다. 나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나의 창조목적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주체로 사는 구도자’로 남고 싶다. 마찬가지로 나는 진심으로, 지금은 물론 후대에도 나의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이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의 책과 설교가 그것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고 복음교리와 사상을 배우는데 도움을 준 후에는 휴지처럼 버려지길 바란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형상을 가진 참된 주체로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구도자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신자는 각자 자신이 경험한 교리의 깊이를 따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웨스트민스터 기준문서들을 비롯한 개혁교회와 청교도들의 신앙적 유산이 자랑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의 교회가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 문답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이외에는 가르칠 것이 없고, 그들과 전혀 다른 역사 맥락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지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유일한 교리의 내용이 그것들이라면, 개혁주의와 청교도주의를 따르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들이 그들의 시대에 몸부림쳤던 그들의 피가 묻은 교리의 가르침이었다면, 우리의 피를 바를 교리는 우리의 시대와 분투함으로써 녹여낸 고백적 가르침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과 성품의 시행방식을 아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체계적인 가르침이 바로 교리이다. 베르나르두스(Bernardus)가 주장했듯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다.”
인간이 자기의 신념과 학문으로 지지하고 싶은 교리를 결정할지 모르나, 복음 교리는 충만한 사랑과 생명으로써 자신이 진리임을 입증한다. 그러하기에 조나단 에드워즈(J. Edwards)의 한 마디는 거룩한 판결처럼 우리의 마음에 울린다. “참된 기독교 영성의 열매는 사랑이다.”
최선을 다해 참된 교리를 가르치면서도, 우리가 어린 아이처럼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음은 그 가르침을 사랑과 생명으로 역사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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