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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할 형(亨, 亯)

[오피니언] 송태정 목사/ 순복음해남교회, 서예작가 – <21회> |

형통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의미

형통(亨通)이란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제(丄) 하나님의 입(口)에서 나오는 말씀을 생명을 걸고 그것을 마치어(了) 이루어낸다는 글자이다……

해를 맞이하면서 목회자라면 성도들이 형통하기를 바라면서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그런데 ‘형통’이나 ‘만사형통’을 전하면서 성경적이지도 않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래서 정말 성경적이고 구속사적인 진짜 형통(亨通)의 의미를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형통할 형(亨)자에 대하여 쓰게 되었다.

갑골학자들은 형통할 형(亨)자와 누릴 향(享)자와 희생제물을 삶을 팽(烹)자는 한 글자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글자는 관계가 형통해야 한다는 형통할 형(亨)자와 그런 다음에 누림이 있다는 누릴 향(享)자가 되었던 것일까? 그것의 실마리는 바로 ‘희생제물을 삶을 팽(烹)’자에 있다.

세계 고대문명에는 자기들만이 최고로 섬기던 하나님을 섬기는 관계 속에서 형통이 오기도 하고 나라의 멸망이 오기도 한다고 그들의 서사시에나 점토판의 기록에는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최고의 신께 제사 드리는 것을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로 드려졌으며,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중대사에는 더더구나 희생 제사를 드리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했던 것이다. 원래 형(亨)이나 향(享)이나 팽(烹)은 ‘신에게 제사를 드리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글자였다.

자신들이 섬기는 최고의 신에게 제사를 드려지고 있는 신전의 모습을 그린 글자가 바로 형통할 형(亨)자인 것이다. 위의 갑골문의 삼각형 모습은 바로 여기가 신전의 지붕 모습이다. 이 지붕위의 모습과 같은 글자가 한자의 명령할 령(令)자인데 김경일 교수는 “제사를 지내는 건물 안에 꿇어앉은 모습이며, 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진정한 형통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데서 오는 것이다. 지금의 형통할 형(亨)자의 신전의 지붕 모습은 윗 상(丄)자로 변형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 상제(上帝)를 섬기는 신전임을 알 수가 있다. 백옥쟁은 “형(亨)은 하늘의 신(天神)에게 제사를 올리는 장소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아래의 위(囗)은 하늘의 신에게 올리는 제단(天壇)이다”라고 하였는데, 허신은 1900년전 《설문해자》에서 “천신(天神)은 천지만물을 이끌어내어 창조하신 분(引出萬物者也)”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 분은 범신론인 하느님이 아니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형통할 형(亨)자의 입 구(口)자처럼 생긴 글자는 위의 ➀번 글자를 보면 사다리 모양이다. 그래서 고대의 글자 중에 높을 고 자나 형통할 형 자에도 사다리가 들어간 글자가 있었던 것이다. 세계고대문명과 중국고대 문명의 기록에도 보면 하늘에 올라가는 두 개의 도구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첫째는 계단이고, 둘째는 사다리였다. 제카리아 시친은 《틸문 그리고 하늘에 이르는 계단》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파라오가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수메르와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최고의 신을 위하여 지어진 지구라트의 모양도 위의 갑골문 형태와 같다. 그러니까 계단과 사다리는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지구라트의 모양에서 지금은 그 위에 신전들이 다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위에는 최고의 신을 위한 신전이 지어져 있었던 것이며, 거기에서 최고의 통치자인 왕은 신년이나 국가의 대소사에 직접 희생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위의 삼각지붕은 최고의 신 하나님이 거하는 장소이다. 그런데 거기에 만나러 가기 위해서는 하늘에 오르는 사다리가 필요한 것이다. 이미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야곱은 꿈에서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았다(창28:12절). 그런데 예수님은 이 하늘에 오르는 사닥다리()가 자신이라고 하신다(요1:51;14:6절).

단옥재는 《설문해자주》에서 <예기·곡례>를 인용하여 “천자(天子)가 제기 그릇을 잡아 바칠 때는 심장의 높이보다 높인다”고 했다. 수메르를 비롯하여 모든 고대문명에서 희생제물로 양을 잡아 드려졌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위의 글자 맨 아래는 둘레 위(囗)자인데 또한 ‘경계’라는 의미도 있다. 이것은 최고의 신에게 드려졌던 그 건물과 그 주변은 삼엄하게 둘레를 치고 경계를 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곳은 거룩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솔로몬을 통해서 지은 성전 주변에도 지키는 호위병들이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왜 나중에 갑골문에 없는 마칠 료(了)자가 더해졌던 것일까? 료(了)자에 대하여 갑골학자들은 ‘매달다’, ‘끝내다’, ‘완결하다’라고 한다. 이 글자의 자세한 해석은 지면 관계상 자세하게 할 수는 없으나 정확히 말하면 메시야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고(형통) 완결 지을 것을 보여주고 있는 글자이다(요19:30절).

수메르의 왕들은 자신을 자신의 최고의 신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종이었다고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신 종이라고 하셨다(막10:45절). 이 형통에 대하여 전하고 있는 메시지의 해석은 3가지로 분류가 될 수 있다. 첫 번째는 국어사전적 해석, 두 번째는 원어적 해석, 그리고 세 번째로는 구속사적이며 성경적인 해석이 그것이다.

국어사전에서 ‘형통’과 ‘만사형통’은 ‘모든 것이 뜻과 같이 잘 되어감’이다. 그리고 히브리 원어는 ‘찰라흐’로 ‘번영하다’, ‘성공하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성도들은 오직 자신들의 뜻만 이루고 자신들만의 번영과 성공과 형통을 추구해 가는 이기주의적인 형상만 만들어낼 뿐이다. 그렇다면 성경 시편1편 3절에서 말씀하는 성경적 ‘형통(亨通)’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신을 십자가에 죽여서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성경적인 형통인 것이다.

히브리 원어 ‘찰라흐’에는 ‘성취하다’, ‘이루다’는 뜻이 있다. 그렇다면 누구의 뜻을 이룬다는 것인가? 그것은 100%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사야53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대속의 장이다. 그런데 10절 하반절에 보니까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형통)하리로다.”라고 했다. 여기에 쓰인 ‘이루다’, ‘성취하다’는 뜻이 바로 시편 1편 3절의 찰라흐인 ‘형통하다’는 원어가 같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형통’이라는 말을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다 이루었다.”(요19:30절)고 하셨고, 그 분의 뜻을 형통케 하시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형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인데 예수님조차도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이루신 것이었다.

바울도 이 진리를 알기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절)”고 하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형통(이루)케 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세상에서의 번영이나 성공을 구하는 형통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분의 뜻을 이루어가는 형통을 달라고 기도하며, 예수님을 발자취를 따라가는 신앙인들이 되어야겠다(고후4:10-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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