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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깨어라, 일어나라

[유크시론 198호]  이창배 발행인

2018년 4월, 이달을 여는 창

곧, 부활의 아침을 맞이한다. 교회여, 깨어라. 일어나라. 미망에서 눈을 떠 한 송이 민들레꽃을 보라. 때가 무르익고, 시간이 이르면, 그 날은 오리라. 주님이 말씀하신 그 날이 속히 오리라. 마라나타.

오늘 아침에는 유독 눈 부신 햇살이 창문을 뚫고 어둡던 방구석 깊숙이 비쳐든다. 온통 방안이 환하다. 이렇게 밝은 방을 본 일이 언제 일이던가? 세상에 이렇게 밝은 것을 미처 왜 몰랐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래서인가, 그동안 깊이 침잠되어 방안에 가득했을 겨울의 음습한 기운까지 순식간에 몰아낸 듯싶다. 왠지 마음도 산뜻해 짐을 느낀다.
아파트 주변 뜰에 여기저기 한 무더기씩 땅을 뚫고 나와 저마다 하얗고, 노랗고, 보라색 꽃을 피운 봄꽃이 한창이다. 따스한 햇볕 또 따뜻한 바람이 부는 봄날이 성큼 다가왔다. 마음은 이제 너른 들판에 가 있다. 수년 전 이맘때 오스트리아를 지나 독일로 돌아오는 길에, 남독 알프스 지방의 너른 구릉 지대에서 마주친 노란색 민들레꽃으로 온통 뒤덮인 들판이 떠오른다. 끝이 보이질 않는 그 너른 구릉지대가 노란색 물결에 덮여서 바람결을 따라 일렁거리는 정말로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장관을 마주하고, 얼마나 가슴 벅찬 감동이 차올랐던지 모른다. 또 한 번 그곳을 가보고 싶다.
문득 그 생각이 떠오른다. 이제 화창한 봄날에는 어디든지 들판에 나가야겠다. 드넓은 초원에 널리듯 피어난 민들레꽃, 어디 한군데 고급스러움이라고는 그 모양새조차 없는 꽃이다. 너무 지천에 깔리다 보니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발에 밟히는 하찮은 꽃이 아닌가?
꽃은 꽃인데 예쁘고, 향기를 풍기는 화초 종목이 아니라 그냥 들풀이다. 틈만 있으면 아무 데나 여기저기 피어나고, 피었다가 져도 알아줄 리 없는 꽃이지만, 그러나 그 생명력은 참 모질 만큼 강하다. 하나의 생명력이 아닌 집단의 생존능력이랄까? 하나의 꽃이 지고 나면 꽃마다 솜사탕 같은 씨앗 주머니를 만들고, 행여 바람 부는 날이면, 그 씨앗들이 바람결에 흩어지며 두둥실 하늘로 떠올라 멀리 비행에 나선다. 얼마나 아름다운 산화인지 모른다.
그 씨앗들이 어디론지 날아가 떨어진 곳, 비록 척박한 땅, 비좁은 돌 틈새라 할지라도 거기에서 봄을 기다린다. 이듬해 봄철이 되면 여기저기 피어나는 모진 생명력과 번식능력을 보라. 온통 대지를 노란색 꽃의 물결로 덮어버리지 않는가?

민들레꽃과 복음
그렇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이와 같지 않을까? 세상으로 볼 때, 진실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가 민들레꽃과 같지 않을까 싶다. 어떠한 화려한 꽃이기보다는 내세울 이름조차 변변치 않은 민들레꽃처럼 하나님의 숨결을 따라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이다.
사도행전 7장에서 순교하는 스데반을 묵상하며, 그는 한 송이 민들레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순교로 생애를 마쳤지만, 그가 맺은 복음이라는 씨앗 주머니는 실로 엄청났다. 이어 사도행전 8장에서 더불어 불어닥친 박해의 바람은 세차게 불었다. 초대교회, 그 뭉쳐진 씨앗 주머니를 터뜨리고 남았다. 이 바람으로 교회가 사방으로 정처 없이 흩어지게 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마치 한 송이 민들레꽃이 맺은 씨앗 주머니가 바람에 터져 하늘로 흩뿌려지는 산화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엉겁결에 흩어지는 복음의 씨앗들이 하나님의 숨결인 성령의 바람을 타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퍼져나가지 않았던가?
이 복음의 역사는 너무 아름답다. 그렇게 퍼지고, 또 퍼지는 복음의 씨앗이 한 송이 민들레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거기에는 어떤 화려함도 없고, 잘난 명성도 없다. 또한, 그 운명을 거부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자라난 그 자리에서 밟히고, 뽑히고, 꺾이고, 베인다 할지라도 민들레꽃은 줄어들지 않는다. 모든 들풀은 모양새 없고, 향기 없지만, 그 생명력은 강하다.
복음이 그렇지 않은가? 여전히 주위를 보라. 한 알의 밀알이 그렇듯 한 송이 민들레꽃이 그렇다.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 하나가 밀의 새싹을 내게 하고, 그 밀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때 수십 배를 거두는 것처럼, 민들레꽃은 또 어떤가. 한 송이 꽃이 죽어 맺히는 씨앗 주머니는 역시 수십 배의 민들레를 품는다. 이렇듯 자연을 통해서도 놀라운 교훈을 얻는다. 온 천지가 배울 것이니 또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스데반 처럼 한 사람의 삶이 된 복음은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멈출 수 없었다. 하나님의 때와 시간에 이를 때, 예루살렘에서 큰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그 같은 삶, 곧,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또 다른 스데반으로 살아가게 된다. 오늘도 이 같은 디아스포라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복음이 삶이 된 한 사람
지난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온 세상이 떠들썩거리던 가운데 중앙일보는 “한국 교회는 예수를 섬기나, 아니면 돈을 섬기나”라는 머리기사로 손봉호(79, 고신대 석좌교수)를 인터뷰했다. 그 내용 중 눈여겨 살펴볼 대목이 있어 여기에 인용해 본다.
▶ 질문 : 지금 한국의 교회는 어떤가. 성경의 권위가 회복돼 있나? ▶ 응답 : 공식적인 고백으로는 그렇다. 한국 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종교개혁의 정신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실제는 다르다. 한국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실질적인 가치를 좇고 있다.
▶ 질문 : 실질적인 가치가 뭔가? ▶ 응답 : 한국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돈’이다. 교회가 돈을 너무 중요하게 여긴다. 물론 공식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상당수 교회가 그렇다. 성경은 돈에 대한 유혹을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 그 직접적인 원인이 뭔가. 결국, 돈이었다.
그러며 말꼬리를 덧붙인 손봉호 교수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기독교 역사를 보라. 예배당이 커지고, 교인 수가 늘어날 때면 어김없이 돈을 중요하게 여겼다. 지금 한국 교회가 그렇다.”
이 말이 사실인가? 물론 한국교회 전체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그러한 흐름을 이끄는 주도적 교회가 있고, 그것을 따라가는 교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크든지 적든지 돈은 교회의 가장 큰 필요악이다. 그리된 것이 어제오늘이 아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우리가 붙잡고 있는 복음은 분명한가? 이 복음을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을까?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2:15) 라고 했다.
곧, 부활의 아침을 맞이한다. 교회여, 깨어라. 일어나라. 미망에서 눈을 떠 한 송이 민들레꽃을 보라. 때가 무르익고, 시간이 이르면, 그 날은 오리라. 주님이 말씀하신 그 날이 속히 오리라. 마라나타.

이달의 말씀 ㅣ 고후2:14-15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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