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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종교정책

[실크로드와 복음루트] 최하영 목사/ GMS 우크라이나선교사 |

(11회) 칭기즈칸의 종교정책과 네스토리안의 활동 |

칭기즈칸은 종교에 관용정책을 썼고 관리 등용에도 모든 종교인들을 골고루 등용하였는데, 그 중에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을 많이 등용하였다.

네스토리안 기독교(Nestorian Church)는 그리스도의 양성론을 주장하는 이유로 431년 에베소 공회때에 최초로 교단이 분열되어 나와 시리아쪽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 네스토리안은 주로 페르시아 사산제국(226~651)안에서 핍박을 참아내며 실크로드따라 북방 유목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632년 당왕조에까지 주교를 파송할 정도로 왕성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622년 무함마드(Muhammad, 571~632)가 이슬람교를 만든 이후 족장 칼리프(632~661)와 우마야드 칼리프(Umayyad, 661-750), 압바시드 왕조(Abbasid, 750-1258)때에도 네스토리안 성도들은 차별과 핍박 중에서도 수준높은 전문직 지식을 이 이슬람 정부에 전수하였다.

이렇게 네스토리안은 이슬람의 확장 속에서도 총대주교(Catholicos) 디모데 1세(Timothy I, 779-823)에 의한 네스토리안 외방대주교구 연결망(network)제도로 인해 아시아의 방대한 지역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특히 북방 투르크 몽골계(Turko-Mongolian) 유목민인 케레이트족(Keraite)과 나이만족(Naimans)과 메르키트족(Merkits), 키르기즈족(Kyrgyz), 옹구트족(Ongut) 등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이들을 관할하는 네스토리안 대주교구가 카슈가르(Kashgar)이다.

이렇게 1009년 네스토리안 메르브(Merv) 대주교 에벧예수(Ebedyeshu)에 의해 케레이트족의 마르쿠즈 칸(Marghuz Khan)과 그의 부족 남자 20만 명이 세례받았다. 마르쿠즈 칸의 손자이며 쿠르쟈크(Kurchakus)의 아들인 토그릴(Toghril, 1131~1203)이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Yessugai, 1134~1171)와 의형제를 맺었었다. 나중에 토그릴은 테무진(Temujine, 1162~1227)과도 의부자의 연을 맺었다. 이런 토그릴은 테무진과 타타르족을 물리쳤다는 공로로 금왕조로부터 옹 칸(Ong Khan, ~1203)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웅칸이 서구에서 십자군(Crusades,1095-1291)을 구원해 주기를 원했던 사제왕 요한(Prester John)이였던 것이다. 테무진은 1206년 몽골족의 쿠릴타이(qurtiltai)에서 만장일치로 “몽골족의 대칸”인 칭기즈칸(Ghinghiz Khan, 1162-1227)으로 추대되었다.

그 후 네스토리안 케레이트족은 칭기즈칸의 인척으로써 몽골 유목민의 유력한 부족이 되었다. 그 중에 칭기즈칸은 케레이트족 토그릴 웅칸의 동생 자하감보(Jakha-gambu)와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 자하감보에게 세 딸이 있었는데, 이바카 베키는 칭기즈칸의 아내가 되었다가 칭기즈칸의 충실한 신하 주르체데이(Jurchedei)의 아내가 되었다. 베크투트미쉬(Bek-tutmish)는 칭기즈칸의 장남 조치(Jochi)의 첫째 부인이 되었다. 소르각타니 베키(Sorghaghtani Bekhi, 1190-1252 )는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 톨루이(Toluy, 1190-1232)의 아내가 되었다. 소르각타니 베키는 큰 아들 몽케(Möngke, 제4대 대칸)와 둘째 아들 쿠빌라이(Qubilay, 제5대 대칸), 셋째 아들 훌라구(Hulagu, 일 칸국 건국자), 넷째 아들 아릭 부케(Ariq Buke, 기독교인들의 후견인)를 두었다.

몽골 제국 초기의 대칸의 왕후의 대부분은 네스토리안 케레이트족으로부터 왔다. 이렇게 많은 네스토리안들은 초기 몽골 제국의 왕족과 귀족, 군인, 관리인으로 섬겼다. 케레이트족은 위구르 문자를 사용한 문명화된 부족이되었다. 이 위구르어는 이란계 소그드인(Sogdian)들이 네스토리안으로 개종한 자들이 북방유목민들을 위해 소그드어에서 만들었다. 이 소그드인들은 위구르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위구르어로 된 많은 기독교 문헌들을 기록하였다. 소그드인들은 이것을 케레이트족에게 고스란히 전수하였던 것이다.

이런 시기에 칭기즈칸은 북방 투르크 몽골계 유목민인 케레이트족 등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통합하였다. 그 후 칭기즈칸은 다음과 같이 북방을 벗어나 정복을 시작하였다. 1207년 오이라트와 키르키즈, 1209년 티베트(Tibetan), 1218년 카라키타이, 1220년 부하라(Bukhara)와 사마르칸트(Samarqand), 1221년 호레즘(Qwarezm)과 메르브(Merv), 1222년 가즈니(Ghazni)와 헤라트(Herat), 1223년 코카서스(Caucasus)와 킵착(Qipcaq)을 정복하였다. 칭기즈칸은 1225년에 몽골로 귀환하였고 1227년 죽음으로 그의 정복지는 자녀들에게 원나라(Khanate of The great Khan)와 차카타이칸국(Chagatai Khanate), 킵착칸국(Khanate of The Golden Horde), 일칸국(Il Khanate)으로 나눠져 분배되었다. 특히 금(Jin Dynasty, 1115~1234)의 정복은 여러 차례 정복이 일어났었다. 처음 1211년 네스토리안 웅구트족 알라쿠쉬 티긴이 칭기즈칸에게 금을 정복하도록 안내하였다. 결국 칭기즈칸의 죽음 6년 후에 금을 정복하였다.

칭기즈칸은 종교에 관용정책을 썼고 관리 등용에도 모든 종교인들을 골고루 등용하였는데, 그 중에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을 많이 등용하였다. 칭기즈칸이 1204년 나이만(Naimans) 지역을 정복한 후, 네스토리안 나이만 장군 타타통가(Tatatonga)를 등용하여 그의 네 아들에게 소그드인들이 만들어 주었던 위구르어를 가르치도록 했다. 이러한 칭기즈칸의 결정은 몽골제국의 공식어가 위구르어가 되게 했다. 또한 네스토리안 케레이트족 친가이(Chinqay)를 서기관직을 담당하였다. 친가이는 칭기즈칸의 손자 제3대 대칸 구유크까지 제국의 수석서기관(protonotary)으로 행정 책임을 맡았다. 친가이의 세 아들 모두 기독교 이름인 요셉(Joseph)과 바쿠스(Bacchus), 조오지(Georges)이었고 그의 후손들은 모두 원 말기까지 주요 고위직을 역임하였었다. 그리고 칭기즈칸이 다른 지역을 정복하러 나갈 때에 그의 거대한 병영에는 이동식 ‘예배 처소’가 800여 개나 있었을 정도로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칭기즈칸이 기록한 법인 야사(yasa) 중에 네스토리안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구절들이 많다. 그 중에 ‘모든 사람은 천지의 창조자 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칭기즈칸의 주변 네스토리안이 많음으로 인해 무슬림들을 압박하기도 하였다. 칭기즈칸도 1220년 무슬림의 메카(Mecca) 순례를 비판하여, “텡크리(Tengri)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하면서 메카순례를 금지하기도 하였다. 나중에는 사마르칸트 코란 기도자(khotba)에게 알라(Allah) 이름을 부르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아랍 무슬림을 몽골제국의 관리로 등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1227년에 약 40명의 금(여진)의 관리를 채용하여 중국의 유교적인 관료제도를 받아들였다. 창춘(Changchun)을 통해 도교도 받아들였다. 이렇게 칭기즈칸은 몽골제국의 통치를 위해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무슬림, 유교인, 도교인, 몽골 사만인 등을 수용하였다.

이렇게 칭기즈칸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의형제인 네스토리안 케레이트족 웅칸과 의부자관계를 맺었고 그 웅칸의 동생 자가캄부과 절친으로 네스토리안 기독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 자부로 자가캄부의 딸들을 가졌다. 그 딸들은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으로 몽골제국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리고 칭기즈칸 자녀의 가정교사와 비서관도 기독교인었다. 이러한 초기 몽골제국은 기독교 복음의 영향이 상당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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