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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마의 불신

[아트저널]  박심원목사/ 예드림커뮤니티교회 공동담임/ 28회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약 1502-1504년)…

→ 조반니 바티스타 치마 다 코넬리아노 작품

보고 믿는 것이 아닌 듣고 믿는 것…
부활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목격한 자들의 말을 듣고 믿는 것임을 강조하셨다.(요20:29) 그것은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신앙의 본질이기도 하다. .

인류의 조상인 아담에게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지식체계를 선물해 주셨다. 그 지식체계는 아담이 연구하여 얻어낸 것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는 지혜의 특권이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생명체들에 대한 이름을 지어줄 것을 사명으로 주셨다. 이름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은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음과 동시에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류가 있어야 만이 완수 할 수 있는 미션 그 자체였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규명이다. 그러나 아담에게는 어떠한 정보도 없었다. 과연 아담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기에 충분하기도 하다. 동물이 아담 앞을 지나갈 때 마다 아담은 수많은 질문을 하나님께 던져야만 했다. 이름을 지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동물의 형상과 이름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가히 아담은 인류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천재적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아담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완벽한 증거인 셈이다.
인류 문명사회는 그렇게 발전한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계략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완수할 수 있었던 다스림의 복이었다. 아담 뿐 아니라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도 같은 맥락이었다. 상식적으로 노아의 생각이나 상상 속에는 그렇게 어마어마한 배의 그림을 그려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아는 그렇게 거대한 배를 본적도, 배운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방주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배를 지으면서 그 배를 설계하신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기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거의 모두가 무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럴지라도 그들은 공식적인 학벌이 없을 뿐이지 대부분은 당시 세례요한의 설교를 듣고 이해할 만큼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임이 분명했다. 소위 무식하다고 정평이 난 수제자인 베드로의 초기 설교는 구약성경의 핵심을 재해석할 뿐 아니라 성경의 핵심을 꿰뚫어야 만이 설교해 낼 수 있는 에스라 이상의 대성경학자였다. 그의 설교를 듣고 3천명, 5천명이 세례를 받았다. 종교적이며 형식적인 세례 교인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드릴 만큼의 헌신된 제자들이었다. 그만큼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무식한 어부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다.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그들의 힘으로 성경을 깊이 있게 상고한 것에 대한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으로 나타난 역사라 할 수 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들의 생애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함이었다. 마가복음 9장에 예수님이 변화산에 오르실 때 특별하게 세 명의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셨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다. 제자들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예수님의 형상이 변화되어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 나누는 광경이었다. 베드로는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살자라는 제안을 하지만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막9:6) 변화산에서 내려오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활에 관하여 말씀하시면 다른 사람에게는 아직 부활에 관하여 말하지 말라 경고하셨다.(막9:9) 그러나 실상 제자들은 부활의 의미를 알지 못해 서로 질문하기도 했다.(막9:10) 그것은 제자들 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부활은 상징적이며 교훈적인 의미로만 이해되어져 왔다는 의미가 된다.
부활은 참 의미는 교훈이 아니라 죽음의 문을 통과한 후 다시 실존의 몸을 입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 땅을 딛고 살아간 사람 중에 아직 단 한 사람도 죽음을 통과한 후에 다시 그 죽음을 깨트리고 살아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간혹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은 있다지만 그들은 다시 죽어야 했다. 잠시 기절했다 깨어난 것이 아니라 죽음의 관문을 완전히 통과한 후에 다시 부활체를 입고 살아난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마치 아담이 동물의 이름을 지을 때나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어떤 모델을 보고 이름을 짓거나 방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류로 말미암은 것과 같이 부활에 관한 모델이 없기에 주님께서 직접 보여주셔야 만이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 역시 그러했다. 그의 상식이나 지식이 아닌 하늘의 모형을 보고 지은 것과 같은 것이다.(히8:5) 부활은 인간이 가진 지식체계 그 이상의 것으로서 주님이 몸소 보여 주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마침 그 자리에 도마가 있지 않았다. 부활하신 주님을 설명하는 동료 제자들에게 도마는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그것은 곧 인류가 가진 부활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즉, 예수님의 손과 발에 난 상흔과 옆구리에 난 창자국을 만져 봐야 그분이 실존하시는 주님임을 믿겠다는 것이었다.(요20:25) 이는 도마의 불신이 아니라 인간 이성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제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활에 관한 지식이었다.
그의 이런 고백으로 사람들은 도마에 대해 단정을 한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과 발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을 넣어 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상흔을 만지지 않고 바로 무릎을 꿇으며 예수가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요20:28) 주님은 도마의 고백을 들으시고 도마뿐 아니라 인류에게 말씀을 하셨다. 부활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목격한 자들의 말을 듣고 믿는 것임을 강조하셨다.(요20:29) 그것은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신앙의 본질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듣고 믿는 것이다. 인류가 걸어온 길은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 하는 과학이 증명해 낼 수 있는 현상만을 믿음으로 간주하려 한다. 그러나 참 믿음은 보는 것이라 들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롬10:17) 온전한 사람, 완벽한 사람에 의해 들려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온전함을 갖추지 못해서 그가 전하는 것이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를 통하여 인류가 해결할 수 없는 부활과 영생과 천국을 믿게 되는 것이다.(고전1:21) 16세기 초, 종교개혁이 불타오를 때 그려진 조반니의 성 도마의 불신은 단지 도마의 불신에 관한 고발이 아니라 인류가 가진 영원한 진리인 부활에 대한 초보적 지식을 벗어나지 못함을 입증하는 셈이다. 부활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듣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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