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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몽골 제국의 네스토리안

[실크로드와 복음루트] 최하영 목사/ GMS 우크라이나선교사 |

(12회) 초기 몽골제국 네스토리안 왕후들과 관료들 |

11세기 초 케레이트족의 마르쿠즈 칸(Marghuz Khan)과 그의 부족 남자 20만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 마르쿠즈 칸의 손자인 토그릴(Toghril, Ong Khan, 1131~1203)도 당연히 네스토리안 3대 신앙의 계보를 이어갔다…

네스토리안 기독교(Nestorian Church)는 431년 에베소 공회때에 분열되어 나와 사산제국(226~651)안에서 실크로드따라 북방 유목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7세기 이후 이슬람의 확장 속에서도 네스토리안 선교적 외방대주교구 제도를 통해 북방 투르크 몽골계(Turko-Mongolian) 유목민인 케레이트족(Keraite)과 나이만족(Naimans)과 메르키트족(Merkits), 키르기즈족(Kyrgyz), 옹구트족(Ongut) 등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특히 11세기 초 케레이트족의 마르쿠즈 칸(Marghuz Khan)과 그의 부족 남자 20만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 마르쿠즈 칸의 손자인 토그릴(Toghril, Ong Khan, 1131~1203)도 당연히 네스토리안 3대 신앙의 계보를 이어갔다. 그 토그릴이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Yessugai, 1134~1171)와 의형제를 맺었고 예수게이의 사후 칭기즈칸(Ghinghiz Khan, 1160~1227)과도 의부자를 맺었다. 또한 칭기즈칸은 토그릴의 동생 자하감보(Jakha-gambu)와도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

자하감보에게 믿음 좋은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인 세 딸이 있었다. 첫째 딸 이바카 베키(Ibaka-beki)는 칭기즈칸의 아내가 되었다가 칭기즈칸의 충실한 신하 주르체데이(Jurchedei)의 아내가 되었다. 둘째 베크투트미쉬(Bek-tutmish)는 칭기즈칸의 장남 조치(Jochi)의 첫째 부인이 되었다. 셋째 소르각타니 베키(Sorghaghtani Bekhi, 1190-1252 )는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 톨루이(Toluy, 1190-1232)의 아내가 되었다. 톨루이와 소르각타니 베키 사이에 큰 아들 몽케(Möngke, 제4대 대칸)와 둘째 아들 쿠빌라이(Qubilay, 제5대 대칸), 셋째 아들 훌라구(Hulagu, 일 칸국 건국자), 넷째 아들 아릭 부케(Ariq Buke, 기독교인들의 후견인)를 두었다.

칭기즈칸이 1204년 나이만(Naimans) 지역을 정복한 후, 네스토리안 나이만 장군 타타통가(Tatatonga)를 등용하여 그의 네 아들에게 소그드인들이 만들어 주었던 위구르어를 가르치도록 했다. 이러한 칭기즈칸의 결정은 몽골제국의 공식어가 위구르어가 되게 했다. 또한 메르키트족 네스토리안 친가이(Chinqay)를 서기관직을 담당하게 하였다. 친가이는 칭기즈칸의 손자 제3대 대칸 구유크까지 제국의 수석서기관(protonotary)으로 행정 책임을 맡았다.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데이(Ogodai, 1227-1241)가 제2대 대칸이 되어 웅구트족(Onghut) 마씨 가족인 마경상(馬慶祥)의 세 아들 삼달과 천민(天民), 요하난을 카라코룸의 관리로 임명하였다. 14세기 그의 후손인 마조상(馬祖常)은 마경상(馬慶祥)을 추모하는 신도비(禮部尙書馬公神道碑)에 네스토리안에서 사용하는 기독교인 이름 일부가 들어있어 그를 통해 네스토리안파(경교)를 믿어온 집안임을 추론할 수 있다. 즉 審溫(Simeon)과 保六賜(Paul), 雅吉(Yakob), 易朔(Jesus), 祿合(Luke) 등이다.

오고데이의 장남 구유크(Guyuk, 1241-1248)가 제3대 몽골제국의 대칸이 되었는데, 나이만족(Naiman)이며 네스토리안인 어머니 투레게네(Töregene Khatun)의 신앙을 본받았다. 구유크의 두 아들의 이름은 노아(Noah)와 큐차(Khu-cha)였다. 로마 가톨릭의 최초 아시아 선교사이며 앗시스의 프란시스(Francis of Assisi)의 제자인 플라노 카르피니(G. Plano Carpinis, 1182-1252)에 의하면, 대칸의 개인 성직자는 네스토리안이었으며, 항상 이동하는 칸의 큰 천막 앞에 네스토리안 예배당이 있어 정해진 예배시간을 알리기 위해 공개적으로 찬송과 나무판을 두드렸다고 하였다.

구유크는 가족들의 신앙을 위해 기독교 물품들을 공급해 주었다. 또한 네스토리안인 카닥은 구유크가 어렸을 때부터 후견인(atabeg)이었고, 후에 제국의 전체를 관할하는 장관(procurator)이 되었다. 바르 헤브라에우스(Bar Hebraeus)에 의하면, 구유크의 왕실에는 네스토리안의 사제와 수도사들이 많았다고 하였다.

카르피니는 1246년 8월 24일 카라코룸(Karakorum)에서의 구유크의 즉위식에 참석하여 교황(Innocentivs IV)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카르피니의 몽골인의 역사(Historia Mongalorum)에 의하면, 구유크의 즉위식에 2명의 네스토리안 사제들을 포함해서 4천 명의 사절들과 대사들이 참석했었다고 하였다. 그들 중에 셀죽크(Seljuk) 술탄과 러시아의 대공 야로슬라브(Jaroslav; Alexander Nevski의 아버지), 중국과 고려 왕자들도 있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페르시아의 역사가 주바이니(Juvaini)에 의하면 구유크 치세때에는 기독교가 번영하여, 무슬림들은 감히 목소리를 높일 수 없었다고 하였다.

카르피니는 1247년 겨울에 리옹(Lyons)에 있는 교황에게 구유크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그 친서의 내용 중에 “… 당신은 우리에게 종속관계를 제안하였다…이러한 요구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은 마자르인들(Magyars)과 다른 기독교인들의 영토(가톨릭이 아닌 지역)를 공격하였는데…그들의 죄가 무엇인지 나에게 말하라…그리고 당신이 말할 때, “나는 기독교인이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심문도 하고 멸시도 한다”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께 기뻐하는 자와 그의 은혜를 분배한 자들을 아는가?…당신 스스로 군주들의 수장(구유크)에게, 예외 없이 당신의 모두가 좀 더 부드럽게 우리게 섬기려 와야만 하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하였다.

서아시아 주둔 몽골군 사령관 엘지기데이가 1248년 제7차 십자군(1243-1254)에 출정한 프랑스 루이 9세(Louis IX)에게 구유크와 그의 어머니 투레게네, 자신이 모두 세례교인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엘지기데이가 루이 9세에게 보낸 친서에 “…우리가 지금 이곳에 온 것은 기독교의 이익과 안전을 위함이라고 하면서 천하의 왕(구유크)께서는 라틴파와 헬라파, 아르메니아파, 네스토리안파, 야곱파 등 십자가를 향해서 기도하는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하면서 그들을 구분하지 말고 기독교인들에게 똑같이 자비를 베풀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이에 프랑스의 루이 9세는 이동식 예배당을 준비하여 롱주모(Andre de Lonjumel)를 단장으로 하여 사절단을 1249년 1월 27일에 보냈다.

칭기즈칸의 네번째 아들 톨루이와 그의 아내 소르각타니로부터 몽케와 쿠빌라이, 훌라구 아릭부케를 두었다. 이에 동시대에 살았던 바르 헤브라에우스는 소르각타니에 대해 “…이 여왕 은 아들들을 잘 훈련시켰다. 그녀는 헬레나(Helena, 콘스탄틴의 아내)처럼 성실하고 진실한 기독교인이었다….”고 하였다. 카르피니는 그녀에 대하여 말하기를 “타타르족 가운데 이 부인은 황제의 어머니(투레게네)를 제외하고는 가장 명성 있고 (바투)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보다 더 강하다”고 하였다. 그녀의 남편 툴루이(Tolui)가 42세로 일찍 죽자, 대칸 오고데이(Ogetai)는 이 과부를 그의 아들, 즉 나중에 제3대 대칸이 되는 구유크(Kuyuk)와 결혼하도록 제안하였으나 소르칵타니는 “나는 네 명의 아들들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사려 깊게 사양하였다.

한 세대 후에 무슬림 역사가 라쉬드 알딘(Rashid al-Din)은 “…그녀는 매우 지성과 능력을 가졌으며 세상의 여인들 중 가장 뛰어났다.… 그녀는 그들의 교육에 큰 수고를 했고, 그들에게 다양한 성취와 좋은 태도를 가르쳤고 그들 가운데 조금도 싸울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녀의 지성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아들들의 위치를 그들의 사촌들 위로 올려놓았으며 그들이 칸과 황제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기록하였다.

페르시아의 역사가 주베이니(Ata-Malik Juvayni)도 “소르칵타니 베키가 일족과 친척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고, 군인과 이방인들에게도 아낌없이 베풀어 그녀의 뜻에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과 영혼 속에 그녀에 대한 애정을 심어주어서, 제3대 구유크 칸(정종)이 사망하자, 대부분 사람들은 왕국의 열쇠를 그녀의 아들인 몽케에게 맡기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렇게 칭기즈칸부터 제3대 구유크까지 네스토리안 기독교가 이 제국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기독교 왕후들과 관료들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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