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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역사기행오피니언

네스토리안 교회와 중국(당)의 경교(景敎)

[실크로드와 복음루트] 최하영 목사/ GMS 우크라이나선교사

(4회) 실크로드 천년 교회사

635년 네스토리안 대주교 아나본의 사절단이 530부의 경전을 가지고 와서 641년까지 이들을 번역하였다. 638년에 태종은 네스토리안 기독교를 공인된 종교로 반포하였고 파사사(波斯寺)라는 예배당을 지어 주었다. 그 후 태종의 아들 제3대 고종이 전국 10주에 경교 사원을 세웠다.

네스토리안 교회의 공식 언어는 시리아어이다. 그래서 6세기 네스토리안 총대주교 마르 아바 1세(540~552)에 의해서 시리아어 역본 신약성경 27권의 정경을 확정하였다. 그 동안 신약성경 27권 중 22권을 헬라어에서 시리아어로 번역한 페싯타 성경을 동방계통의 교회들(네스토리안파, 야곱파, 멜키트파, 마로니파)이 사용하여 왔었다. 그 후 7세기에 에데사 주교 야곱(633-708)이 시리아어 구약성경 개정판를 발간하면서 네스토리안은 시리아어 역본 성경책을 가질 수 있었다.

네스토리안 총대주교는 대주교단에서 선출하였다. 그 총대주교의 역할이 상당했다. 예수얍 2세(628-643) 총대주교는 페르시아 사산왕조와 비잔틴제국과의 오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리고 중국 당에 대주교 아나본의 사절단을 보내고 인도에 첫 주교구를 세웠다. 또한 아랍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이슬람 설립자 무함마드(571-632)와도 직접 만나 계약을 체결하였다.

디모데 1세(779-823) 총대주교도 보다 효율적인 복음 전파를 위한 전략으로 외방대주교구 제도를 세웠다. 이 외방대주교구는 장안과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대주교구의 대주교가 매 4년 마다 총대주교를 선출할 때나 종교회의에 참여할 의무는 없었다. 대신 총대주교의 동의 없이도 새주교 임직식을 할 수 있었다. 이는 선교지향적인 네스토리안 교단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네스토리안 교단의 첫 종교회의가 410년에 있는 후 시리아와 북방유목민, 중국, 인도까지 복음의 영역권에 둘 정도로 세계적인 교단이 되었다. 디모데 1세 총대주교 때까지 세워진 대주교구는 카스카르와 니시비스, 바스라, 아르벨라, 키르쿡, 메르브, 장안(636), 르와르다시르(650), 모술(651), 헤라트(7세기), 다마스커스(7세기), 홀완(754), 라이(778), 사르바지예흐, 달리안(780), 사마르칸트(781), 인도(800) 등 이다.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의 어머니는 이미 북방유목민에게 전해졌던 복음의 영향으로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이었다. 그 아들과 손자가 장안에서 당을 건국(618~907)하였다. 당 고조 이연은 투르크 몽골계 선비족 출신으로 둘째 아들 이세민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태종 이세민은 상당히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종교와 문화에 포용정책을 썼다. 그리고 동서투르키스탄(돌궐)을 점령하여 중국 역사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를 차지할 정도로 방대한 제국을 이루었다.

이런 때에 635년 네스토리안 대주교 아나본의 사절단이 장안에 올 수 있었다. 아나본은 530부의 경전을 가지고 와서 641년까지 이들을 번역하였다. 638년에 태종은 네스토리안 기독교를 공인된 종교로 반포하였고 파사사(波斯寺)라는 예배당을 지어 주었다. 그 후 태종의 아들 제3대 고종이 전국 10주에 경교 사원을 세웠다. 그리고 대주교 아나본을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라는 칭호를 하사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왕후였던 측천황후(聖曆年)가 혁명을 일으켜 통치할 때(690~705)에 불교를 우대하고 경교를 무시하였다.

다시 제6대 현종(712~756)이 경교를 우대하였다. 그래서 고력사를 시켜 앞의 다섯 황제(고종, 태종, 고종, 중종, 예종)의 초상화를 경교사원 벽에 걸게 하였다. 그리고 칙령을 내려 이 종교를 ‘커다란 태양처럼 빛나는 종교’란 뜻인 ‘경교’(景敎)라 하였다. 732년 10월 초에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안 본부인 셀류키아 크테시폰에서 대주교 아브라함(羅含)과 가브리엘(及烈)이 아랍 사신 반나밀과 함께 장안에 도착하였다. 이들을 통해 다시 경교가 부흥할 수 있었다. 가브리엘은 현종의 신임을 얻어 통역관으로 군사기계 설계자가 되었다.

757년 제 7대 숙종(肅宗, 757-762)은 안사의 난(755-763)을 진압하기 위해 위구르의 도움을 받았다. 이때에 위구르의 국교인 마니교가 들어왔다. 또한 이 안사의 난 진압을 위해 경교인 대장군 곽자의(郭子儀)와 그의 참모장 네스토리안 주교 이사(伊斯)의 공이 컸다.

781년 덕종 때(779~805)에 대진사 경교 사제 경정(Adam)이 약 150년 간의 경교의 전파와 그 발전에 대한 역사를 써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이하 경교비)에 새기게 하였다. 이에 비석의 높이는 277cm이고 폭은 100cm, 두께 30cm로, 상단에는 쌍용과 구름, 연꽃, 네스토리안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모두 32행 1,764자 이상의 한자와 70명이 넘는 경교 사제들과 당 태종 이세민의 이름이 한문과 함께 시리아어로 서기관 여수암이 새겨 넣었다.

이 경교비에 엘로힘 하나님을 ‘아라가’(阿羅訶), 메시아를 ‘미시가’(彌施訶)라 하였다. 이 경교비에 나타난 경교인의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다. ‘목탁을 쳐서 은혜의 소식을 떨쳤다’(擊木震仁惠之音), 그리고 ‘동쪽을 향해 예배를 드렸다’(東禮)고 한다. ‘수염을 기르는 이유는 이웃에게 행함을 나타내기 위함이다’(存鬚所以有外行), ‘하루 일곱 번 예배를 드렸고’(七時禮讚), ‘칠일에 한번 성찬식을 가졌다’(七日一薦). 그리고 이 경교비에 유교인 ‘주공 공자의 도덕은 쇠퇴하였고’(宗周德喪) 도교의 ‘노자의 가마는 서쪽하늘에 올라가 버렸다’(青駕西昇)는데, ‘경교의 바람만 동쪽으로부터 왔다’(景風東扇)고 하면서 유교와 도교는 쇠퇴하였으나 경교만 부흥하고 있다고 하였다.

한편, ‘로마제국(大秦國)은 경교가 아닌 종교는 믿지 않았다’(法非景不行)고 하였는데, 이는 중국의 경교가 네스토리안 기독교라기 보다 모든 기독교를 지칭했던 것 같다.

845년 제15대 무종(840~846)때 마니교를 국교로 하는 위구르가 멸망하자 당의 마니교가 탄압을 받았다. 그리고 제18대 희종(873~888)때에 당조의 붕괴를 초래한 황소의 난(875~884)이 일어나면서 그 배후를 외래종교(경교, 이슬람,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등)에 덮어씌워서 102만여명이 학살을 당하였다. 그때에 경교 대진사도 파괴되었다. 그래서 그 대진사에 있던 경교비도 땅에 묻히게 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17세기 명나라 희종 때에 예수회 선교사에 의해 발견되었다.

현재에는 시안비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아나본의 번역본들과 그 외 기독교 번역본들 다수가 1910~20년 사이 돈황석굴과 투르판에서 발굴되어 일본과 프랑스의 동양사학자 혹은 고고학발굴단에 의해 각자의 나라로 가져갔다.

한국의 통일신라 초기에 친당정책을 쓰면서 당의 문물을 수입하였다. 그리고 통일신라는 당에 많은 신라인 유학생을 보냈다. 또한 일본과 중국을 넘어 서역까지 해상무역을 확대하였다.

1956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 네스토리안 십자가 유형과 같은 돌 십자가와 2점의 십자문 장식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을 안은 마리아 소상도 발견하였다. 이는 7,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이 4점의 유물은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에 일찍이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좀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렇게 907년 국제적이며 개방적이었던 당제국이 멸망하면서 네스토리안 기독교(경교)도 쇠퇴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1. 당의 귀족적 관료적 문화로 민중에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2. 신자 중심이 아닌 사제 중심이었다. 3. 모든 직분자들은 외국인이었고 중국인은 없었다. 그래서 당조 이후 오대(907-960)·북송(960-1126) 때에는 중국의 사적(史籍)에서 더 이상 대진사 및 경교의 사제를 언급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4. 8세기 중반까지 해상무역은 페르시아 ‘파사인(波斯人)’이 주도하였으나 그 후 아랍 무슬림들인 ‘대식인(大食人)’이 해상무역을 주도하면서 중국 내 경교인의 인적 자원이 고갈되었다. 5. 중앙집권적 황제의 권력에 너무 의지하였다. 6. 외방대주교구 정책으로 인해 네스토리안 교회 본부와의 단절에 있다. 7. 유교사상과 중국문화의 국수주의로 경교에게 유리한 환경은 아니었다. 즉 종교적 신학적 선교적 정치적으로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복합적인 상황이었다. 8. 경교는 당시 타종교와 너무 타협적이었다. 9. 경교 서적 번역에 불교와 도교, 유교적인 요소가 너무 혼합되어 있었다. 10. 네스토리안 특유의 공동체와 수도원(학교와 신학교 등)이 없었다.

이와 같이 중국역사에 가장 찬란했던 문화에 기독교가 꽃을 피우지 못함으로 인해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문화권까지 기독교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때의 한자와 유교, 불교, 법체제 등이 동아시아에 준 영향이 오늘날까지 이르는데, 그때에 복음이 중국 토양에 뿌리를 내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지금 한반도와 중국의 기독교의 부흥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는 헛되지 않음을 고백하면서 다음은 이슬람 확장 속에서의 기독교 영향과 그들의 삶을 그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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