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시사칼럼 >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칼뱅
시사칼럼오피니언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칼뱅

[프랑스포커싱]  채희석 목사/ 프랑스 침례교 목사/ 26회

1538-1541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칼뱅

그 당시 스트라스부르그의 시장은 쟉크 스튄(Jacques Sturn, 1489-1553 )이었다. 그는 정치적 리더십뿐만 아니라 “종교는 개인적인 일로서 오직 복음을 들음으로써 믿음이 나며 신앙생활을 하게 만든다”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1533년 스트라스부르그 개신교 첫 교회회의(synode) 회장이 된다. 거의 30년간 그는 개신교가 스트라스부르는 종교가 되도록 수호자 역할을 했다.

 

▶ 칼뱅 당시의 스트라스부르그

<자유 도시> 스트라스부르그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요람과 같은 곳이었다. <자유>란 주민이 원하면 어떤 자도 자유롭게 받아줄 수 있는 소위 <Freier Zug> 특권을 의미한다. 알사스 지방의 이 도시는 그 당시 신성로마제국에서 경제 중심지요, 지성과 문화의 도시였다. 새로운 인문주의 사상이 유입되어 유럽에서 가장 화려하게 발전된 곳이었다. 이곳 주교였던 마튀 젤(Matthieu Zell, 1477-1548)은 이미 1521년부터 루터의 개혁 사상이 담긴 설교를 통해 작은 영적 혁명의 불씨를 지피고 있었다. 그는 곧 이어 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를 초청한다. 도미니크 수도회에 소속되었지만, 1518년부터 루터를 만나 종교개혁을 확신했던 부처는 그의 해박한 성서해석에 힘있어, 빠른 시일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개혁의 선봉장이 된다. 이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성서로 돌아가며,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중시 여겼다. 이를 통해 스트라스부르그 교회가 말씀 위에 세워지고, 개신교 예배가 교회마다 드리게 된다. 결국 1529년 전통적인 천주교를 배척하고 개신교를 공식적을 수용한 후, 초기 종교개혁의 유럽 중심지로 굳게 자리잡게 된다.

그 당시 스트라스부르그의 시장은 쟉크 스튄(Jacques Sturn, 1489-1553)이었다. 그는 정치적 리더십뿐만 아니라 “종교는 개인적인 일로서 오직 복음을 들음으로써 믿음이 나며 신앙생활을 하게 만든다”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1533년 스트라스부르그 개신교 첫 교회회의(synode) 회장이 된다. 거의 30년간 그는 개신교가 스트라스부르는 종교가 되도록 수호자 역할을 했고, 특히 1538년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의 원조가 되는 최고 학교(Haute Ecole)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처럼 종교개혁을 통한 신앙과 양심의 자유 물결은 정적으로 남아있지 않고, 역동적으로 역사하여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개신교 신앙과 사회변화를 이끌어 낸다. 먼저, 개혁 신앙으로 인해 핍박 받았던 많은 유럽인들이 이곳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칼뱅을 위시한 초기 프랑스 개혁신도들이 이 자유도시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개신교 차원에서 새로운 예배 양식, 교회 치리, 말씀사역, 자선사역이 전개가 된다. 또 교육의 혜택이 여성을 포함하여 모든 시민에게 주어지게 된다. 짐나지움 (Gymnase)라고 불리우는 대학교의 학장 쟝 스튄(Jean Sturn)는 이런 교육이 획기적으로 보급하도록 주된 기여를 한다. 이 가운데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근본적으로 변화를 맞이한다. 사회사업 등 공공분야에서 비중이 높아질 뿐만이 아니라, 개신교로 회심한 종교인들과 결혼을 하였다. 개혁신앙을 받아드린 주교 마튀 젤과 결혼한 카트린 슈츠(Catherine Schütz) 대표적인 경우이다.

비록 칼뱅 시대 인물은 아니지만,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 정신은 그 후대에게도 영향을 주어, 쟝 프레데릭 오베르렝(Jean Frédéric Oberlin, 1740-1826)은 최초의 유치원 제도를 고안하여 운영했고, 쟝 로랑 브레시그(Jean Laurent Blessig,1747-1816)은 영국의 구세군(1878)보다 거의 일세기 앞서 <무료 급식소>(soupe populaire)를 세웠으며, 신학자이자 음악가 선교사 목사였던 알베르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노벨 평화상을 수여 받기도 한다.

▶ 칼뱅이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문 이유
칼뱅에게 있어서 이 알사스 도시는, 마음 속이든, 실제 여행을 하든, 가깝게 생각하며 왕래를 하고자 했던 곳이다. 특히, 그 당시 종교개혁에 헌신한 여러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칼뱅도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이 도시에 애착을 가졌을 것이다. 1534-145년 겨울에 칼뱅을 이미 스트라스부르그를 거처 스위스 바젤(Bâle)에 당도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1536년 봄에 다시 한번 이 자유도시를 방문하여 조용히 학문에 전념하고 싶어했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그곳으로 가는 길목이 막혔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하루 정도 쉬고 우회하여 가고자 했다. 제네바 개혁을 위한 화렐의 강권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그는 스트라스부르그에 가서 장기간 머물렀을 것이다. 1538년, 제네바에서 사역이 미 완성된 상태에서 추방된 후, 칼뱅은 바젤에 머무르고자 했다. 하지만 곧 그 계획을 철회하고, 스트라스부르그로 향했다. 자유도시 개혁자 마틴 부처의 초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종교핍박으로 피해 온 프랑스 난민들을 위한 목회사역을 부탁 받았고, 또 쟝 스튄으로부터 새롭게 만들어진 <최고 학교>의 신약 교수로 초청을 받은 것이다.

칼뱅에게 있어서 3년간의 스트라스부르그 체류는 그의 사역과 인생에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다. 부처와 동역하면서, 제네바 초기 사역에서 경험이 부족했던 목회, 교리문답, 예배식 관련 사역에서 경험과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다양한 경향의 기독교 유럽모임(Haguenau, Worms, Ratisbonne)에 참석하면서 1540-1541년 유럽의 신학과 자신의 사상의 깊이를 더 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종교로 분열의 위기에 처한 유럽에서 자신의 입장을 견고히 보일 수 있었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물면서 국내외적인 다양할 활동뿐만이 아니라, 필립 멜랑크톤(Philippe Melanchthon)과 같은 당세 개혁자들과 친분을 쌓기도 한다. 동시에 <기독교강요> 라틴어 2판, 로마서 주석서, 시편 찬양집 등을 출판하기도 한다. 또 같은 고향 출신으로 경건한 과부였던 이델레트 드 뷔레(Idelette de Buré)와 결혼하며, 스트라스부르그 시민권을 얻기도 한다. 이 기간은 어쩌면 칼뱅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칼뱅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그가 부처의 권위 있는 초청을 받아들인 것은 단순히 학문적인 성취나, 목회적 경험을 쌓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긍극적으로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한 것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사실 부처는 칼뱅을 설득할 때, 구약의 요나 선지자를 예를 들면서, 사명을 피해 떠났던 그가 결국 사명의 땅 니느웨에서 성공적인 사역을 했듯이, 그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시역을 위해 그의 영광을 위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줄 것을 부탁한 것이었다. 칼뱅에게 있어서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3년의 삶은, 단순한 <쉼>의 여백이 아니라, 또 다른 한 단계, 개혁자로서 근본적인 <성숙> 단계를 지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제네바가 그에게 개혁자 소명을 이루기 위한 사역을 <만들어> 주었다면, 스트라스부르그는 그가 앞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개혁자로서 온전히 <형성되게> 역사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스트라스부르그 경험이 칼뱅의 미래 사역에게 미친 영향
제네바로 다시 부름 받은 칼뱅은 갓 30세가 넘었다. 그의 신학적 지식과 문화적 역량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는 3년간의 경험을 통해 스트라스부르그와 유럽에서 수많은 지도자들을 알게 되었다. 그 역시 시대의 문제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개혁자로서 해결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흔히 개혁이라는 명문 아래, 극단적인 언행을 보이거나, 마귀 논리 또는 적대적 태도로 일관했던 그 당시 많은 자들과 칼뱅은 달랐다. 그는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특히 루터와 츠빙글리 간 신학적 중용을 유지한 부처를 가까이 대하면서, 그 역시 신학적으로 부분적이나마 중용 또는 절제의 자세로 문제에 임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을 것이다.

칼뱅이 스트라스부르그 공동체에 빚진 또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교회를 개혁시킬 성숙한 목회자로서의 자질이다. 이것은 그에게 가장 소중한 자산 중 하나일 것이다. 제네바에선 시행정부에서 위임 받은 설교자였지만, 스트라스부르그에선, 3-400명 프랑스 난민 공동체의 온전한 목사였다. 설교자, 교육자, 목자, 고통과 위로를 나누는 동반자로서 전인격적인 사역을 한 것이다. 물론 그 당시 독어권 지역에서 불어 공동체 목회하는 것이 결코 자연스럽지만은 않았겠지만, 특히 다양한 사회적 계층, 다양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성도들로 구성된 소위 오늘날 표현으로 <디아스포라 사역> 목사였던 것이다. 지금도 스트라스부르그엔 1538년 9월 8일 그가 첫 불어 설교로 예배를 드린 성 니꼴라 교회 (L’église de Saint-Nicolas), 그리고 새 교회(Le Temple Neuf)와 불어예배가 자립적인 교회로 성장하여 세워진 방패교회(l’église du Bouclier)가 존재하고 있다. 그는 주중 4회, 주일엔 2회 설교를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프랑스 동포를 섬기면서 처음으로 안정된 사역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교회조직을 했으며, 성경봉독, 예배식, 교리문답, 사회봉사 등을 어떻게 했는지 부분적으로 알뿐이지만, 스트라스부르그에 있으면서 많은 걸 배우고, 또 많은 것을 새롭게 적용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목회사역은 제네바 교회를 세우고 더 나아가 모든 개혁교회의 본질과 조직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칼뱅에게 <개혁>이란 기독교 일치에 대한 거부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기독교 전통의 계승자로서, 또 어거스틴이나 크리스톰과 같은 초대 교부들과 정신이 일맥상통한 제자로서 정체성을 갖는 것이었다. 그는 스콜라적인 중세교회가 이런 전통을 간직하지 못하고 본질에서 벗어났다고 본 것이다. 그는 보다 큰 교회를 그리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영적 공급을 받고 경건함에 이르며, 목회와 교육을 통해 보다 조직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보았다. 칼뱅의 신학자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능력은 먼저 Gymnase 경험을 되살려, 거의 20년이 지난 1559년에 창립된 <제네바 아카데미>를 통해 구현되었고, 칼뱅은 그 곳에서 로마서 강해를 하면서 신학을 가르쳤다. 또 같은 해에 그 동안 25차례에 걸쳐 증보 보완된 <기독교 강요>가 가장 대표적인 칼뱅주의 신학 작품이기도 한다. 특히 1541년에 처음으로 출판된 불어판 <기독교 강요>는 칼뱅이 스트라스부그르에 있을 때 준비했고(1539년) 제네바에서 인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것이 그 당시 문화 및 문학 차원에서 획기적인 이유는, 현자의 언어 라틴어 대신 일반 대중언어로 높은 수준의 신학 개념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 끝맺는 말:
칼뱅에게 있어서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경험은 소중하고 결정적인 것이었다. 신학적인 면에서나 -예정론, 성령론-, 또 목회적인 차원에서나, 그 당시 여러 개혁자들, 특히 부처(Bucer)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다른 한편 칼뱅은 나름대로의 신학과 사상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확하게 어느 정도까지 칼뱅이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경험은 칼뱅이 여러 도서 작품에서, 특히 교리문답에서, 그리고 제네바에 설치된 교회제도에서, 신학적 사상에 대해서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칼뱅은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신학 연구를 나름대로 보다 폭 넓게 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동 시대 유럽의 여러 나라 개혁자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1538-1541년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칼뱅>은 단순한 학문적 진보를 위한 여정이 아닌, 개혁을 위한 필연적인 <성숙>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그가 제네바를 넘어서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모든 나라에 개혁사상을 전파하고 복음의 영광을 위해 수많은 개혁교회가 세워짐으로써 드러나 보이게 된다.

댓글 남기기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Previous Next
Close
Test Caption
Test Description goe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