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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칼럼

얀 후스 순교 600주년 기념 행사 소고

[프라하] 후스 축제 2015를 정리하며/ 유정남 선교사

복음의 진리 안에서 … 나는 오늘 기꺼이 죽을 것이오.”_얀 후스 (1371-1415)

체코는 7월5일을 ‘Cyril과 Methodius 선교사들의 선교기념일’, 이어 6일은 ‘얀 후스 순교 기념일’로 지키고 있는데, 금년에는 5일과 6일, 이틀 동안 ‘2015년 얀 후스 순교 600주년 기념 축제’로 체코 여러 지역에서 화려하게 열렸었다.

체코는 7월 5일을 ‘Cyril과 Methodius 선교사들의 선교기념일’, 이어 6일은 ‘얀 후스 순교 기념일’로 지키고 있는데 금년에는 5일과 6일, 이틀 동안 ‘2015년 얀 후스 순교 600주년 기념 축제’가 체코 여러 지역에서 화려하게 열렸다.

체코슬로바키아 후스교회 총 주교인 Tomas Butta는 이 날이 비극적인 사건이었던 후스의 죽음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에게 살아있는 후스를 기념하는 일이기에 “축제” 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그의 표현에 걸맞게 고풍스러운 문화의 중심지 프라하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에서는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축제로 활기를 띠었다. 프라하 ‘클레멘티눔 기상관측소’에 따르면 1775년 이후 금년이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도 체코인들의 역사와 교회 속에 살아있는 민족의 영웅, 종교개혁자 얀 후스 순교를 기념하는 축제 참가자들도 예상외로 그 수가 많았으며 함께하는 열기도 뜨거웠다.

축제의 주요 프로그램으로는 프라하 1 구시가지 광장에서 열린 개막제 및 퍼레이드, 프라하 1구역 오보츠니 뜨르흐(과일 시장)에서의 행사인 어린이와 부모들을 위한 마리오네트 인형극과 사극 등 종일 프로그램 진행, 패널토의-시리아 난민들을 위한 인도주의적 지원, 1391년에 설립된 베들레헴 채플에서 ‘마스터 얀 후스 순교 기념 감사 예배’ 개최, 성 미쿨라쉬 교회에서의 ‘역사적인 후스’의 최근 연구와 현재의 의미에 대해 발표, 살바토르 교회와 이종성찬이 처음 시행됐던 벽속의 마르틴 교회에서는 각각 ‘에큐메니칼 후스’와 ‘오늘날의 후스’에 대한 조명, ‘얀 후스와 함께하는 교회에서 교회로의 순례’, 강연, 연극, 음악회 공연, 대미의 장식으로 구시가지에서 블타바(몰다우) 강으로 향하는 밤 촛불 행렬 등 프로그램들을 다채롭게 선보였다.

후스 (체코어로 거위라는 뜻)는 누구인가?

그는 1371년 경 후시네츠(Husinec-거위를 키우는 마을이라는 뜻)라는 남 보헤미아 지방에서 가난하고 검소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유럽에서 1348년에 최초로 설립된 프라하 카렐 대학에서 인문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1396년 마스터 학위를 받은 후 교수, 1401년 사제, 1402년부터 베들레헴 채플 설교자, 1409년에는 총장이 되었다. 체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 저항했고 프라하 대주교 즈비녜크 자이츠 (Zbynek Zajic)의 후원을 얻어 프라하 대학교 내에서의 체코인의 권리를 신장시켰으며, 체코어의 정자법(正字法)을 확립(1406), 성경과 위클리프의 저작을 체코어로 번역했다.

14세기 카렐 4세의 통치(1346-1378)때와 그 이후 보헤미아 교회는 유럽 중에서도 가장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성직자들은 세속적이었다. 당시 능력 있는 설교자들이 교회의 세속화를 공격하고 보헤미아를 일깨웠다. 이러한 영적 긴장이 나타나고 있을 때 얀 후스가 교회의 부패에 대한 개혁을 시작했다. 관공서, 교회. 그리고 학교에서도 독일어를 사용했는데 그는 1402년부터 프라하 베들레헴 채플에서 체코어로 설교했으며 10년 이상 그곳에서 목회를 하였다. 민족적 자각이 싹트기 시작하던 시기에 그는 개혁적 설교로 많은 추종자들을 얻게 되었으며 체코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하였다. 보헤미아는 독일계와 슬라브계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슬라브계는 보헤미아의 자율을 열망했으며 후스의 등장은 그들에게 큰 힘을 실어 주었다.

후스가 화형에 이르게 된 원인은 교회의 세속화와 성직자의 타락에 대한 비판, 교황중심의 우주적 교회관에 반대하여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주장, 그리고 콘스탄스 공의회의에서 위클리프주의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공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자들은 유명론을 옹호했으나 후스는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실재론자였다. 또 다른 이유는 체코인들의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의식과 맞물려 후스를 보헤미아의 자유를 추구하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다 로마교회가 후스에 대하여 극도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중세후기에 교황과 성직제도, 가톨릭교회에 대항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지만 후스는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성서에 기초한 믿음을 지켰다. 후스는 공개적으로 교황의 면죄부 판매, 성직매매, 십자군 원정,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교황의 명령도 성경과 반대되면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해서 교회로부터 추방되어 2년간 지방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집필 활동을 했다. 이 때 쓴 그의 대표적 저술 중 하나가 1413년 라틴어로 완성된 교황 권력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담은 ‘교회에 대하여’ (De ecclesia)이다. 후스는 교회의 내적 본질을 강조했다. 교회를 ‘모든 예정된 자들의 몸’이라고 정의했으며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며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 개혁의 선구자요 체코 인들의 민족정신을 고양시킨 후스는 교황과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과 부패에 맞서 저항하다가 1412년 요한 23세에 의해 교회에서 파문당했다.

1414년 콘츠탄츠 공의회는 후스에게 소환장을 발부했고 후스가 그곳에 도착한지 3주 후에 체포했다. 그는 화형 당하기 전까지 감옥에서도 몇 소논문과 심금을 울리는 수많은 편지들을 썼는데 그중  “모든 신실한 체코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이에게 진리가 있도록 하십시오.”라는 문구는 1515년에 건립된 후스의 동상 앞에 새겨져 있다. “복음의 진리 안에서 … 나는 오늘 기꺼이 죽을 것이오.” 위대한 종교개혁가인 얀 후스(Jan Hus, 1371-1415)가 화형 당하기 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마지막 권유를 거절하며 한 말이라고 한다. 후스 화형 당일 머리에는 ‘이단의 주모자’라는 글과 마귀가 그려진 종이모자가 씌워졌다.

마침내 보헤미아의 개혁자, 체코민족의 영웅 후스는 진리 사수를 위해 1415년 7월 6일 이단의 누명을 쓰고 그의 나이 44세 때 용감하게 콘스탄츠의 화형대에서 죽어갔다. 개혁의 선구자일 뿐만 아니라 주체적인 민족정신을 고양시킨 후스가 체코인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도록 그의 유해는 가까운 강에 버려졌지만 그의 숭고한 정신과 민족애는 지금까지도 체코인들의 마음에 살아서 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체코 교회의 영적인 원동력이 되어왔다. 그리고 그의 개혁운동은 한 시대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16세기 종교 개혁을 가능케 한 이념적, 신앙적 토대를 제공했다.

후스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진리의 추구였다. 탁월한 신학자요 명 설교가인 후스가 화형되기 전에 남긴 글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열정적으로 탐구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증언하고 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를 들으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라! 진리를 지키라! 죽기까지 진리를 수호하라! 그것은 진리가 너를 죄와 악마와 영혼의 죽음과 마침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중세교회가 마지막 심판을 수행하는 절대권위로 인정되고 있을 때 후스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로마교회의 도덕적 타락과 진리왜곡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용기도 그에게는 성경이 유일한 권위였고 그의 교육과 삶의 지표였기 때문이었다.

금번 축제는 후스가 역사와 교회와 사회 전반에 걸쳐 우리에게 남긴 그의 유산을 만날 수 있도록 다면적으로 준비된 행사라고 할 수 있겠다. 교수, 종교개혁가, 저술가, 대중적 설교가, 백성들의 교사와 찬송가 작사자로 명성을 떨쳤던 후스의 성경 중심의 개혁사상은 ‘모든 권위는 거룩한 성경으로부터 오며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임을 천명했다. 그리고 교회와 사회에 하나님 말씀이 세워지도록 교육과 설교를 통해서 개혁운동, 각성운동, 신앙정화운동을 펼쳤으며 진리와 사랑과 정직과 화평의 삶 속에서 믿음이 들어나도록 성도들을 일깨웠던 삶으로 개혁을 이루어 낸 믿음의 위인이었다.

후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만나는 그의 숭고한 정신은 오늘날 빠르게 진행되는 세속화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물질 지상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기준에서 성도의 믿음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후스 축제 2015” 소고를 읽는 독자들 역시 성경의 진리를 죽기까지 지키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역설하고 도덕적 책임과 진리 수호의 상징이었던 개혁의 선구자 후스의 사상과 인격과 삶을 통해서 감화되고 도전 받기를 바라면서 마친다.

youchnam필자/ 유정남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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