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세속에 찌든 교회여, “와 보라”
오피니언유크시론

세속에 찌든 교회여, “와 보라”

[유크시론 199호]  이창배 발행인

2018년 5월, 이달을 여는 창

오늘날 우리에게는 사실 너무 많은 것들이 주어진 것은 아닌가? 아니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도 족함이 없고, 여전히 탐욕의 미련을 끊어내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나와 당신, 이 세속에 찌든 교회에게 “와 보라!” 손짓한다. 보이는 핍박보다 보이지 않는 핍박에 무너져가는 세대여, 경성 하여라…

지난 4월, 로마에 있는 도미틸라 카타콤베(Catacombe di Domitilla)를 둘러보는 동안 머리를 꽉 채우는 한 가지의 의문이 줄기차게 따라붙었다. 곳곳에 보이는 작은 크기의 무덤 때문이다. 분명 누군가 말을 해 주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어린아이의 무덤이라는 것을 모를리는 없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을까, 그것이 의문이었다. 바깥세상에서의 박해는 대부분 어른들이 당하는 것이고, 그 주검 또한 어른일 텐데, 이 아이들의 무덤은 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안내를 맡아준 가이드의 설명에 귀가 반짝 열렸다. 이 카타콤베 안에서 출산한 여인들에게서 태어난 영아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생존환경으로 볼 때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열악하기 짝이 없는 이곳에서 어찌 갓 태어난 생명이 살아갈 수 있을까.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을 만큼 물도, 양식도, 공기도, 빛도 없는 암흑의 지하세계가 어떻게 영아의 생존환경이 되겠는가. 그것을 알면서도 왜 미련하게 참아냈을까? 차라리 바깥세상으로 뛰쳐나갈 수도 있었을텐데… 이대로 사생아가 되던지, 태어나 세상을 잠시 느꼈지만 금세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 자명했을 텐데… 마음이 저려왔다.
물론 오늘날 그런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온다는 것도 사실 확인은 어렵다. 그런데 왜 마음은 저며 오는지 모르겠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들어온 임신부들, 혹은 젊은 남녀가 사랑의 결과로 잉태를 하는 그 순간부터, 아니 뱃속에서 생명이 자란다는 것을 알고 난 그 순간부터 얼마나 큰 고통과 아픔을 겪어야 했을까? 바깥세상에서라면 임신했다는 그 사실로 온 가족이 기쁨으로 말미암아 흥겨워했을 터인데, 여기서 만은 그 기쁨마저 슬픔으로 바꿔야만 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나마 포기한 것이 결코 작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잉태된 아기를 위하여 엄마가 된 그날부터 할 수 있는 최대의 출산준비가 바로 아기가 묻힐 작은 무덤을 파내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게 부모로서, 아니 어미로서 아기에게 해 줄 최고의 선물이었다 한다.
사실 바위라 할 것도 아닌 푸석푸석한 응회암이라, 손가락 끝으로 긁어만 내어도 흙이 조금씩 파내어지기는 한다. 그렇다고 그 무덤을 완성하기까지 손가락으로만 작업을 했다면, 그 손가락이 온전했겠나? 한 줌 흙을 긁어낼 때마다 오는 마음의 아픔은 또 어떠했을까?

지하무덤과 지하교회 그리고 삶
세상에 우연은 없다. 로마를 다녀온 후 두 주만에 또 다른 세상에 있는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300K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파도키아 지대를 다녀왔다. 기암괴석의 동굴 교회와 거대한 지하 도시가 남아있는 카파도키아는 그야말로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자연세계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 줄만큼 신비롭기 짝이 없다.
외부에서 눈에 잘 띄지 않고, 로마의 카타콤베처럼 응회암이라 쉽게 깎이는 탓에 바위에 굴을 뚫고 들어가 살았던 흔적들이 곳곳에 그 규모가 대단했음을 알려준다. 교회 탄압 시기 때 피난처가 되어 이곳으로 와 거주지 이외에도 수많은 수도원과 교회들을 세웠고, 크고 작은 교회에는 신앙을 고백한 프레스코와 성화들이 눈에 띈다.
그런데 사실, 로마의 카타콤베에서 느꼈던 또 다른 경이로움은 데린쿠유의 지하도시를 둘러보면서이다. 최대 3만 명까지도 수용이 가능한 그 규모에 놀랍지만, 로마의 교회 탄압을 피해 쫓겨 온 성도들이 이곳에 정착하여 교육기관과 교회, 와인 저장고 등을 축조해 본격적으로 거대한 지하 도시 생활을 한 것이다. 박해를 피해 온 성도들이 늘어날수록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자 옆으로 혹은 지하로 계속 파 들어가 복잡한 미로를 형성해 가면서 지하 120m까지 내려갔다. 이렇게 만들어진 지하 도시가 12층 규모로 무려 1,200여 개의 방이 만들어졌다.
허리를 굽히고 땅 속으로 난 좁은 통로를 들어서자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지하 1층과 2층에는 식당을 비롯하여 부엌, 우물, 축사, 곡물 창고, 포도주 저장실 등을 갖추었고, 3, 4층에는 거주지와 교회, 신학교, 병기고 등 도시 기능을 갖춘 공동체의 모습이다. 어두운 동굴이지만, 그 안에서 예배를 끊이지 않았고, 신학교는 피난 생활 가운데에도 굴하지 않고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려고 했음에 마음이 저며온다. 카파토키아와는 달리 성화가 보이지 않지만, 더 아래층으로 지하 감옥 및 묘지가 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지하 도시로 옮겨 살다가 여기서 일생을 마쳤던 사람들의 무덤 앞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몰려왔다.

비주얼에 빠진 교회에 울리는 경종
늘 입에 담았던 찬송가 “순교자의 신앙 따라서”라는 노래가 입에 읊조려진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비롯해서 교회 역사에 끊임없이 크고 작은 핍박이 언제나 끊이질 않았고, 로마제국의 박해가 주후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종식될 때까지 신앙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성도의 분투는 얼마나 대단했던가!
그토록 무서운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켰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흘린 눈물과 피’였던가? 카파도키아 계곡을 벗어날 때, 마침 석양을 받아 계곡 일대가 붉게 물드는 장관을 보았다. 붉은 색조를 띈 계곡 바위 면에 석양을 받아 더욱 빨간색으로 빛나는 장관을 연출한다. 마치 계시와 같다. 신앙 선배들이 끝까지 붙잡았던 그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만이 소망인 것을 증거해 주는 듯 시선을 붙잡는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이런 산 소망을 알고 있었기에, 인간으로 감내하기 어렵던 그 고난과 박해의 심연에 빠져서도 한 발짝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초대교회의 성도들 앞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또 비참했던지… 토굴과 지하무덤에 들어가 살고, 햇빛도 없이, 물도 없이, 한 줌의 신선한 공기조차 사치일 수밖에 없는 지하도시에 살면서도 산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지 않았던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부러워지는 건 또 무언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사실 너무 많은 것들이 주어진 것은 아닌가? 아니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도 족함이 없고, 여전히 탐욕의 미련을 끊어내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나와 당신, 이 세속에 찌든 교회에게 “와 보라!” 손짓한다. 보이는 핍박보다 보이지 않는 핍박에 무너져가는 세대여, 경성 하여라.

이달의 말씀 ㅣ 고후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댓글 남기기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Previous Next
Close
Test Caption
Test Description goe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