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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잊지 말자. 저버리지 말자.

[유크시론 212호]  이창배 발행인 |

이달을 여는 창: 2019-7월호 사설 |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케노시스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을 입었다. 이 은혜를 잊지 말자. 저버리지 말자. 그러기에 나만을 위하여 사는 삶인가, 멸망 길에서 구원해주신 그 은혜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인지를 돌아보자. 이 뜨거운 계절에…

연일 무더운 날씨가 이어진다. 일찍이 독일에서 겪어보지 못했던 한낮 섭씨 40도를 오가는 기온이다. 그나마 습도가 낮아 그늘에 들어가면 약간은 더위를 누그러뜨릴 수 있어 다행이다. 아무리 뜨거워도 피할 길은 있는 법인지 무더위를 피하는 나름의 피서법을 체득하는 중이다.
엊그제는 길을 지나다 자그마하게 조성해놓은 도로변 화단에 물을 뿌리고 있는 시청 용역회사 직원들을 보았다. 이름도 모를 들꽃들이 어우러져 올망졸망 피어나는 모습을 오가며 지켜보는 즐거움도 제법이었는데, 그렇게 아름답던 들풀이 생기를 잃어버린 채 한낮의 뜨거운 햇빛에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려니 마음도 안쓰러웠다.
사실, 여름이면 귀에 익숙하게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가 사라진 것도 언제인지 모르겠다. 이곳이 독일이라서 매미 소리가 안 들려지는 것도 그러려니 했더니 언제부터인지는 창가의 나무에 앉아 때때로 시끄럽게도 울어대던 새소리도 한낮에는 들려오지 않는다. 더위에 지쳐 노래도 시들해졌는가 싶다.
지난 20년 독일 생활을 통해 나름대로 체득한 독일 날씨라는 고정관념이 깨진 것도 최근이다. 예전처럼 흐린 날씨, 구름 낀 하늘을 보는 날이 점점 희박해진 채 구름 없는 파란 하늘을 보게 되고, 지중해변에서나 느껴볼 법한 뜨거운 햇살을 종일 쪼일 수 있으니 세월이 아주 수상한 것인지, 기후변화의 심각성인지를 무론 하고 연일 달궈지는 무더운 날씨를 매일 접하며 산다는 사실이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연이은 기록적인 폭염으로 인한 안전문제가 대두되자 독일 정부가 최저 일부 구간에서 최대 속도를 시속 100km~120km까지 제한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관련해서 기상학자들은 독일에서 발생한 기록적인 폭염의 원인을 지구온난화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대서양에서 차가운 공기를 가져다줄 제트기류가 약해지면서, 오히려 사하라 사막에서 발생한 난류가 서유럽까지 유입돼 더위가 지속되고 있다는 분석을 덧붙임으로써 올여름은 생각보다 더 뜨거워질 모양이라는 우려를 낳게 한다. 하지만 걱정은 말자.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여름은 여름일 뿐이다. 당연히 여름은 덥고, 뜨겁다. 그게 제격이다. 어떻든 여름을 견디어내는 건 결국 내 몫이고, 각기 주어진 삶의 무게가 아니던가?

요나의 마음
때로는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로 인하여 스스로 괴로움을 짊어진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그는 요나이다. 원수 된 민족의 도성, 니느웨의 구원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선지자였다. 그 이유야 분명했다. 원수 된 백성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그들의 죄악을 외쳐, 악독을 버리고 회개해 구원을 받으라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요나는 큰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가 비로소 회개를 했다. 밤낮 삼 일을 사망이 둘러친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다. 그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하여서 그는 물고기 배 속에서 벗어났다. 예수님 부활의 모형이 된 요나이다. 결국 니느웨로 가게 된 요나는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외치며 거리를 다녔다. 이 외치는 소리에 왕이 회개하고, 그 백성과 짐승에 이르기까지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할 강포에서 떠나라고 명했다. 그들이 힘써 행하는 모양을 보시고 하나님은 정하신 뜻을 돌이키시고 재앙을 거두시고 말았다.
그런데 요나는 바보였던가? 아니면 너무나 솔직했던가? 그가 원치 않았던 결과를 가져온 니느웨의 구원이 못마땅했다. 그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기를 바랐다. 정말로 이런 악독한 백성들은 마땅히 심판을 받아 없어져야 함인데, 이들을 구원받도록 역할을 한 자기 스스로가 너무 미웠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에게도 감히 따졌다. “이제 원컨데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는 더 나음이라”고 투정 부렸다. 요샛말로 성깔을 부렸다. 그런 요나에게 하신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심은 감동적이다. 참으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정말로 기뻐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하는 가이다. 마음에 가득 찬 미움을 벗겨내지 못해 그 원수 된 백성이 끝까지 멸망을 받아야 속이 풀릴 것처럼 바라는 요나의 마음과 그들의 돌이킴과 구원을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마음
중동 지역의 뜨거운 햇빛 아래서 초막을 짓고 앉아서 니느웨성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괴롭게 지켜보는 요나, 그나마 큰 박넝쿨이 있어 그늘을 형성해 머리를 가려주니 얼마나 시원했던지, 그것을 요나가 유일하게 기뻐했다. 참 인간의 간사함이 이런 것이다. 여전히 내 중심적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결과만 바라는 것에서 좀처럼 벗어날 줄 모른다.
생각해봐도 아이러니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뤄진 것을 보는 게 정녕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아니, 당연히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이 신성한 사명으로 띠를 띄우고 목회자로, 선교사로, 각양 신분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또 보내신 것이 아닌가? 그러기에 춥다고, 덥다고 투덜거리지 않고, 처한 곳이 그 어디든지 하늘나라라고 고백하며 살지 않는 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여전히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로 인하여 성내고 자포자기하는 선지자 요나의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보라. 잠시 번성했다가 곧 시들어 말 라버라는 박넝쿨, 벌레에 갉아 먹히고 말 박넝쿨에 의존해 마음이 기뻤던 요나의 실망은 또 어떤가? 다시 또 죽기를 구하지 않던가이다. 뜨거운 태양 빛을 가릴 수 없어 그 괴로움으로 말미암아 살기보다 죽는 게 차라리 났겠다고 하는 이율배반 성을 보게 된다. 요 작은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진 고집덩어리의 궤변이 아니라면 또 무언가 싶다.
그런 요나, 아니 요나와 같은 나에게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냐 하시니라”(욘 4:10-11) 말씀하신다. 곧, 하나님의 마음이시다. 이 마음을 알자. 힘써 알아야 한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케노시스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을 입었다. 이 은혜를 잊지 말자. 저버리지 말자. 그러기에 나만을 위하여 사는 삶인가, 멸망 길에서 구원해주신 그 은혜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인지를 돌아보자. 이 뜨거운 계절에.

이달의 말씀 ㅣ빌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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