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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강단

3. 이동원 목사, 비움과 채움의 영성

[명사특강] 이동원 목사/ 지구촌교회 원로목사

제6차 미국장로교 전국한인목회자 컨퍼런스두번째 강의인 ‘건강한 영성’을 두번에 걸쳐 소개한다. 이 동원목사의  두번째 강의인 ‘건강한 영성’에 대한 후반부 강의 내용이다. 강의를 통해 이 목사는 기독교 영성의 독특성으로 ‘비움과 채움의 영성’을 길게 설명하고 있다. 이번 강의내용은 여러 화제가 될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먼저 이 목사는 “한국교회에서 한번 실험하다가 몰매를 맞았다”고 표현한 관상기도에 대한 해명과 설명이 들어 있다. 그리고 코스타를 시작한 계기, 이용규 선교사와의 여러 일화들, 65세 조기은퇴와 은퇴금없는 은퇴 등을 하게 된 계기 등 흥미로운 간증내용들이 들어 있다. 강의가 끝나고, 한 목회자는 최근 한국교계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오정현 목사와 전병욱 목사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이동원 목사는 요즘 그 문제들로 돌아다니며 사과만 하고 다닌다고 어려움을 표시했다.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교통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몇개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고 전했다.

결국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강조해야 할 다른 종교와 유사성도 있으면서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기독교 영성의 독특성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비움과 채움의 영성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비워야 하는가. 들어가지 말 것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있어야 할 것을 우리 안에 채워야 한다. 결국 영양의 불균형을 시정하고 건강한 사역자가 되고 건강한 목회를 위해 씨름해야 할 영성적 과제가 비움과 채움의 과제이다.
 
I. 비움(kenosis)

1. 비움의 성경적 근거

잘아시는대로 비움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우리보다 더 불교인들에게 훨낀 더 친숙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불교의 선승이나 심지어 이슬람의 수피같은데서도 비움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비움에 대한 강조가 없는 것 처럼 착각한다. 실제로 비움에 대한 성경을 공부하면서 놀랍게도 성경이야 말로 다른 어떤 책이나 어떤 종교못지 않게 비움을 더 진솔하게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움의 성경적인 근거로 제일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말씀이 있다면 빌립보서 2:5~8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편지하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이시지만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다. 영어로는 “emptied Himself”라고 표현된다. 희랍어로 “kenosis” 라는 단어이다. 자기를 비우셨다. 예수님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이 비우고 오신 생애이다.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에서 그리고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 분이 마침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죽으심은 비움의 절정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를 “케노시스(kenosis)”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바울사도는 고린도후서 8:9에서 고린도교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셨다. 자발적인 청빈이다. 주님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의 부유를 위해서이다. 그런데 가난으로만 끝나면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계서 우리를 부요하기 위해 모든 것을 비워주셨다면, 우리는 그 분을 통해서 다시 채워주심을 경험할 수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비움과 채움이라는 기독교 영성의 독특한 두 개의 측면을 함께 발견할 수가 있다.

2. 비움의 목회적 실천

실제로 기독교 영성의 역사를 보면 이런 비움을 우리의 목회속에서 실천하기 위한 여러가지 시도가 있음을 볼 수가 있다.
 
1) 예수 기도(Jesus Prayer)=예수 기도는 개신교하고는 좀 거리가 먼 관계인 동방교회 전통으로 최근에 와서는 이 부분에 대한 것이 많이 알려졌다. 특히 헨리 나우엔이 자기 평생을 통해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이 ‘예수 기도’이라고 하며, 그것이 얼마나 자기 생애에 크게 도움이 되었는지를 강조한다. 예수 기도하니 무슨 예수님이 하신 기도처럼 오해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했던 기도가 예수 기도이다.

사실 예수 기도의 원천은 사막교구 시대부터 있었다. 그때부터 많은 기도가 뿔뿔히 흩어져서 적용해 오다가 11세기에 와서 하나의 기도문으로 정형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신교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기도문이 주기도문이라면 동방정교 교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기도문은 바로 예수 기도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죄인된 저를 불상히 여기소서.”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에 나오는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그대로 나온다.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간다고 소식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다. 그 기도가 응답됐다. 한센병 환자들이 지나가는 예수님에게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했으며 다 깨끗함을 얻었다. 또 바래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함께 기도한다. 바리새인이 기도후 세리가 기도하기를 하늘을 올려다 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한다. 그 기도가 응답됐다.

그 기도들의 공통점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에서 발견한 기도를 가지고 기도를 실험하던 사람들이 놀라운 기적들을 경험한다. 동방교회 신학자들은 이런 정의를 한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를 이렇게 좋아하시고, 우리에게 수많은 응답과 은혜를 부어주시는 이유는 단지 하나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렇다. 하나님의 속성가운데 가장 위대한 속성중의 하나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속성이기때문에 우리가 긍휼을 빌때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품으시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치유해 주신다.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힘들때 아플때 어려울때 이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긍휼을 빌었고, 하나님 앞에 부요해지고 채워지는 체험을 할 수가 있었다.

2) 세족식=대부분의 개신교는 세례와 성찬 두가지 밖에 인정하지 않지만, 어떤 교파에서는 세족식을 마치 세번째 성례인 것 처럼 강조하는 교단도 있다. 과연 세족식이 성례의 한 차원이 될 수 있다 안된다는 것은 신학적인 토론이 되겠지만, 주님이 세족의 모본을 보여주시면서 이것을 알고 행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다. 요즘은 한국교회에서 세족식을 많이 한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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