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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8년, “이제 한길로 갑니다.”

[유크시론 213호]  이창배 발행인 |

이달을 여는 창: 2019-9월호 사설 |

오늘까지 유크가 계속됨에 감사한다. 이제부터는 19년 차가 됐다. 그 지나온 햇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이제도 주님의 뜰 안에서 자라는 백향목처럼 묵묵히 뿌리를 생명의 근원에 내리고 있음이 중요하다. 다시금 창간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다짐한다.

지난 2001년 9월 창간호를 낸 본지의 역사가 이번 달로 열 여덟 해째를 채웠다. 언제 이렇게 됐는지 잠깐인 것만 같았는데, 그동안 한 회, 한 회씩 횟수를 거듭해 오며 모아둔 신문을 50부를 한 묶음씩 엮고 보니, 그 두께도 제법 두껍고 무겁다. 잠시 짬을 내어 창간호부터 찬찬히 넘겨보니, 한참을 잊고 있었던 그때그때의 색바랜 기억들이 머리를 맴돈다.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속에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또 헤어졌다. 이미 고인이 된 분들도 꽤 있다. 아니 이제는 너무 연로해 거동이 불편한 분들도, 독일과 유럽을 떠나 여러 나라로 흩어진 분들도 떠오른다. 해묵은 사진, 퇴색된 신문지에 거칠게 인쇄된 옛 사진들에서 왠지 정감이 묻어난다. 억척같이 신문발행을 해왔다고 해야 할까, 주어진 내 사명이려니 하는 의지만으로 여기까지 오면서, 지금 이 시각도 신문발행을 위해 편집작업을 하는 나의 나 됨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었다.
시간과 더불어 세월은 그렇게 흐르는가 보다. 희끗희끗 머리에 돋아난 새치가 한 가닥씩, 두 가닥씩 늘어나더니만 이제는 헤아리기조차 어렵게 되었다. 수 년 전 부지불식간 겪었던 면역력 결핍,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통제할 수 없었던 몸의 이상증세로 말미암아 시작된 호흡기 질환으로 급속히 생사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절정에 다다르게 됐을 때, 이대로 모든 것의 끝이 다가왔다는 생각이 났다. 그때 가졌던 자괴감은 이렇게 오기까지 아무런 준비도, 대책도 마련해 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어떻게 하고, 문서 사역은 또 어떻게 해야 하나? 갑자기 내가 사라지고 나면 누군가 나서겠지라는 막연한 기대 외에는 그 어떤 뾰족한 수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에서 또 나에 대해 크게 실망을 해야 했다.
그야말로 무작정 달려오면서 그 뒷감당은 주님의 몫이라고 여겼던가 싶다. 뒤로 남겨질 가족에 대한 배려도, 교회 후임에 대한 대비도, 미디어 문서 사역을 마치는 일도, 마치 그러한 일이 내게 일어나리라고는 감히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런 불순한 생각을 버리는 것이 충성된 종의 본분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어리석음이 아니었던가, 깊이 성찰했다.

다시 살게 된 그 은혜로
정말로 위급했을 때, 그 새벽녘에 환상 가운데 부르신 주님을 뵙고, 그다음 날 엇비슷한 시간에 다시 꿈을 꾸게 됐다. 그 꿈속에서 보니, 내 모습은 어깨에 큰 가방을 둘러맸는데, 그 속에는 너덜너덜해진 커다란 신발 두 켤레, 성경책 한 권이 들어있었다. 마침 가방을 검색하는 경찰관이 내 발과 가방 속에 든 큰 신발을 비교해 보고는 “이거는 분명히 당신 것이 아니지!” 하면서 거둬갔다. 그러고 보니 이미 나는 너무나도 몸에 꼭 맞는 가벼운 옷차림을 했고, 발에는 딱 맞는 깨끗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두 켤레 신발을 빼앗긴 가방 안에는 성경책 한 권만이 달랑 남았다. 너무도 뚜렷하게 각인이 된 그 환상과 꿈을 경험하고부터 치료에 대한 소망이 확신을 얻게 됐다. 그 후로 치료와 회복이 차분하게 이뤄지며, 2년에 걸쳐서 몸이 회복되어왔으니, 할렐루야 감사뿐이다. 참 감사하다.
이렇게 최악의 상황 속에서 다시 살 게 된 그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이제 남은 생애는 내 삶이 아닌 주님의 것으로 살기로 했다. 그러니 몸을 불사를지라도 목숨 바쳐 남은 생애를 살겠다고 마음을 다지며 지난 2년여를 그렇게 뛰며 살았다. 그런데 그것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것을 최근 깨닫게 됐다.
우리 주님은 분에 넘치는 헌신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적정선의 도를 넘는 충성을 요구하시는 분도 아니시다. 단지, 그분의 앞에, 그분의 눈길을 벗어나지 않는 삶을 바라신다. 내가 만나 뵌 그분이 내게 요구하신 명령이었다.
그렇다. 집 앞뜰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를 본다. 지난 10여 년을 줄곧 보아왔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다. 사시사철 변하는 계절에 따라 어김없이 그 잎새를 내고, 또 떨군다. 샛노란 싹에서 짙푸른 녹색으로, 다시 갈색으로 낙엽이 되기까지 단 한 번도 그 자리를 벗어난 적도, 그 모습을 달리한 적도 없다. 단순하다 못해 정직하다. 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라고 고백한다. 흔들림 없이 주님 앞에서 나 됨을 지켜내는 그 삶이 아름답지 않은가?

유크 미디어 사역에 집중키로
결국 그 본질을 이루는 나는 나일 텐데 환경을 따라서 너무도 많이 흔들리고, 옮기고 하는 그 가벼움이 문제이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시1:3-4). 시냇가에 옮겨져 심어진 나무가 복이 있다고 하고, 뿌리가 없어 바람에 따라 이러저리 불려다니는 것을 복이 없다고 구별한다. 과연 우리네 삶이 주님의 손길로 옮겨져 생명의 시냇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복 된 삶을 누리는 것일까 고민해 왔다.
사실, 앞에 기술한 대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처해보며 얻게 된 결론은 그동안 바쁘고, 힘겹고, 그러나 해야 한다는 사명과 의무로 담당하고자 했던 나의 사역들을 돌아보는 것이었고, 더 늦기전에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깔끔하게 매듭을 짓자는데 이르렀다. 그리고 그 첫걸음으로 다음 달부터 유크 미디어 부분으로 새 출발을 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동안 다름슈타트 아름다운 교회의 목회 사역과 궤를 같이해 온 문서선교 사역 가운데 유크 미디어 사역으로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적으로 이 두 가지의 사역이 모두 만만치 않은 일이고, 또한 이 두 사역 가운데 어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래서 나름 많은 고민과 기도를 거듭한 끝에 다름슈타트 아름다운 교회에 담임목사직 사임을 택했다. 이로써 올해 중으로 후임 목회자를 세워 목회 사역을 이양하고, 오는 10월부터는 새 주소지에서 유크를 발행하게 된다.
오늘까지 유크가 계속됨에 감사한다. 이제부터는 19년 차가 됐다. 그 지나온 햇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이제도 주님의 뜰 안에서 자라는 백향목처럼 묵묵히 뿌리를 생명의 근원에 내리고 있음이 중요하다. 다시금 창간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다짐한다.

이달의 말씀 ㅣ마태복음24:44-45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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