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나의 사랑하는 교회는 잠들었는가?”
오피니언유크시론

“나의 사랑하는 교회는 잠들었는가?”

[유크시론 200호]  이창배 발행인

200호 발행 기념 “이달을 여는 창”

앤드류 머레이의 “예수보혈의 능력” 책에 나오는 글에,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고 속이는 ‘사탄의 깊은 것’(계2:24)이라고 말하며, 이 싸움이 혈육과의 싸움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며 싸울 것을 명령한다. 이제 교회가 싸워야할 영적전쟁이다. 이 거룩한 싸움의 선봉에 서야한다. 깨어있어 기도할 때인데 그런데 큰일이다. 교회는 잠들었는가?…

요령 때문일까? 성급함 때문일까? 정말이지 뜻하지 않게 어이없는 실수를 범할 때마다 자책하듯이 그 원인을 돌아보게 된다. 사실은 컴퓨터 작업에 익숙해질수록 몸에 붙는 간편하고 편리한 카피습관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수일 전 예배순서를 짜고, 이를 토대로 주보를 만들고, ppt 작업을 늘 하던 대로 마쳤다. 한 번쯤 되살펴 보아야 하는데 그러기엔 괜히 번거롭다는 마음이 들었고, 틀림이 없이 작업을 마무리했다는 확신도 들었다. 왜냐하면, 책상에 놓인 메모판에 분명하게 찬송가 곡명과 장 번호를 필기해 놓았고, 그것을 반주자에게 카톡으로 보냈기에 이상이 없다고 믿은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어이 상실이다. 주보교정까지 보고, ppt 작업을 했는데, 똑같은 곡명과 장 번호가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예배할 때까지 모르고 그대로 지나쳤고 이미 예배는 시작됐다. 막상 순서가 다가와 찬송가를 펼칠 때야 그것을 알게 됐으니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아뿔싸! 늦고 만 것이다. 회중들에 양해를 구했지만,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 원인을 분석해 보았더니, 이런 실수를 또 반복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 이것도 은혜일까? 예전엔 적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차올라왔다. 이런 실수라니 하는 부끄러운 마음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사실, 설명은 길어도 답은 간단명료하다. 카피 다음에 할 작업을 순간적으로 아득하게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데 실수는 연속적이다. 이런 경우, 확신범이니 어쩌니 하는 범죄용어가 떠오른다. 자가 확신이 무서운 것은, 몇 번이고 컴퓨터 화면으로 이상이 있나 없나 검사해 보고, 프린트로 뽑아서 교정까지 완료했다.
그런데 정작 문제점은 발견도 못 했고, 아예 그럴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다. 그러니 이런 착각이 종종 일어났을 텐데 그것도 모르고 지나친 경우가 또 얼마나 있었을까? 머리에 찬바람이 휑하니 쓸어가는 느낌이다. 아니, 마치 둔기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하얗다. 그럴 때 문득 주님의 위로일까? 쓰다듬는 손길처럼 마음에 평온이 찾아들었다. 그래도 지금껏 사소한 에피소드로 끝나고 만 것이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니 정말로 은혜인 셈이다.

무주의 맹시와 주의력 착각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 하버드대 교수가 공동집필한 책 <보이지 않는 고릴라/ 2011/ 김영사>에 사람은 착각의 존재라는 사실을 여러 실험을 통해 입증했다. 그 가운데 고릴라 실험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로그램이 됐다. 그 내용을 압축해 보면 이렇다.
흰색 셔츠를 입은 4명과 검은색 셔츠를 입은 4명의 학생, 이렇게 두 팀을 나누어 같은 팀끼리 패스를 주고받게 했다. 이렇게 연출을 한 1분여의 짧은 동영상을 다른 학생들이 보도록 하고, 그 가운데 검은색 셔츠를 입은 팀은 무시하고, 오로지 흰색 셔츠를 입은 팀원들이 끝까지 몇 회의 패스를 주고받았는지를 정확하게 세어보도록 주문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이 짧은 영상을 보면, 흰색 셔츠를 입은 팀원들이 주고받는 패스의 숫자를 세는데 몰입한 학생들의 경우, 놀랍게도 이 영상에 등장하는 검은색 고릴라를 발견하지 못했다. 실험에 참여한 학생들 가운데 절반이 고릴라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 동영상을 천천히 되돌려보니, 중간 정도에서 검은 털로 뒤덮인 고릴라가 패스를 주고받는 검은색 셔츠 팀과 흰색 셔츠 팀의 한가운데에 등장해 카메라 앞에 다가와 자신의 가슴을 두 번 탕탕 치고는 유유히 퇴장해가는 장면이 있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학생들은 “이건 말도 안 돼!”라며 반응했다. 이름하여서 “무주의 맹시”(inattention blindness)라 부르고, 기대하지 못한 사물에 대한 주의력 부족이 빚어낸 인식의 오류라 하겠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발견은 바로 주의력 착각(illusion of attention)의 영향력이 인간사회의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해내는 성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렇다. 결론은 많은 사람이 다른 뭔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로 인한 선명한 경험을 얻을 수 있고, 주변의 세세한 정보까지 빠짐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게 된다. 그것이 착각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당장 관심을 쏟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곧, 생생한 시각적 경험 때문에 독특한 심리적 맹시현상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실험결과가 나온 것이다.

싸워야 할 영적 전쟁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가? 필자는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을 되새겨보면서, “나의 존재를 알아봐 달라” 하소연하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고 사라진 고릴라를 찾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스럽다. 의도되고, 연출되고, 조작된 미디어에서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 마치 바다에 빠진 바늘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을 텐데, 거기에 어떤 일방적인 주문을 곁들여 시선을 빼앗아 간다면 더더욱 그 실체적 진실을 알아차리기는 불가능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래서 미디어는 무섭다. 이것을 어떤 용도로 사용하느냐, 그 목적에 따라서는 자기의 생각 없이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대중들을 쉽게 홀려버릴 수 있기에 그렇다.
모르긴 해도 미디어를 생각 없이 보는 사람에게 “당신은 오로지 흰색 셔츠를 입은 팀원들이 끝까지 몇 회의 패스를 주고받았는지를 그것만 정확하게 세어보시오”라고 주문하는 식의 집단 최면을 거는 일이 없다고 보질 않는다. 담보할만한 공정성과 정직함이 사라진 미디어는 결국, 한쪽만 보도록 강요하거나, 사전 의도된 방향으로 집단적인 동조가 일어나도록 아주 치밀하게 조작된 것이라는 면에서 두말할 여지가 없다. 정신을 혼미케 해 보아야 할 것은 못 보고, 들어야 할 것은 못 듣게 하질 않는가?
두렵고 무서운 것은, 언론이 특정한 이념서클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다. 국민의 알권리를 제한하고, 일방적 여론조작을 통한 “무주의 맹시”를 치밀하게 기획하고 펼치는 일이다. 이러한 일이 사회에 만연된다면 이것이 치명적인 위험신호이다. 더 나가 이러한 일의 배후에는 반드시 영적인 세력이 존재한다.
앤드류 머레이의 “예수보혈의 능력” 책에 나오는 글에,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고 속이는 ‘사탄의 깊은 것’(계2:24)이라고 말하며, 이 싸움이 혈육과의 싸움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며 싸울 것을 명령한다. 이제 교회가 싸워야할 영적전쟁이다. 이 거룩한 싸움의 선봉에 서야한다. 깨어있어 기도할 때인데 그런데 큰일이다. 교회는 잠들었는가?

이달의 말씀 ㅣ 벧전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댓글 남기기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Previous Next
Close
Test Caption
Test Description goe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