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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변화의 중심은 바로 나

[유크시론 209호]  이창배 발행인

이달을 여는 창: 2019-4월호 사설

오늘 굳세게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 하는 가치 체계가 당신에게 무엇인가? 손아귀에 단단히 움켜쥐고 풀지 못하는 욕망의 실체가 무엇인가? 바로 허욕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해답도 간단하다. 이렇게 4월은 선뜻 우리 앞에 펼쳐진다. 고난 뒤에 찾아오게 될 부활의 달이다. 고난과 역경을 인내하는 순종의 길에서 아름다운 봄의 향연이 펼쳐진다…

봄바람이 분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화들짝 목련꽃이 피어난다. 가로수에 벗꽃이 만개한다. 싸리꽃이 바람결에 하얀 눈가루처럼 흩날린다. 이렇게 4월 첫날이 시작됐다.
따스한 햇볕이 화사하게 봄날을 빛나게 한다. 어두 칙칙한 겨울 티를 벗어내는 일도 초속이다. 온통 보이는 곳마다 생명의 빛이 창연해진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아침과 저녁이 달라진다. 도통 벗겨질 것 같지 않았던 우중충한 하늘이 활짝 열려 시원스레 푸른 하늘로 저 높이 창공까지 뚫렸다.
계절이 바뀌면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세상은 바뀌게 된다. 어느 누가 수고를 더해서도 아니다. 어느 누가 그리하라, 말 할 것도 없다. 독일 말로는 무쓰(muss)라고 한다. 영어로 머스트(must)라고 하는 말 그대로 모든 게 저절로, 그리고 반드시 이뤄진다.
나무는 새싹을 내고, 들풀은 꽃을 피우고, 저마다 생명은 연분홍색, 자색, 하얀색, 노란색, 보라색으로 울긋불긋 세상을 수놓는다. 꽃대신 잎을 내는 나무는 살포시 연두색 그 엷은 초록색을 덧입는다.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 있을쏜가.
하루는 운전하는데, 무심결에 온도계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바깥 온도가 18.5도 씨(C)를 가르친다. 이건 초여름의 기온인데 하는 의문도 잠시, 그렇게 자연은 변화를 만들어간다. 놀랍지 않은가?
어쩜 사람만이 둔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생각은 있는데, 지식과 경험도 있는데, 계절과 자연의 변화를 바라보는 눈은 있는데, 여전히 사람이란 존재는 참 변화가 어렵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그만큼 계절과 자연의 변화를 체험했을 것이건만 자신을 변화해가는 일만큼 어려운 게 없으니 말이다.
나이를 먹으면 몸에서 시큼털털한 냄새가 난다고 한다. 꼭 남이 코로 맡는 냄새가 아니라도 사실은 자신이 느껴지는 그런 체향이리라. 창문을 열면 시원한 봄바람이 싱그러울 법 한데, 왜그런지 창문 한 번 여닫는 일이 귀찮고, 바깥세상은 봄날이 되던지말던지 감흥은 점점 둔해지고, 생각도 더이상 깊어지지 않은 채 그저 멍한 상태로 앉아있는 시간이 점차 많아지는 그런 나이인가? 밖으로 나돌아다니며 웃고 떠들 시간이 점점 시들해지는 그런 세대들에게 봄은 절실하게 다가온다. 변화하라. 변화하라. 소리친다.

변화하라. 변화하라…
어디에서 많이 듣던 말이 떠오른다. 수구꼴통이라는 말. 참 들어주기 불편하고, 두 번 이상 듣기 싫은 말이다. 그 말의 함의가 바로 변화를 거부하는 완강함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자신 스스로를 거슬러 변화를 거부하는 모든 세대는, 그가 젊은이던지 노인네던지 막론하고 모두 수구꼴통이 아니겠는가? 세상은 변화하라고 틈만 나면 외치는데, 그 소리에 귀 막고, 눈감고 산다면 왜 사는가 그게 끝내 의문이지 않겠는가?
봄은 봄대로 외치고, 여름은 여름대로 외치고, 가을은 가을대로 외치고, 겨울은 겨울대로 외친다. 아니 낮은 낮대로 말하고, 밤은 밤대로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무슨 쇠고집인지, 도대체 자신의 고정된 사고의 틀을 바꾸려 하지 않는 사람의 됨됨이가 이렇듯 봄이 오면 더욱 아쉬워진다.
말씀으로 보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4).
이는 곧, 자연을 통해 전하려는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고, 변화를 배우고, 대자연 앞에 자기를 발견하여 결국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세상은 더더욱 거꾸로 간다. 점점 더 불신의 세대가 늘어만 간다. 도처에 메말라버린 인성문제로 고통에 겨워서 내지르는 신음소리가 지천에 깔리고 있다. 혹자는 미세먼지를 가리켜 독가스라고까지 경고한다. 결국 인간 문명이 만들어낸 재앙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 깊숙이 부질없는 욕망과 욕심이 만들어내는 어둠의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다. 그 어디에든 약육강식의 정글법칙이 지배한다.
변화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주 되심을 부인하는 이 세상이 갈 곳은 어디인가? 그 끝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소위 마지막 때라는 시간적 한계가 보다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가녀린 바람결에도 파르르 떠는 초봄, 갓 피어난 꽃잎에서 그 두려움을 맛보게 된다. 바꾸어야 할 시간이다. 창조의 순리를 회복해야 할 타이밍이다.

부활의 기쁨으로 가는 길목
사순절의 후반부를 맞이하고 있다. 이제 두 주 후면 부활절을 맞게 된다. 세상은 한창 시작된 봄이 구가하는 생명의 찬가로 분주하건만 도리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으로 간구하시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떠오른다. 바로 그 시각, 덮여오는 졸음을 쫓아내지 못해 안간힘을 쓰다 결국은 잠에 떨어진 제자들의 모습도 오버랩된다.
깨어 기도할 수 없더냐? 하시던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비탈진 언덕, 돌무더기로 고른 땅이 없는 올리브 밭, 그 골짜기 어드메쯤에서 그나마 편한 자리를 차지하고 머리를 처박은 체 잠들어버린 사랑하는 제자들의 민망스러운 꼴. 지금 교회가 그런 모습이나 아닌지… 가슴이 답답하다.
생명의 찬가를 목이 터져라 불러대어도 부족할 대자연의 변화, 찬연한 봄의 만개를 대하며, 언젠가 내 안에서 빚어낼 이 대단한 생명의 부활을 기뻐하지 못하는 뭇사람들을 어찌하랴. 예루살렘 성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시던 예수님의 심경을 기억하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아니할 정도로 철저히 무너질 도성을 미리 내다보시며 흘렸던 그 눈물의 의미를 오늘 우리 교회들이 되살려야 한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그 어떤 말로 바꿀 수 없는 금언(金言)이 그것이다.
오늘 굳세게 붙잡고 놓치지 않으려 하는 가치 체계가 당신에게 무엇인가? 손아귀에 단단히 움켜쥐고 풀지 못하는 욕망의 실체가 무엇인가? 바로 허욕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해답도 간단하다. 이렇게 4월은 선뜻 우리 앞에 펼쳐진다. 고난 뒤에 찾아오게 될 부활의 달이다. 고난과 역경을 인내하는 순종의 길에서 아름다운 봄의 향연이 펼쳐진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7-8)
이제 미명에서 깨어나자. 이미 날은 밝았고, 봄은 왔다. 산들에 초목은 푸르러졌다. 잡 안팎에 꽃들은 만개했다. 이 아름다운 변화의 중심이 바로 나이다.

이달의 말씀 ㅣ시 19:7-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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