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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착칸국과 기독교

[실크로드와 복음루트] 최하영 목사/ GMS 우크라이나선교사 |

(18회) 1382년 킵찹칸국의 멸망 |

킵착칸국의 제9대 칸은 우즈벡(Uzbek Khan, 1313-1341)으로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주종족의 조상이 되었다. 이렇게 우즈벡족은 나이만과 키타이, 위구르, 카를룩, 쿨라우트, 탕구트, 콩기라트(Qunggrad) 등의 사람들 혼혈에 의해 형성되었다. 1382년 킵착칸국은 티무르제국을 세운 티무르의 부관인 톡타미쉬(Taqtamish)의 쿠데타로 멸망되었다. 칭기스칸 첫 번째 아들인 조치의 계열이 여섯 세대만에 종말을 고하였다…

칭기즈칸이 1227년 죽음으로 그의 정복지를 그의 자녀 및 손자들에게 분배되었다. 킵착칸국(Kipchak Khanate, Golden Horde)과 차카타이칸국(Chagatai Khanate), 일칸국(Il Khanate), 원나라(Khanate of The great Khan)로 나눠져 분배되었다. 이에 몽골제국 제2대 대칸 오고데이(Ogodai, 1227-1241)가 1235년 쿠릴타이(kurultai)를 소집하여 카스피 해와 흑해 북방의 킵차크 초원과 러시아에 대한 원정을 결의하였다. 이 원정군의 총수는 유라시아 서부 초원을 영지로 받았던 칭기즈칸의 장남 조치(Jochi)의 아들 바투(Batu, 1227~1255)였다. 바투는 수베데이(Subedei)와 함께 1236년 봄에 진군하여 1237년에 불가(Volga) 강을 건넜다. 1240년 겨울 동슬라브족 어머니인 키예프(Kiev)가 잿더미가 되었다. 이때 키예프 루스인(Kievan Rus)의 필사적인 저항은 열정적으로 찬양되어 구전되어 온다. 오랫동안 이 키예프는 죽은 자들의 뼈로 뒤덮혔었다.

이 시기 키예프의 인구는 5만명 이상으로 파리와 같았고 런던보다 많을 정도로 번성하였었다. 몽골군의 침입에 대해 연대기 작가는 “아무도, 그들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그들의 언어가 무엇이며, 어떤 종족인지,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 확실히 몰랐다. 그들은 그저 따따르라고 불리웠다”. 그래서 침략을 받은 사람들은 ‘악마 같은 따따르’, ‘저주받을 무신론의 낯선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이들 몽골군은 계속 진격하여 아드리아 해안까지 이르렀다. 1241년 겨울에 바투의 삼촌 대칸 오고데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유럽의 몽골군은 철수하면서 기독교 서유럽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바투는 1242년 사라이(Sarai)에 수도를 정하고 킵착크 칸국(1242-1346)을 세워 킵착(Kipchak) 스텝과 불가르(Bulgar) 영토, 루시공국까지 확장하였고, 돈(Don)강에서 일리(Ili)강까지 넓은 지역을 통치하였다. 이 지역 공후들은 야르룩크(yarlyk)라는 공후증서(decrees of the Khans)를 받아 250년간 몽골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면서 이 지역은 몽골의 정치, 경제, 사회, 풍습, 언어 등의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바투의 동생 베르케(Berke, 1257-1267)가 제2대 킵차크 칸국의 칸이 되었는데, 칭기즈칸 계열 가운데서 최초로 몽골족 무슬림이 되었다. 그래서 베르케의 장군들 중에 상당히 많은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은 일칸국(Ilkhan, 1256-1353) 초대 칸 네스토리안 기독교인 훌라구(Hulagu, 1218-1265)에게로 갔다. 또한 무슬림 베르케로 인해 루시 공국(Kievan Rus)의 정교회도 상당히 타격을 받았다. 루시공국은 시릴(Cyril, 827-869)과 메소디우스(Methodius, 815-885) 형제가 고안한 슬라브 문자와 성경과 전례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한 것을 기초로 슬라브 기독교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957년 이고르(Igor, 913-945)의 아내 올가(Olga, 945-964)가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세례 받으면서 루시 정교회의 첫 세례자가 되었다.

올가의 손자 블라지미르 1세(Vladimir I, 980-1015)가 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 2세(Basilius II)의 여동생 안나(Anna)와 결혼하면서 988년에 자신 뿐만 아니라 루시인들이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블라지미르의 개종으로 인해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벨라루스 등 동슬라브인이 정교회 교인이 되는 기초를 놓았다. 이 때에 키예프 정교회 대주교구를 중심으로 16개의 주교구가 생길 정도로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야로슬라브는 키예프 성 입구에 금문(Golden Gate)을 세우고, 1037년에 성소피아 성당(Kiev’s Saint Sofia Cathedral)을 세웠다. 그리고 1051년에 수도사(monks) 안토니(Anthony)와 데오도시우스(Theodosius)에 의해 뻬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Kiev Pechersk Lavra)을 설립하였다. 이런 정교회 최전성기에 몽골의 침입은 정교회에게 큰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1262년 베르케(Berke, 1257-1266) 칸이 이집트 맘룩크 제4대 술탄이 된 바이바로스(Baibars, 1260-1277)와 연합하여 훌라구를 공격하였다. 베리케는 1258년 훌라구가 압바스 왕조(Abbasid, 750-1258)를 무너뜨리고 무슬림 친구 압바스의 마지막 칼리프 알 무스타심(Abbasid Caliph Al Musta’sim)과 무슬림들을 죽였다는데 분노하였다. 이미 1259년 제4대 대칸 몽케가 죽자 새 대칸을 위해 형제간인 쿠빌라이(Kublai Khan, 1215-1294)와 아릭부케(Ariq Buke, 1219-1266)와의 싸움에도 베르케와 훌라구는 서로 다른 편이었다. 베리케는 차카타이(Chagatai Khanate, 1225-1340)와 오고데이 가문(House of Ogedei)과 함께 아릭부케를 지지하였고 훌라구는 쿠빌라이 편이었다. 이로인해 몽골제국의 연대는 깨졌다.

그 다음 맹구 티무르(Mengu-Timur, 1266 – 1280)가 킵착칸국의 제3대 칸이 되어 바이바르스 이슬람 연합군과 함께 아르메니아에서 훌라구의 장자 아바가(Abaga, 1265-1282)와도 싸웠다. 또한 맹구 티무르는 1289년 겨울 카스피해 남방의 아란 지방에서 제4대 일칸 아르군(Arghun, 1284-1291)과도 전쟁을 하였다. 이에 아르군이 니콜라스 4세(Nicholas IV, 1288-1292) 교황과 프랑스 필립 4세(Pilip IV, 1285-1314), 영국 에드워드 1세(Edward I, 1273-1307)에게 이집트 미스르(Misr)쪽으로 출정하면, 자신들은 이쪽에서 출정하여 다마스쿠스에서 만나 이슬람 이집트를 공격하자고 하였지만, 킵착칸국와의 전쟁으로 인해 서방의 8차 십자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이집트는 킵착칸국의 덕분으로 몽골제국에게 한번도 침략을 받지 않아 이슬람과 콥틱 기독교문화가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한편, 로마 가톨릭은 이미 동방정교회의 신앙이 뿌리내려진 키예프 루시 공국과 몽골제국의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에게 로마 가톨릭 교인으로 개종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가난을 맹세하였고 오직 설교와 선교를 위한 수도회인 프란체스코회(Franciscans, 1209년 조직)와 도미니쿠스회(Dominicans, 1216년 조직)를 이용하였다. 교황 인노센트 4세(Innocent IV, 1243-1254)는 1245년 6월 제13차 리옹(Liyons) 종교회의 결의를 통하여 몽골의 위협에 대처할 방안과 동방에 대한 정확한 정보 수집, 네스토리안 교회를 버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로 전향시키려는 목적으로 이들 두 탈발수도회(脫髮修道會)에게 임무를 맡겼다. 플라노 카리피니의 요한(John of Plano Carpini, 1245-1247)부터 마리그놀리의 요한(John of Marignolli, 1342-1346)에 이르기까지 100년간(1242-1342) 10번 정도의 프란체스코파와 도미니크파 출신 수도사들이 아시아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이는 바울의 ‘남의 터 위에 건축(建築)하지 않는다’(롬 15:20)는 선교정신에도 위배되었다.

사실, 바투의 장남이며 상속자인 사르탁(Sartak)이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이었다. 그도 1256년칸이 되었으나 그해 사망하였다. 프란체스코 수도사 루브룩의 윌리암(William of Rubruck, 1253-1255)이 1253년 초 킵차크 칸국의 사르탁이 주둔하는 곳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네스토리안들을 만났다고 하였다. 그들의 성경은 시리아어로 되어 있고 기도 때마다 그것을 암송하나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아마도 킵착칸국에는 초기 몽골제국의 믿음 좋은 왕후들이 없어 신앙도 약했던 것 같다. 제2대 대칸 오고데이 부인 메르키트족 투레게네, 제3대 대칸 구유크의 부인 메르키트족 오굴카이미쉬, 칭기즈칸의 막내아들 톨루이의 부인 케레이트족 소르각타니, 제 4대 대칸 몽케의 부인 쿠툭크, 일칸국 건국자 훌라구의 부인 케레이트족 도쿠즈 카툰, 일칸국 제2대 칸 아바가의 쿤쿠라트족 코타이와 황제의 딸 마리아, 일칸의 제4대 아르군의 부인 케레이트족 우룩카툰 등이 있었는데, 킵착칸국에는 바투의 장남 사르탁만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으로 이 칸국에서의 영향은 미미했던 것 같다.

킵착칸국의 제9대 칸은 우즈벡(Uzbek Khan, 1313-1341)으로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주종족의 조상이 되었다. 이렇게 우즈벡족은 나이만과 키타이, 위구르, 카를룩, 쿨라우트, 탕구트, 콩기라트(Qunggrad) 등의 사람들 혼혈에 의해 형성되었다. 1382년 킵착칸국은 티무르제국을 세운 티무르의 부관인 톡타미쉬(Taqtamish)의 쿠데타로 멸망되었다. 칭기스칸 첫 번째 아들인 조치의 계열이 여섯 세대만에 종말을 고하였다. 그 후 다시 이 지역에 정교회가 다시 회복되면서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흡수되었고 이슬람은 밀려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필자: 최하영 목사
/ hydavidcho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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