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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일칸, 무슬림 칸들과 네스토리안

[실크로드와 복음루트] 최하영 목사/ GMS 우크라이나선교사 |

(20회) 이슬람의 강력한 영향과 교회의 타격 |

일칸(Ilkhan, 1256-1335)을 세운 훌라구(Hulagu, 1218-1265)는 칭기즈칸(Ghinghiz Khan, 1160~1227)의 막내 아들 톨루이(Toluy, 1190-1232)와 케레이트족 네스토리안 토그릴 왕칸(Toghril, Wang Khan, 1131~1203)을 삼촌으로 둔 소르각타니(Sorghaghtani, 1190-1252)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258년 훌라구가 압바스 왕조(Abbasid, 750-1258)의 수도 바그다드(Baghdad)를 점령하여 그 바그다드의 압바시드 칼리프 궁전을 네스토리안의 총대주교 마키카 2세(Makika II, 1257-1265)에게 주고 일칸의 수도는 마라가(Maragha)에 두었다.

그리고 훌라구의 아내 도쿠즈 카툰(Dokuz Khatun, 1229~1265)은 토그릴 왕칸의 손녀로서 믿음의 여왕 답게 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리는데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훌라구 장자 아바가(Abaga, 1265-1282)가 제2대 일칸의 칸으로 아버지처럼 네스토리안 기독교를 보호하였다.
이 아바가 통치 때에 1281년 몽골 투르계 네스토리안 총대주교 마르 야발라하 제3세(Mar Yaballaha III, 1281-1317)와 위구르인(Uighur) 랍반 소마(Rabban Sauma, 1225-1294)가 일칸국의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다. 그런데 아바가 칸이 죽자 훌라구의 7번째 아들인 테구데르(Teguder, 1282-1284)가 제3대 일칸의 칸이 되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이에 이슬람에 반감을 갖고 있는 아바가 칸의 장자 아르군(Arghun, 1284-1291)이 내전을 일으켜 테구데르를 처형하여 제4대 일칸의 칸이 되었다.
아르군의 아내 우룩 카툰(Uruk Khatun)은 케레이트족 네스토리안 토그릴 왕칸의 손녀이자 훌라구의 아내 도쿠즈 카툰의 질녀이다. 1287년 아르군 칸은 랍반 소마을 교황의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랍반 소마는 프랑스왕 빌립 4세(Pilip IV, 1285-1314)와 영국왕 에드워드 1세(Edward I, 1273-1307)를 만나 십자군 지원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그리고 1288년 2월 20일 새 교황 니콜라스 4세(Nicholas IV, 1288-1292)를 만나 아르군 왕과 야할라하 3세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아르군의 통치 때에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번창하였다. 1291년 3월 10일 아르군의 죽음과 함께 서방의 십자군도 끝났다. 아르군 동생 가이카투(Gaikhatu, 1291-1295)가 일칸의 칸이 되었다. 그는 야발라하 3세의 성찬식에 참여하기도 했고,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으며 패자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인 해청패(songqor)를 하사하기도 했다.
1295년 가이카투왕은 무슬림 아랍인의 침략으로 시해되었다. 이에 바이두(Baidu, 1295)가 제 6대 일칸 칸이 되어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비호하였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바이두 칸을 인정하지 않고 아르군의 아들 가잔(Mahmud Ghazan, 1295-1304)을 제7대 일칸의 칸으로 세웠다. 이로써 45년간(1251-1295년) 지속된 페르시아 일칸국 하에서 싹이 튼 네스토리안 르네상스(renaissance)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후 일칸 후기는 무슬림 칸이 통치하게 되었다.
가잔 칸은 일칸에 처음으로 이슬람 원리로 통치하였다. 가잔은 몽골제국의 대칸에게 종속된 일칸국이 아니라 스스로 이슬람의 제왕이라 하였다. 그가 내린 첫 칙령은 모든 기독교회와 유대인 회당과 불교 사원을 파괴하라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종교관용은 사라졌고, 이슬람은 다시 이란의 공식적인 종교가 되었다.
무슬림들은 수도 마라가의 네스토리안 총대주교 관저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야발라하 3세를 때리고 나체로 몸을 묶어 높은 곳에 꺼꾸러 매달아 재로 그의 입에 가득 채우고 양고기를 구울 때 쓰는 쇠꼬챙이로 가슴을 찔렀다. 이때에 기독교인이자 아르메니아의 군주 하이톤(Haithon II, 1266–1307)이 나우루즈(Nawrūz , ~ 1297)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총대주교 야발라하 3세를 구해주었다.
아르벨라(Arbela)와 마라가, 타브르즈(Tabriz), 하마단(Hamadan), 모술(Mosul), 바그다드(Baghdad) 등의 교회들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무슬림들에 의해서 점거되었다. 그런데 기독교 핍박자 나우루즈가 가잔을 대항하기 위해 이집트 무슬림 맘룩크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1297년에 사형에 처해졌고 기독교인들은 기뻐하였다.
그 후 가잔은 야발라하 3세를 그의 전직 명예를 어느 정도 회복시켜주었고 1281년 몽케 대칸이 총대주교에서 주었던 왕실 금 인장을 재발행해 주었다. 가잔은 대외적으로 기독교계 서구와의 동맹정책을 계속하였다.
맘룩크 이집트 왕조와의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던 1302년 4월 12일에 교황 보니페스 8세(Boniface VIII, 1294-1303)와 영국의 에드워드 1세, 아라곤의 제임스 2세(James II of Aragon, 1291 – 1327)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과거 기독교인 아르군의 경우와는 용어나 칭호 등과 달리 서구 군주들을 술탄들이라고 했고 연도 표시도 이슬람력으로 하고 사신으로 파송된 사람도 네스토리안은 없고 대신 무슬림들의 이름인 ‘앗 딘’으로 끝나는 사람들이었다.
가잔의 말년에는 기독교에 대하여 좀 더 호의를 베풀었고 총대주교에게 보물을 풍부하게 수여하였다. 그래서 페르시아에 무슬림을 만들어 놓은 일칸 가잔이 1304년에 사망했을 때에 기독교인들도 슬퍼하였다고 한다.
아르군왕의 셋째 아들이며, 가잔의 동생인 울제이투(Oljeitu, 1304-1316)가 일 칸국 제8대 칸이 되었다. 그는 케레이트족(Kerait) 어머니 우륵 카툰(Uruk-Khatun)의 신앙적 영향으로 어렸을 때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교회의 세금을 면제하고 여러 가지 특혜를 베풀었다. 총대주교 야발라하에게 상당한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이에 무슬림들은 다른 황후 쿤저스캅(Kunjuskab)을 유인하여 왕으로 하여금 무슬림으로 전향케 하였다. 피에이(J. M. Fiey)는 이후 가잔의 통치가 기독교인들에게 “먹구름”이라면, 울제이투의 12년 간의 통치는 “대폭풍우” 시기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울제이투는 마라가의 수도원을 무슬림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타브리즈에 있는 교회를 모스크로 바꾸도록 명령했으나 가잔의 케레이트의 군주의 설득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는 맘루크와의 적대관계를 생각하여 서구와의 동맹정책을 계속하였다.
1307년에 울제이투는 아르벨라의 기독교 왕 조오지(Georgia)와 그의 모든 백성에게 기독교의 신앙을 버리고 교회들을 포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칙령에 저항했던 조오지아 기독교인들의 용기는 집행하도록 보낸 몽골 장군 초반(Choban)에게 큰 감동을 주어 기독교인의 보호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울제이투는 1310년에 아르벨라의 모든 백성을 학살하였다.
야발라하 역사서(Histoire de Yaballaha)에 의하면, ‘밀은 이미 끝났고, 소금에 대하여 누가 어느 곳에서 찾겠는가? 그들은 나귀들과 개들과 흰족제비를 이미 먹어버렸고 낡은 가죽 물질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고, 거기에 어느 누구도 죽은 자를 매장하지 않았다. 아랍 사람들이 그 요새에 들어와 그들 모두를 학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총대주교 야발라하는 생명을 걸고 많은 생명들을 구하였다. 그 7년 후 야발라하는 1317년 11월에 사망하였다. 야발라하가 죽자, 일칸국 영내의 네스토리안은 최후의 보호막마저 잃어버리게 되었다.
울제이투의 아들 아부사이드(Abusaid, 1316-1335)가 12세에 일칸국 제9대 칸이자 마지막 칸이 되면서 정치는 극단적인 혼란에 빠졌고, 더 이상 기독교를 보호할 의지도 없었다. 이런 국내의 어려운 상황에 국외적으로도 위협을 받고 있었다.
러시아 초원의 울제이투의 사촌 칸이 북서쪽에서 침략하였고 칭기즈칸의 아들 차가타이(Chagatai) 계열의 칸이 중앙아시아에서 침략하였고 이집트의 순니파(Sunnite) 술탄이 남쪽에서 위협하였다.
“마지막 기독교 보호자”인 초반(Choban)도 방탕한 아들로 인하여 50년 명성의 보람도 없이 1327년에 처형당하였다. 훌라구 계열은 끝났고, 유럽과 몽골 아시아 사이의 좀 더 우정적인 관계에 대한 모든 소망도 끝났다. 보일(J. A. Boyle)은 “훌라구 가계가 10년 혹은 20년간 더 오래 충분한 열정으로 유지되었다면 오늘날 중동(Middle East)은 전체적으로 다른 양상을 낳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칭기즈칸의 네 번째 아들 톨루이의 셋째 아들 훌라구에 의해 세워진 일칸은 여섯 세대 후 1335년에 몽골제국 방계 국가 중 제일 먼저 멸망하였다. 그 후 페르시아 땅에는 칸이 없이 무하마드(Muhammad, 1336-1338)와 투가 티무르(Tugha Timur, 1338-1351), 자할 티무르(Jahar Timur)와 사티 벡(Sati Beg)과 수레멘(Sulemen)의 3인이(1339-1343), 그 다음 누실완(Nushirwan, 1344) 등이 권력을 잡았다. 이들 모두는 이슬람의 강력한 영향으로 네스토리안 교회는 더 큰 타격을 받아 예배당은 전부 이슬람의 사원으로 바뀌어졌고, 기독교인의 사유재산은 몰수되었으며 성도들은 무슬림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모두 살해당해야 했다. 더욱이 14세기 후반에 티무르의 서아시아 침공과 무차별적인 주민학살로 인하여 네스토리안 교회는 더욱 위축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무슬림 중 특별히 이란인들이 급격히 많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면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의 이 땅의 신앙의 유산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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