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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바로 알자, 진리에 굳게 서자

[유크시론 195호]  이창배 발행인

2018년 신년사설

새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이고, 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어떤 누구에게 줄 비교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던가? 오직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이 말씀이 그 대답이 아닌가? 그런데 왜 외양에 목을 매는가?
진리를 바로 알자. 이 진리에 굳세게 서야 한다. 먼저 나로부터 도전해야 할 목표를 새롭게 해보자. 이 땅의 교회들이여.

오늘도 변함없이 태양은 희뿌연 아침 공기를 가르며 동산 위로 떠 오른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의 태양으로 뿌옇게 보이는 산등성이 위로 붉은빛을 발하며 얼굴을 드러낸다.
새해, 정초, 1월 초하루의 태양도 그렇게 떠올랐다. 어제 떠올랐던 태양이 바뀐 것도 아니다. 같은 태양, 같은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그 궤적을 그리며 하루가 시작된다. 아니, 우리에겐 새해가 시작된 것이다. 2018년이라는 이름으로.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태양이 있는 한 절망하지 말라”는 글을 남겼다.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 태양이 저녁이 되면 석양이 물든 지평선으로 지지만, 아침이 되면 다시 떠오른다. 태양은 결코 이 세상을 어둠이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태양은 밝음을 주고 생명을 주고 따스함을 준다. 태양이 있는 한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 희망이 곧 태양이다.』
그는 비록 허무주의에 밀려 말년의 행복을 누리지 못한 채 비극적으로 생을 마치고 말았지만 적어도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무척 생애에 대한 애착을 두려 노력했었던 것을 보여준 것은 아닐까 싶다. 태양은 결코 이 세상을 어둠이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아마도 그에게 어둠은 허무주의였을 것이다. 고로 다시 어김없이 동트는 새벽이 힘차게 떠오르는 태양을 볼 때마다 희망을 찾았고, 이 태양이 있는 한 절망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나 보다.
하지만 사실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돌아가는 것이다. 어김없이 하루 24시간을 주기로 회전을 하는 지구에 사는 우리가 언제나 그곳에 있는 태양을 바라본다. 그렇게 우리는 지구라는 별에 몸을 싣고 하루를 돌고, 한 달을 돌고, 또 일 년을 돌고, 일평생을 돌고 있다. 한 바퀴 돌아서 원점에 도달했다가 다시 또 돌아간다. 그렇다고 자꾸 멀리 떨어져 가는 게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가만히 있어도 그 자리를 비켜서지 않고 돌아서 제 자리로 오니까 말이다.
어제 지나간 궂고 험한 일상으로 인해 마음 저미는 상처가 깊었다 해도 오늘은 다시 밝은 태양을 만나게 된다. 깊고 어두운 밤이 계속되지는 않는다.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을 것 같지만, 불가사의한 속도로 회전해 그 그림자도 볼 수 없지만, 새로운 날은 어김없이 찾아들고, 다시 시작되는 법이다. 그러니 일어서자. 힘을 내자. 지금은 또 기회이다.

크리에이터(Creator)와 진흙 덩어리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1). 이 구절은 구약성경 이사야 29:16, 45:9절에서 인용됐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18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토기장이 손에 놓여있는 질그릇으로 비유했다. 예레미야, 이사야, 바울 모두 토기장이 비유에서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결정 짖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말하고자 했다. 이는 결국 개인의 운명도 결부가 된다.
필자도 학창시절 한때 도자기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점토 흙 한 덩어리 반죽해 물레 위에 올려놓고, 회전시켜가면서 여러 그릇의 형태를 빚어내는 작업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만들다가 마음에 조금이라도 들지 않으면, 미안한 생각도 없이 사정없이 뭉개어 다시 반죽해 물레에 올려 그릇을 만들기를 수없이 반복하기도 했다. 비교적 모양이 잘 나온 그릇은 구별해 말리고, 그 위에 문양을 조각하거나, 채색하고, 귀 위에 유약을 발라 가마에 넣어 적당한 온도와 조건을 갖춰 굽고 나면, 여러 종류의 빛깔이 좋은 도자기가 완성된다.
물론 대부분 공예작품이라서 실제 생활에 사용하는 그릇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용도는 제법 구별을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마음에 안 드는 그릇은 아깝긴 해도 사정없이 깨뜨려 버리곤 했다. 이게 그릇을 만드는 자의 특권이자 주권이었다. 그걸 누가 나무랄 수 있었던가? 만일 점토 흙이 기껏 만들어놓고 왜 버리느냐고 작업자에게 따질 수 있을까?
마찬가지이다. 진흙과 토기장이의 비유에서 사람이 토기장이의 손에 숙명적으로 묶여 있는 진흙이라는 말에 기분이 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비유는 사람의 운명이 진흙처럼 보잘것없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예술가, 곧 창조주이신 크리에이터(Creator)이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손에 잡히면 진흙도 예술품이 된다. 그 재료는 보잘 것 없는 흙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예술가의 손에 들리면 놀라운 작품이 되질 않던가? 결국, 하나님이 토기장이라는 성경의 비유는 인격 비하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붙잡힌 존재에게 보내는 소망의 메시지이다.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버려야 할 깨진 조각?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대표적 시대적 언어를 찾으라면 아마 흙수저론이 아닐까 싶다. 타고난 숙명처럼, 쉽게 벗겨낼 수 없기에, 가혹한 현실에 대한 절망감의 표출이자, 반항의 아이콘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철학자 F. 베이컨은 비교가 없는 곳에 질투가 없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자못 비교의 숲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싶다.
웬 비교의식이 그리도 많은지 신앙생활도 그렇다. 큰 교회, 작은 교회, 유명한 교회, 골목교회, 도시교회, 시골교회, 전통교회, 개척교회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교우위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치열한 시기와 질투의 싸움이 전개된다. 이 암담한 현실을 어찌할꼬? 근심과 염려가 앞선다.
앞에서와 비슷한 배경 이야기이지만, 이사야 45장 9-10절에 질그릇 조각 이야기는 사람을 온전한 질그릇이 아닌 질그릇의 한 조각으로 설정해 그 조각이 자기를 만든 토기장이에게 항의한다. “아비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났느냐 어미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낳으려고 구로하느냐” 이 말씀은 “나를 왜 이따위로 만들었느냐, 저는 금권과 권력의 상징이 아니냐, 그런데 나는 왜 깨진 조각이냐?” 항의한다. “나의 이 초라함은 대체 뭐냐?” 고 부모에게 따진다. 왜, 왜, 왜…? 한다면, 그에게 화(禍) 곧 재앙이 있다고 하는 말씀이다.
새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이고, 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어떤 누구에게 줄 비교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던가? 오직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이 말씀이 그 대답이 아닌가? 그런데 왜 외양에 목을 매는가?
진리를 바로 알자. 이 진리에 굳세게 서야 한다. 먼저 나로부터 도전해야 할 목표를 새롭게 해보자. 이 땅의 교회들이여.

이달의 말씀 ㅣ 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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