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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역사기행

초기 이슬람 속에서의 네스토리안 교회

[실크로드와 복음루트] 최하영 목사/ GMS 우크라이나선교사

(4회) 실크로드 천년 교회사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세운 후 30년의 족장 칼리프 시대와 100년의 우마야드 칼리프 왕조 때에 아랍과 시리아까지 점령하였지만, 그곳에 있는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정책을 썼고, 그로 인하여 많은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이 고위직 관리와 학문 · 학교 · 의료 · 상업 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초기 이슬람은 이슬람 설립자 무함마드와 30년간 족장 칼리프시대와 100년간의 우마야드칼리프 시대를 말한다. 이 초기 이슬람 속에서도 네스토리안 교회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공존하며 생존 및 부흥하였다.
이슬람 설립자 무함마드(Muhammad, 571-632)는 유복자로 태어났고 어머니 아미나도 일찍 죽자 잠시 하심가 할아버지 아브드 알 무탈리브에게 맡겼으나 그도 곧 죽자 가난한 삼촌 아브 탈리브에게 맡겨졌다. 그래서 교육도 받지 못한 문맹인 무함마드는 12살 때부터 삼촌을 따라 대상여행을 하면서 많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을 만났다.
그 중에 아랍사막 보스트라(Bostra)의 주교인 바히라(Bahira)가 무함마드가 예언자가 될 인물로 격려하였다. 또한 에디오피아인 전기 작가이며 알 하드라미 부족(B. al-Hadrami)의 노예이며 기독교인 자브르(Jabr)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무함마드는 메카를 바라볼 수 있는 알마르와(al-Marwa) 언덕인 자부르의 오두막에서 그가 가져온 기독교 문서들을 자부르를 통해서 배웠다. 그는 25살때에 40살 부자 과부 하디자와 결혼하면서 오직 히라 산에서 명상만 하였다.
어느 날 그곳에서 계시를 받고 부인 하디자의 소개로 그녀의 조카인 와라카(Waraqah ibn Naufal)로부터 그 계시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받았다는 말을 듣고 이슬람 선지자가 되었다. 와라카는 이비아니교 사제로 하니프(Hanif)로 묘사되는 강력한 일신교(一神敎) 사상을 가졌었다. 이에 무함마드는 오직 한 분인 ‘알라’만 알게 되었다. 그 후 16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그들 중 무함마드에게 유일한 아들 이브라힘(Ibrahim, 2살에 죽음)을 낳은 부인도 단성론 콥트족(Coptic) 마리야(Mariyah)로 기독교 영향을 받았다.
그의 공적 사역은 622년 헤지라(hegira)부터 632년 그의 사망 때까지의 10년간이 된다. 그가 네스토리안 총대주교 예슈얍 2세(Yeshuyab II, 628-643)와도 만나 계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또한 나지란(Najran, 북쪽 예멘)의 아랍 기독교인들과도 평화의 조약을 체결하여 종교적 권리를 보호해 주었다. 이런 무함마드 “선지자 언약”의 6개 복사본들이 시나이 산 밑 성 케더린 수도원에 보존되어있다.
무함마드는 이슬람의 정치적·종교적 계승을 그의 결혼에 의한 가까운 친족에게 넘겼다. 이에 첫 족장 칼리프(Caliph)는 무함마드의 동료이자 그의 부인 아시하(Asiha)의 아버지인 아부 바크르(Abu Bakr, 632-634)가 되면서 30년간의 족장 칼리프 시대(632-661)를 열었다.
두 번째 족장 칼리프 우마르(’Umar, 634-644)는 무함마드의 부인 하프사(Hafsa)의 아버지로 아랍 남쪽 예멘과 페르시아 국경 기독교 지역인 라크미드(Lakhmid)와 요르단 동쪽 가산니드(Ghassanid)를 점령하였다. 라크미드의 마지막 왕은 알눈만 3세(al-Numan III, 602년 사망)로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이었고 가산니드의 마지막 왕은 자발라(Jabala ibn-al-Ayham)로 단성론 기독교인이었다. 더구나 우마르는 636년에 베두인 아랍인들은 사산 페르시아와 비잔틴 로마제국를 패배시키고 예루살렘에 첫 이슬람 모스크를 세웠다. 644년에 네스토리안교회 본부가 있는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셀류키아 크테시폰을 취하였다. 그러나 우마르는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소수파 기독교와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였다. 세 번째 족장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딸들인 루카야(Ruqayya)와 움큘숨(Umm Kulthum)과 결혼한 우스만(’Uthman, 644-657)이다. 그는 코란의 편집을 명령했다. 그는 651년 페르시아 국왕 이즈드거드 3세(Yazdegerd III, 632-651)를 피살시키면서 사산왕조(226-651년)를 멸망시켰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족장 칼리프는 알리(’Ali, 656-661)로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Fatima)와 결혼하였다. 알리는 우스만의 우마야드(Umayyad) 가계와 대항하여 시민전쟁을 일으켰는데, 그로 인하여 자신은 시아파(Shi’ites)가 되었고 그 시아파 지도자는 칼리프가 아닌 이맘(Imam)이 감당하였다. 그리고 우마야드 가계는 순니파(Sunni)가 되었다. 시아파의 이맘과 순니파의 칼리프 둘 다 궁극적으로 코란과 전승(하디스, hadith)의 교훈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알리한테 승리한 순니파 우마야드 가계가 100년간의 우마야드 칼리프를 계승하게 되었다.
제1대 우마야드 칼리프는 무와위야(Mu’awiya I, 661-680)로 권력의 중심을 시리아에 두었다. 그는 기독교인 만수르(Mansur ibn-Sarjun)를 군사 통수권을 제외한 가장 높은 직인 재무장관에 임명하였다. 제5대 우마야드 칼리프 아브 알 말리크(Abd al Malik, 685-705)때에 만수르의 손자 다마스쿠스 요한(St. John of Damascus, 대략 675-749)이 칼리프의 서기관이 되었다. 요한은 이교도 이스마엘에 대한 소책자를 썼다.
제 8대 우마르 2세(’Umar II, 717-720)는 처음으로 기독교인들에게 토지세(Kharaj)에 추가하여 인두세(jizya)를 부과하였다. 비록 인두세로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지만,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제 10대 우마야드 칼리프 히삼(Hisham, 724-743)는 네스토리안 기독교 등 소수파에게도 관용정책을 펼쳤다. 이때 다마스쿠스 요한이 모든 관직을 내려 놓고 726년에 예루살렘 근처 마르 샤바(Mar Saba)의 수도원에 들어가서 서방의 성상 숭배를 정죄한 레오 3세(Leo III)와 콘스탄틴 5세(Constantine V)의 성상파괴에 대해 반대하였다. 또한 그 곳에서 그의 시대까지의 모든 헬라 신학과 학문을 종합한 ‘지식의 샘’(Fount of Knowledge)이라는 방대한 책을 저술하였다. 10세기에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유럽에 여러 헬라어와 라틴어 개정판이 나왔고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of Aquinas)의 ‘최고의 신학’(Summa Theologica)의 모델이 되었다.
칼리프 히삼은 732년 10월 초에 아랍 대사 반나밀을 당의 수도 장안에 보냈다. 이때에 네스토리안 본부의 대주교 아브라함과 주교 가브리엘이 동행하였다. 당 제7대 현종(712-756)은 가브리엘을 신임하여 외국 사신을 위한 통역관으로 세웠다. 또한 당시 주교 가브리엘과 시박사(市舶使) 주력립(周曆立)이 설계한 기기이교(奇器異巧)는 기계과학의 최고봉이었다. 이러한 외교관계로 인하여 셀류키아 크테시폰에 위치한 네스토리안 교회 본부로부터의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향한 선교도 활기를 띠었다.
이렇게 우마야드 세습 칼리프 시대(Umayyad, 661-750)에는 기독교 지역인 다마스쿠스(Damascus)를 정치와 생활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기독교에 대하여서는 관용을 베풀었다. 당시 무슬림의 맹습과 잔학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시리아의 세 기독교 단체인 페르시아 네스토리안과 멜키트파(Melkite, 비잔틴 정통), 단성론(안디옥의 야곱파)은 아랍 이슬람의 통치를 지지하였다. 그 이유는 페르시아 네스토리안은 페르시아 사산왕조의 조로아스터교의 지배보다 아랍의 무슬림이 더 관용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멜키트파 성직자는 비잔틴 제국의 과잉 간섭에서 해방되는 감격이 있었다. 단성론자들은 정통파에 의한 괴롭힘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야곱파(Jacobite)는 “독수리 둥지”라 불리는 유프라테스의 케네슈르(Kenneshre) 수도원이 중심지였다.
이곳 출신 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 두 사람은 에데사의 야곱(Jacob, 633-708)과 아랍의 주교 조오지(George, 686-724)로, 야곱 주교는 시리아어 구약성경 개정판과 시리아어 예식서를 발간하였고 조오지 주교는 시리아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Aristotle’s Organon)을 주석하였다. 안디옥 야곱파의 주교 미카엘(Mischael)은 ‘칼케돈 신조의 가혹한 강제보다는 이슬람군의 파괴가 견디기 쉬웠다’고 말하였고, 이집트의 단성론자들은 이슬람군을 보고 로마의 박해로부터 구원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분명한 것은 칼케돈 기독교파의 이단에 대한 냉혹함보다는 이슬람 이교도의 차가움이 구원으로 느껴질 정도였었다. 이와 같이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세운 후 30년의 족장 칼리프 시대와 100년의 우마야드 칼리프 왕조 때에 아랍과 시리아까지 점령하였지만, 그곳에 있는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정책을 썼고, 그로 인하여 많은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이 고위직 관리와 학문 · 학교 · 의료 · 상업 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후일에는 유럽에서 온 십자군을 통하여 아랍의 우수한 문화를 전수하는 계기가 되었다.

필자: 최하영 목사
/ hydavidcho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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