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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몽골 제국 대칸과 네스토리안

[실크로드와 복음루트] 최하영 목사/ GMS 우크라이나선교사 |

(13회) 대칸들(칭기즈칸~쿠빌라이)과 네스토리안 기독교 |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후 성령이 임하여 교회가 세워졌다(사도행전 1~4장). 그 후 복음은 사방팔방으로 확산되었다(사도행전 8:1, 4). 그리고 교회의 공의회로 첫 번째 50년 예루살렘 공의회(Council of Jerusalem, 사도행전 15:1~29)와 두 번째 325년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가 있었다…

그리고 세번째 431년 에베소 공의회(Council of Ephesus)때에 처음으로 교회가 분열되었는데,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의 교리적인 것 보다 지극히 정치적인 분열로 나온 것이 네스토리안 교단(Nestorian Church)이다.

이 교단은 기독교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 395~1453)과의 적대관계였던 페르시아 사산제국(Sasanian Empire, 226~651)안에서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 실크로드따라 북방 유목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 유목민들 중에 특히 케레이트족(Keraites) 대부분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11세기 초 케레이트족의 마르쿠즈 칸(Marghuz Khan)과 그의 부족 남자 20만 명이 메르브의 네스토리안 대주교로 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 영향에 의해 그의 손자인 토그릴 왕칸(Toghril, Wang Khan, 1131~1203)과 자하감보(Jakha-gambu) 형제도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이 되었다. 토그릴은 서구에서 말하는 사제왕 요한(Prester John)이기도 하다.

토그릴은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Yessugai, 1134~1171)와 의형제(anda, blood-brother)를, 칭기즈칸(Ghinghiz Khan, 1160~1227)과 의부자를 맺었었다. 또한 칭기즈칸은 자하감보와도 절친이었다. 그 자하감보의 딸이며 네스토리안인 소르각타니 베키(Sorghaghtani Bekhi, 1190-1252 )가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 톨루이(Toluy, 1190-1232)의 아내가 되었다.

톨루이와 소르각타니 베키 사이에 큰 아들 몽케(Möngke, 제4대 대칸)와 둘째 아들 쿠빌라이(Qubilay, 제5대 대칸), 셋째 아들 훌라구(Hulagu, 일 칸국 건국자), 넷째 아들 아릭 부케(Ariq Buke, 기독교 후견인)를 두었다.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데이(Ogodai, 1227-1241)가 제2대 몽골제국의 대칸(Khagan)이 되었다. 그의 아내도 나이만족(Naiman) 네스토리안인 투레게네 카툰(Turegene Khatun)이었다. 오고데이의 장남 구유크(Guyuk, 1241-1248)가 제3대 몽골제국의 대칸이 되었는데, 어머니 투레게네의 신앙의 영향을 많아 받았다. 구유크의 개인 성직자는 네스토리안 사제였고 가족들의 믿음을 위해 기독교 물품도 많이 공급해 주었다.

오르두(천막)을 이동할 때에도 정해진 시간에 예배(미사)를 드렸다. 구유크는 네스토리안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기독교교단(야곱파, 아르메니아파, 카톨릭, 정교회 등)에게도 차별없이 대하였다. 이러한 때에 가톨릭 선교사 카르피니(G. Plano Carpinis, 1182-1252)가 1246년 7월에 106일만에 카라코롬(Karakorum)에 도착하여 구유크를 만나 교황 인노센티 4세(Innocentivs IV)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카르피니는 몽골의 역사(Historia Mongalorum)을 기록하였다.

이렇게 기독교 부흥을 일으켰던 제3대 구유크가 사망하자, 케레이트족 네스토리안인 소르각타니 베키의 정치력에 의해 오고데이 계열이 아닌 톨루이의 첫째 아들 몽케 (1251-1260)가 몽골제국 제4대 대칸이 되었다. 한때 구유크의 서기관 친가이와 함께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이 몽케가 대칸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몽케의 어머니 소르각타니 베키와 수석 서기관 볼가이(Bolghai), 첫째 부인 쿠투타이(Kutuktei), 장남 발투(Baltu), 막내 동생 아릭부케(Arikbuka) 등이 네스토리안이었기 때문에 탄압까지는 받지 않았다.

카톨릭 선교사 루브룩(Willem de Rubruk, 1215-1270)이 몽골 카라코롬에 1254년 1월에 도착하여 몽케와 여러 번 회견을 가졌다. 루브룩에 의하면 네스토리안인들은 시리아어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렸다고 하였다.  루브룩은 부활절을 맞이하여 네스토리안 사제들이 베푸는 성찬식에 참석하였다. 그러면서 카라코롬의 네스토리안의 교리에 마니교(Manicheism)적인 부분을 발견하였고, 그들의 실제신앙생활에는 샤만적인(Shamanism) 것이 지배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카라코롬에는 네스토리안 교회는 1개가 있었고, 이교도 사원(아마도 사찰)은 13개, 모스크는 2개가 있었다고 하였다. 루브룩은 1254년 7월에 카라코롬을 떠났는데, 여행기(Itinerarium)를 기록하였다.

쿠빌라이(1215-1294)가 제5대 몽골제국의 대칸(1260-1294)이 되었고 1271년에 원조(Yuan dynasty, 1271-1368)를 세웠다. 그의 통치 때에는 첫째 계급이 몽골인이고 둘째 계급이 중앙아시아인과 페르시아인, 마르코 폴로와 같은 외국인이고, 셋째 계급이 북중국인, 넷째 계급이 남중국인이었다. 상위 두 계급은 각각 100만명인데 중국인은 7,000만명으로 약 3%가 97%를 지배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인 대부분은 상위 두계급으로 중국인에게로의 복음전파는 소수였다.

그래서 1368년 명왕조(Ming dynasty 1368-1644)가 세워졌을 때에 교회와 성도들은 힘을 잃었다. 그런데, 쿠빌라이는 기독교보다 티벳 불교에 더 호감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쿠빌라이와 네스토리안인 동생 아릭부케와 제5대 대칸을 두고 4년간(1260-1264)의 시민전쟁(Toluid Civil War)을 치렀다. 아릭부케 편에는 네스토리안인 몽케의 첫째 부인 쿠투타이와 수석 비서관 불가이, 차가타이가(家), 오고데이가(家), 오이라트족을 비롯한 몽골 고원의 귀족들이 가담하였다. 결국 쿠빌라이가 이겼다.

둘째, 몽골 동부와 만주에 근거를 둔 네스토리안 세례교인 나얀(Nayan) 칸이 1287년 깃발 위에 그리스도 십자가를 달고 차가타이 계열의 카이두(Kaidu, 오고데이 손자)와 연합하여 40만 명의 기병으로 쿠빌라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쿠발라이가 이겼다.

무슬림과 불교도들 등이 “보라! 당신들의 하나님의 십자가가 기독교인인 나얀을 어떻게 도왔는지를!”라고 조롱했을 때에, 쿠빌라이는 “나얀이 선을 행하지 않고, 정의를 배반하였기에 하나님의 십자가가 비호하지 않은 것이라”고 십자가를 모독한 사람들을 힐책하였다.

이렇게 기독교인들로부터 배반을 받은 쿠빌라이라 할지라도 많은 기독교인들을 등용하였다. 쿠빌라이의 초기 고문은 웅구트족 네스토리안인 랍반 소마(Rabban Sauma)의 아버지 쉬반이다. 또 다른 고문은 네스토리안 서아시아인 이사(Ai-se)로 한림원(Han-lin Academy)의 승지(承旨)가 될 정도로 두루 높은 관직에 있었다.
그의 다섯 아들도 모두 높은 지위에 올랐는데, 엘리야(Elijah)와 덴하(Denha), 흑총(Issa), 기와르기스(George), 루가(Luke)이다. 1277년 세르기스(Mar Sargis)라는 사마르칸트 출신이 관직에 있으면서 6개 네스토리안 교회를 세웠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65-1323)는 여행을 하면서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의 존재에 대하여 동방견문록(The Travels of Marco Polo)에 자세하게 이야기해 놓았다.

마르코 폴로는 1271년에 베네치아(Venice)를 떠나 3년만에 중국에 도착하였고 1295년에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그는 지금의 서안지역과 곤명, 운남, 양주, 항주, 푸주 등 흩어져 있는 기독교인이 모두 70만명 이상으로 추정하였다. 푸주(Fugiu)는 당시 콘차 왕국의 수도로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 마르코와 그의 숙부인 마페오가 기독교인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읽고 있는 것은 시편이었고 예배당에는 주님의 70인 제자 중 3명을 그린 화상이 그려져 있었다고 하였다.

이 세 명을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그 후로 700년 동안 이 교리를 믿어왔으나 오랫동안 그들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에 마르코와 마페오의 제안으로 쿠빌라이 칸에게 가서 기독교인의 교리에 정해진 모든 의식을 행해도 좋다는 문서를 교부 받았다.

그들이 700년 동안 믿어 왔다고 한 것은 당 왕조(Tang dynasty, 618~907)의 네스토리안 사제 아나본(Alopen) 일행이 635년에 들어온 때부터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세 명은 사도 도마(Thomas)의 제자인 아다이(Addai, Thaddeus)와 아다이의 제자인 아가이(Aggai), 마리(Mari)를 추측케 한다.

이처럼 쿠빌라이 대칸의 몽골제국 원조 때에 네스토리안 외방대주교구가 몽골제국의 수도 칸발릭(Khanbaliq, Peking)에 세워졌을 정도로 복음전파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몽골제국의 고위직에 오른 네스토리안인들은 중국인들에게 기독교 리더십을 전수하지 못함이 아쉽기만 하다.

필자: 최하영 목사
/ hydavidcho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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