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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그 본질로 돌아가자

[유크시론 206호]  이창배 발행인

이달을 여는 창: 2019-1월호 사설

새해에는 어찌하든 ‘예수 그리스도’ 그 본질로 돌아가자. 그 길은 자기를 비우는 케노시스의 길이다. 비우고서야 얻어지는 “심령의 낙”을 누리자….

새해가 밝았다. 어둡고 답답했던 마음에 왠지 서광이 깃드는 것 같아 마음이 괜스레 좋다. 이 좋은 기분이 한 해 동안 내내 지속하기를 소망해 본다.
지난 연말, 성탄절을 보내고서 뭔가 뜻있게 송구영신하고자 이런저런 불필요한 것들을 찾아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일 년 동안 컴퓨터에도 쌓인 정크 파일이라는 것들이 꽤 있다. 컴퓨터가 지닌 한계용량에 거의 다다를 만큼 이런저런 잡다한 것에 이르기까지 프로그램도 많다. 사실 일 년 내내 단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채 컴퓨터의 용량만 차지하고 있는 소위 앱이라고 하는 애플리케이션들이 마치 옷장에 넣어둔 채 아끼고 아껴서 한번 입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보관된 채 장롱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옷처럼 말이다.
이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정리할 시기를 놓친 채 묵히고 있는 상당한 것을 막상 버리자니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기에 망설이고 또 망설이는 내 모습이 꽤 어쭙잖다. 일단 버리고 나면 끝이라, 그게 꼭 필요할 때는 어쩌지 하는 심사다. 언젠가 단 한 번의 필요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때를 위해 두어야 할지 몰라서 하는 마음으로 갈등도 쌓인다. 그렇다고 정리를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두기엔 컴퓨터가 작동될 때마다 메모리 용량이 딸려서 뻐걱거린다. 예전보다 작업속도가 현저히 떨어지니 어찌하든 정리를 하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눈을 딱 감고는 열심히 컴퓨터 청소를 했다.
그 결과는 한결 좋아졌다. 이전보다 컴퓨터가 구동되는 시간이 빨라지고, 프로그램 하나를 여는 시간도 많이 향상됐다. 제 역할을 못 하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수많은 파일이 정리되는 서운함에 비례해서 얻어진 결과는 그래도 이만하면 잘했다는 안도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정리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마음도 든다. 한 발자국 더 나가서 차제에 더욱 과감히 불필요한 파일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용기도 생겨난다. 그만큼 불필요한 것들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비워내면 낼수록 정작, 이 컴퓨터가 필요한, 아니 내가 이 컴퓨터로 하고자 하는 본연의 일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게 내게는 즐거움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심령의 낙을 누리자
이를테면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라는 전도서 2:24의 말씀이 있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에 그만큼 누리지 못한 것이 “심령의 낙”인 것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올해엔 누려야겠다는 마음이 새록새록 드는 것도 바로 이 “심령의 낙”이다.
전도서를 대표할만한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바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라는 말씀이다. 수천 년 전 솔로몬 왕이 했던 대로 “해 아래에서” 했던 고민이나 내가 하는 고민이나 매한가지가 아닐까 싶다. 사람이라면, 한 번쯤 누구나 세상을 변혁시키고 싶은 꿈, 한번은 뒤집어버리고 싶은 꿈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세상이 크게 달라질 것이 있던가? 없다. 거기로부터 나라는 한 개인은 미미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체득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그렇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능력 있는 왕이 전쟁에서 승리해 영웅이 됐다고 해보자. 그것이 지금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고대 로마의 혁혁한 유물과 유적지를 돌아보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나만이 그럴까? 정확한 표현일지는 몰라도 말하자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냥 지나간 역사에 한 페이지쯤 남겼을 뿐, 지나가고 나면 그도 한 시대일 뿐, 어차피 누군가가 될 주인공이었을 따름이다. 그런 사람은 역사를 따라 수없이 존재해왔으나 사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 그냥 무대의 주인공만 바뀐 채 역사는 그저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왔다.
그 본질에서 인간은 여전히 인간일 뿐이다. 바뀐 것은 없다. “Cogito, ergo sum/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고 <성찰>에서 데카르트가 표현한 인간이란 존재다. 솔로몬이 고백하듯이, 뒤돌아보니 내가 애써 구했던 그 모든 것은 바람을 잡는 것처럼 다 헛된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귀중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전 2:11) 그래서 도달한 결론이 “결국 나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고, 자기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란 말로 맺어지는 걸까?

하나님께 달려있다
솔로몬의 인생론은 전도서 2장에서 갈무리 되지 않는다. 그가 내린 결론은 아마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3:11) 여기가 될 것이다. 이 말씀에 들어있는 핵심적인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 모든 것이 제때 알맞게 맞아 돌아가도록 만드셨다. 또한, 사람에게는 이 신묘 막측한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주셨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시작하여 어떻게 일을 끝내실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으로 매듭져진다. 고로, 그 모든 매듭은 하나님이 짓고 맺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 하나 제대로 안 된다고 발버둥을 치거나, 손사래를 치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도 안 되는 것은 안 될 뿐이다. 누군가를 만나서 서로 심정을 토로하며 이야기를 했어도 여전히 현실은 그대로일 뿐이다. 좀처럼 상황이 바뀌거나, 나아지는 것도 없어서 나중에는 체념이 될 때까지 이르러서야 그 결과 또한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고백으로 묻어나게 된다. 처음부터 결론은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했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다.
사실은 나라는 존재 안에 들어있을 비본질적인 정크 파일이 문제이다. 컴퓨터에 문제를 일으키고, 혼돈을 빚게 만드는 악성 프로그램이 문제이다. 하도 쓸모없이 그냥 공간만 차지 있거나, 진작 버렸어야 할 쓰레기 오물을 그대로 간직한 채 애꿎게도 컴퓨터의 성능만 나무랐던 무지와 몽매함의 아둔함 탓이 아니던가? 그것이 인간이 쌓아 올린 지성과 이성과 교양과 양식이 과도해 탈을 낸 탐진치(貪瞋癡) 3독(毒)이다. 그 결정체가 바로 자기본위 편향성이다. “자기본위 편향(self-serving bias)이란 사람들이 성공은 자신의 개인적인 성향(dispositions)이나 기질 때문인 것으로 설명하고, 실패는 외부의 영향(external forces) 탓으로 돌리는 경향을 말한다.”라는 한국행정학회에 실린 박흥식의 글 타래에서 인용해 보면 분명해진다. 새해에는 어찌하든 ‘예수 그리스도’ 그 본질로 돌아가자. 그 길은 자기를 비우는 케노시스의 길이다. 비우고서야 얻어지는 “심령의 낙”을 누리자.

이달의 말씀 ㅣ 빌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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