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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름과 값없는 선물 – 나기호 목사

[이달의메시지] 나기호 목사/ 부퍼탈한인교회, 유기총 대표회장

“물을 좀 달라”… 요 4:9-18

2018년 새 해를 맞습니다. 생수의 강(성령)으로 흐르게 하시는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유럽 모든 교회에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건지는 복음이 있을지라도, 그 복음을 전하기 전에, 내게 없는 귀중한 어떤 점을 상대방이 갖고 있으며, 그 도움을 내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교회는, 또한 우리 개개인은 지금보다도 더 감사와 찬양으로 넘칠 것입니다. 약하고 아쉬운 자의 불쌍한 요구 앞에는 완악한 자의 마음도 열리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요한계시록 21:6)
이 말씀은 독일교회 2018년 새해요절( Jahreslosung ) 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수가 성 여인과, 요한복음 7장의 초막절 사건을 연상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과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같은 흐름 속에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다고 생각하며, 특히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 성의 여인 사건을 통해 금년 요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상의 마지막에 이루어질 일은 이미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을 통해 선포되었고 그 여인의 변화와 그 삶 속에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마을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초대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기록에는 예배와 전도에 대해 그리고 전도자의 마지막 모습 등,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중요한 부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를 주님이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생명수 샘물을 주고자 하시는 주님은 ‘물을 좀 달라’는 요청으로 그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1. 물을 좀 달라
예수님의 영향력이 일시에 세례자 요한의 영향력을 앞질렀습니다(1:1-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의 대결을 피하기 위하여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로 가면서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셨습니다(3-4). 사마리아는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지름길이었지만, 유대인들이 가급적 통과하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이 길목에서 주님은 한 여인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 사마리아에 복음의 씨를 뿌리십니다.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중간 길목에서도 또 다른 일들이 있는 법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 일이 더 중요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요. 너무 현재의 목표에만 매달리지 말고, 소중한 삶의 의미와 내용들을 살필 시간과 여유를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용히 가족이나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며,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도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런 여유 속에서 주님은 인종적 편견, 종교적 독선을 친히 허물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 도착하시어, 여행의 피곤함과 목마름에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마을로 갔고, 마침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우물로 왔습니다. 이 여인에게 비친 예수님은 피곤에 지친 한 유대 청년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나누어 주셔야 할 생수가 있었지만) 주님은 자신에게는 없어도, 이 여인에게는 있는 우물물로부터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7). 우리에게 생명을 건지는 복음이 있을지라도, 그 복음을 전하기 전에, 내게 없는 귀중한 어떤 점을 상대방이 갖고 있으며, 그 도움을 내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교회는, 또한 우리 개개인은 지금보다도 더 감사와 찬양으로 넘칠 것입니다. 약하고 아쉬운 자의 불쌍한 요구 앞에는 완악한 자의 마음도 열리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피곤하고 목마른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통하여 오히려 다른 이의 마음을 여는 주님의 열린 마음에서 나의 감추어진 교만이 드러납니다. 바로 이 자세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태 11:29)”는 말씀 속에도 엿보입니다. 교회의 세속화는, < 무엇인가 더 가진 자가 지배하는 세상의 정신>이 교회 안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 필연적으로 일어납니다. 더 가진 줄로 생각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기 위해 먼저 목말라 하시며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모습에서 주님의 고난을 기억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이사야 53:5) ”.

2. 옳도다!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보는 눈은 점차 달라지고 있습니다. 유대 청년(9)→주(主, 11)→야곱 같은 족장(12)으로 진전이 됩니다. 그럼에도 주님과 이 여인과의 대화는 좀처럼 영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생수(生水)를 마치 신비적, 마술적 약수 정도로, 이 여인이 이해하는 단계에서는 영적인 대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도, 우리가 말하고 싶은 주제가 있는데 상대방과의 대화가 겉돌면 어떤 방향전환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주님은 예수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질문은 이 여인의 삶이 드러나야 하는 핵심문제였습니다. 이 여인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부끄러움과 죄가 모두 얽혀있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간단히 대답해 버립니다. 여인의 이 말에 대해 여러 해석들이 가능하겠지만, 저로서는 이 여인이 빨리 이 주제를 피하고 싶었기에 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이 여인은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주님의 이 대답을 여러 방향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이 말씀이 이 여인에게 가장 충격적이었기에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 라는 고백이 나오고 뒤이어 대화내용이 ‘예배’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주님께서 이 여인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는 짧은 대답으로부터, <옳은 부분, 참된 부분>을 찾아 인정하며 세움으로 마음을 여셨다고 이해하고 싶습니다. 죄와 악을 지적하며 정죄함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인정할 부분을 기꺼이 수용하며 대화를 풀어가는 주님에게서 사랑의 속성을 발견합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너는 남편이 다섯 씩이나 있었고, 지금도 동거 중인 남자가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라고 말씀하셨다면, 대화가 어떻게 이어졌을까요? 상대방을 완전히 코너로 몰아 박살을 내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인정할 부분을 수용하며 대화를 하고 끝내 마음을 열도록 한다면, 오히려 한 사람을 얻게 되지 않겠습니까? 결국 주님은 그의 대답 속에서 이 여인의 지난 날 삶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그 사실보다도 더 중요한 말은 “옳도다. 네 말이 참되도다” 입니다. 결코 이 여인이 사실을 말하기 위해 남편이 없다는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여인은 이 주제를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습니다. 다 아시면서도 우리 스스로 결단하도록 여러 방법으로 도우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마음 문을 여는 주체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요한계시록 3:20-21 )

죄에 대한 회개 없이, 교회는 서로 부담 없는 사람들이 모여 교제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 죄인임을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죄인을 부르십니다(마가 2:17,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십니다. 사랑과 인내로, 강압적으로가 아니라 우리가 집 안에서 스스로 문을 열도록, 잠겨져 있는 문들 두드리십니다. “내게 물을 좀 달라”, “옳도다,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돌아서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 주변에서(교회나 거리 혹은 가정), 우리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서성거리는 사람의 모습을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모른 척하며 지나치거나 오히려 매몰차게 거절하지는 않는지요? 문을 열고 주님과의 교제를 나누면, 우리와 주님 그리고 이웃 모두가 승리합니다.

3. 값없는 선물, 생명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마리아 여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이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물동이를 버려 두었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채워 주는 야곱의 물에 관심이 없어진 것을, 동네로 달려갔다는 말은 삶의 권태와 무기력에서 벗어나 기쁨과 의욕이 넘치게 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삶의 목적 없이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살던 여인에게 삶의 의욕이 생기고, 해야 할 사명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변화의 첫 모습이 ‘전도’로 나타났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라도,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은 남편이 아닌 한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여인이 있다면 이런 표현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여인은 깊은 자의식과 열등감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여 살았고, 죄의식으로 인해 소외되고 사람들의 멸시를 당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자기를 멸시하고 천대하던 동네 사람들이고, 여인 역시 애써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자신을 합리화하고 살았을 분위기에서, 이 여인은 바로 그 동네 사람들에게 달려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것을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이 여인은 더 이상 수치스러운 과거에 얽매여 슬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나니 자의식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마음 속 깊이 파고들던 원망하는 마음, 절망적인 생각들이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수치스런 과거를 드러내어 말하고, 자기를 변화시켜 주신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이심을 담대히 전파하며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님께로 ‘와 보라’고 초청했습니다. 동네로 달려가는 사마리아 여인이나, 이 여인의 모습을 지켜보시는 예수님 모두 기쁨에 충만하셨습니다. 이미 이 여인의 마음에는 값없이 주어진 생명수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에서, 외적으로는 가장 예배자로서의 모습이 갖추어지지 않은 여인의 마음을 여시어 예배자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과 긴 시간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예배자 됨은 우리의 지식과 경험, 신분과 소유, 외모와 교양에 달리지 않습니다. 전통, 의식, 장소, 사람의 숫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한 여인과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그 예배를 통해 자신을 그리스도로 선포하셨고 그녀를 사마리아 수가 성의 전도인으로 변화시켜 파송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여인이 수가 성의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에 인도했지만 이 여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다만 그리스도만 남아있다는 점입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42). 이 여인은 수가 성의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에 인도했지만 이 여인의 모습은 사라지고 다만 그리스도만 남아있습니다. 이제 이 여인은 사마리아인들의 변화를 위해 자리를 피해주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전도란 피해야 할 때 계속 머무르려 하기 때문에, 주님이 행하시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전도한 사람이 주님과 교제를 나누도록 해야 하는데 내가 그 사람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도자를 통하여 주님이 나타나야 하는데 계속 주님이 하시려는 일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으려 하는 사람들의 성장을 오히려 전도자가 방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여인이 동네 사람들로부터 마지막에 들은 이 말은 이 여인뿐 아니라 읽는 우리들의 마음도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예배와 전도는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아픔과 슬픔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의 예배와 전도 현장에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 7:37-39).

2018년 새 해를 맞습니다. 늘 그런 것처럼 새 해에도 목마름으로 힘든 날들이 있겠지요. 그러나 약속하신 선물을 반드시 보내시며 성경말씀을 이루어가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세상 끝날까지 이루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들의 욕심으로 가득 찬 배(빌립보서 3:19)를 생수의 강(성령)으로 흐르게 하시는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유럽 모든 교회에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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