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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 목숨을 걸어야 할 때 “지금이다”

[유크시론 196호]  이창배 발행인

2018년 2월호 사설

이 세상은 채 1%가 모자라는 성급함이 넘치고 있다. 적당히 그 1%를 덮고, 뭉개고, 무시하고 섣불리 꽃을 피워대는, 그야말로 제철을 잃어버린 채 왜 피어야 할 줄도 모르고 피어난 추한 꽃들이 너무 많다. 거짓과 위선이 넘실거리는 무서운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이겨나갈 당신이라면, 1%에 승부를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99%의 피와 땀을 흘리는 온전한 노력은 당연하다. 그래야 교회가 이 세상에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1%에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지금이다.

가장 추운 겨울을 맞이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예년 수준의 겨울을 보내는 중이다. 단지 햇빛을 보기가 정말로 힘겹다 할 만큼 늘 우중충한 날씨로 비가 내리는 날이 연속이다. 동네를 걷다 보면 여기저기 울타리에 때 이른 개나리꽃이 피어난 것을 보는 게 드문 일이 아니다. 마당에는 봄의 전령이라는 노란색, 보라색 꽃대가 불쑥불쑥 땅을 뚫고, 꽃봉오리를 내밀거나 이미 피어난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아직은 제때가 아니다.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 푸르른 생기가 섣부른 듯, 주변의 삭막함 가운데 피어나는 꽃은 아름답지 못하다. 꽃은 제철에 피어야 아름답거늘.
우리는 잘 안다. 사실 아름다움이란 어울림이다. 독불장군으로 혼자만 아름다울 순 없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조화의 힘이다. 그 조화를 이루어 주는 하나 됨이 결국 아름다움이다. 곧, 전체의 각 부분 부분이 어긋나지 않고 잘 어울려 하나를 이루는 것이 곧 조화인데, 그런데 그 어울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배경이다.
함석헌 선생은 “누군가 말해야 한다”라는 글에서 아름다움은 배경이 결정한다고 말했다. 꽃병을 책상머리에 놓으면 아름다워 보이지만, 들 가운데 내다 놓으면 보기가 싫고, 반대로 초초한 들국화 한 대를 병에 꽂아 놓아서는 그리 고운 줄을 모르겠으되, 그것을 온 세상이 다 찬 서리의 습격을 받아 눈에 뵈는 것이 오직 씁쓸한 것뿐일 때, 흐트러진 풀 속, 꾸부린 소나무, 혹은 찡그린 바위틈에 그 청초한 한 송이가 외로이 서는 것을 보면 말로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때 다알리아, 모란 같은 것을 단으로 묶어 준단들 어찌 바꾸겠나? 그러고 보면 들국화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그 배경에 있다고 했다.
가까이 들여다보노라면 사실 개나리꽃, 들풀꽃 하나, 하나는 모두 예쁘다. 어찌 그리 만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곱고, 기가 막히게 정교하게 짜놓은 비단처럼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함을 갖춘 창조물이다. 사람의 손으로 그리 만들 수 있을까. 조화의 기술이 그 아무리 뛰어난들 정말로 그럴 수 없다. 그렇게 속살이 입혀지고, 채색되어진 알록달록 꽃들이 제때를 만나지 못하고, 그 아름다움을 받쳐줄 배경을 못 만난 것이고 보니 어쩌랴. 하지만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세월이 하 수상한 탓이 아닌가. 움츠러들어야 할 만큼 추워야 할 이 날씨가 이상스럽게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으니, 요 때쯤이야 하고 지레짐작해 꽃을 틔운 것이 뭔 잘못이 있겠는가. 그저 딱할 따름이다.

겨울철 꽃은 겨울철에 핀다.
예전에는 제철을 앞당겨 미리 핀 꽃을 보는 즐거움이 꽤 컸다. 늘 내 마음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뭐든지 서둘러 해내고 싶은 마음, 다른 경쟁상대보다 앞서서 결과물을 내놓고 싶은 마음, 그런 내 마음을 대변해 주듯 먼저 핀 꽃이 보기가 좋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지금 깨닫는 것이 있다. 그것은 늘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다는 자책이다. 어우러짐의 미학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 다급함과 나만을 주장하던 옹졸함이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것이나 아닐지? 때늦은 후회도 없지 않다.
그러고 보면 자연은 생명의 거울이다. 더 깊이 들여다보노라면 생명의 스펙트럼이 보인다. 이 자연의 웅대함을 보기 위해 저 멀리 아메리카의 요세미티를 찾지 않아도, 자이언트 협곡의 그 형형색색 경이로운 대자연의 규모를 둘러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우리는 우리 주변의 가까이에서도 자연에 담긴 생명의 참모습을 대할 수 있다. 그렇잖은가?
겨울철 꽃은 겨울철에 핀다. 눈이 수북이 덮여도 그 눈을 뚫고 영롱한 꽃망울을 터뜨리는 겨울꽃, 튼실한 꽃대와 솜털로 수북한 작고 도톰한 잎이 역시 겨울꽃답지 않은가? 한겨울의 칼날 같은 바람이 살을 가르듯 지날지라도 의연한 자태가 도도하리만큼 굳세다. 지난가을 온갖 활엽수에서 떨군 낙엽 더미와 바짝 말라버린 채 헝클어져 누워버린 풀잎 틈새에 뭔 생명력이 있을까 고개를 젓고 말 그 황량함 속에서 어여삐 소박한 꽃을 피워내는 이 작은 꽃들이야말로 아름답지 않은가? 겨울이란 때에 이에 걸맞은 어울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이 어울림을 위한 어떤 인공적인 가꿈이 왜 필요하겠는가?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거늘.

1% 영감이 없다면…
이른 아침, 새벽기도를 위해 일어나 덜 깬 잠을 쫓으며,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인다. 따끈하게 덥힌 물을 한잔 들이마시는 기분이 몹시 상쾌하다. 몸도 한결 가뿐해지는 느낌이다. 그러며 잠시 생각을 해보니, 그 1%의 중요성이 떠오른다. 물을 덥히는 온도가 아무리 99%인 섭씨 99도에 이르렀어도 나머지 1%인 섭씨 1도가 모자란다면 그렇게 펄펄 끓을 수 있을까? 과학적인 해석으로는 완전한 섭씨 100도에 이르러야 물은 끓는다. 변할 수 없는 정설이다.
일찍이 에디슨이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런데 사실 에디슨이 하고자 했던 말은 “99%의 노력이 있어도 1% 영감이 없다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의미였다고 하지만, 뭐 딱히 어느 말이 맞고, 안 맞는다고 하기에는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99%의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실 남은 1%라는 것에는 두말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기도를 해 본 이들이라면, 아니 늘 기도를 하고 사는 이들에게는 영감이라는 단어가 거저 떠올려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영감(靈感, inspiration)은 영어에서 “to inspire”는 “안으로(in-) 생기를 불어넣는다(-spire)”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니” 흙으로 만든 사람이 생명체인 생령이 되었다는 창세기, 아담을 창조하시는 장면이 연상되는 단어가 아닌가. 여기서 숨인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즉 영감을 주시는 하나님과 영감을 받는 존재 사이에 이뤄지는 번뜩이는 교감을 떠올리게 된다. 전능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물인 사람이 받는 수혜가 곧, 영감이다. 그러니 늘 하늘을 우러러 머리를 들고 사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 아닌가? 그 고마움과 감사를 잊어서는 안 될 빚진 자의 자각만큼 자기 자신을 설정하는 기준점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다. 이 세상은 채 1%가 모자라는 성급함이 넘치고 있다. 적당히 그 1%를 덮고, 뭉개고, 무시하고 섣불리 꽃을 피워대는, 그야말로 제철을 잃어버린 채 왜 피어야 할 줄도 모르고 피어난 추한 꽃들이 너무 많다. 거짓과 위선이 넘실거리는 무서운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이겨나갈 당신이라면, 1%에 승부를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99%의 피와 땀을 흘리는 온전한 노력은 당연하다. 그래야 교회가 이 세상에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1%에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지금이다.

이달의 말씀 ㅣ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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