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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강단

십자가와 무화과나무 스캔달-2

[지상설교]  채희석 목사/ 파리 모두제자교회

본문 : 막 11.12-14, 20-21; 고전 1.18, 22-24 기독교 이단들은 십자가의 도를 이해 못합니다. 그래서 이단이 됩니다. 세월호 소유주인 청해진 해운의 실 회장이 유병언인데, 이 사람은 소위 구원파라는 이단의 교주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들의 구원론이 엉터리입니다.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십자가의 도로 인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좇아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게 됩니다. 기독인의 삶이란 결국 “스스로 살고자 하는 자는 죽게되고, 예수 안에서 죽고자 하는 자는 영원히 산다”라는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 “The Cross Jesus in China” (십자가, 중국의 예수님) 라는 다큐 기록영화 DVD를 보고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중국교회가 부흥한 것은 우연이 아닌 십자가의 스캔달이 역사했기 때문임을 찡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산당 간부가 변화되어 예수를 증거합니다, 북경의 잘 나가는 음식점 주인이 식당의 예배공간으로 드립니다. 중국 최고의 무용수가 사람의 영광보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춤을 춥니다. 섹스와 마약을 즐기던 청년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부모에게 버려져 입양된 소년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세상 인정을 추구하기 보다 믿음 때문에 감옥에서 젊음의 삶을 보낸 후에도 감사하는 여신도를 봅니다. 예수 사랑 때문에 교수의 명예보다 구원 받은 은혜가 족하다는 주님의 음성에 만족하며 27년간 투옥생활한 노교수의 승리의 삶을 봅니다. 거짓 송사와 누명으로 종신형 선교를 받은 한 목사는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살았다는 기쁨으로 마지막 생을 마감합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음악수업도 받아보지 못한 Xiao Min 자매는 음악박사들도 감탄하는 중국인 심령을 울리는 천여곡의 찬양을 작사 작곡합니다. 이런 기이한 일들은 십자가의 스캔달이 그들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무화과 나무 스캔달 사건을 살펴봅시다. 마가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고 설명하면서 그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행위가 “스캔달”임을 우리에게 알게 합니다. 그는 이 충격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인본적 생각과 합리적 논리에 도전하며, 믿음으로 주님의 교훈을 받아들이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무화과 나무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14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마치 사람에게 말하듯이 이 나무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거기에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깨서 무화과 나무를 의인화한 것은 그 나무가 무언가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무화과 나무를 이스라엘로 비유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렘 8.13; 호 9.10; 미 7.1-4). 성장 속도가 느린 무화과나무를 재배하는 데에는 수년에 걸친 끈기 있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구약시대에 무화과 농사를 하다 실패하거나 경작지가 황폐해지면 국가적 재앙으로 간주되곤 했습니다 (렘 5.17). 마가복음의 본문 배경에서 볼 때,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종교행위는 있으나, 영적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예수깨서 무화과 나무를 의인화한 것은 그의 말씀이 사람들의 삶의 범위를 넘어서서 모든 창조세계에 적용되는 것임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선 어느 누가 모든 창조세계에게 명하며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무화과 나무 스캔달은 예수님이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또 이 모든 것에 대해 말세에 심판하려 오실 분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살면서 선악 간에 행한 모든 것에 대해 심판과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심판은 두려움이 아닌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마 13.39; 계 20; 롬 14.10; 고후 5.10).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를 향해 하신 말씀의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이튿날에 목격한 데로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 나무가 하루 밤 사이에 뿌리째 말라버렸습니다 (21). 이 사건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 중 유일하게 부정적인 효과를 낸 기적입니다. 즉 생명 대신 죽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를 보고 예수가 무화가 나무를 “저주”했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를 향해 하신 말씀의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이튿날에 목격한 데로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 나무가 하루 밤 사이에 뿌리째 말라버렸습니다 (21). 이 사건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 중 유일하게 부정적인 효과를 낸 기적입니다. 즉 생명 대신 죽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를 보고 예수가 무화가 나무를 “저주”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왜 무화과 나무를 이처럼 하신 것입니까? 그가 배고픔을 참지 못해 화가 나서 저주를 하신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기적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저주가 아님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주라는 단어는 예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무화과 나무에게 말씀하시면서, 단지 그 나무의 상태가 이미 죽은 나무의 상태와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농업경제 환경을 보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는 사실 죽은 나무와 다를 바 없이 취급됩니다. 그런 나무는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에 뿌리 채 뽑아 불태웁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에게 하신 말씀을 상징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종교행위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와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 중 하나로는 무화과 나무의 이야기 중간에 예수께서 성전에 가서 상인들을 좇아 내시며 하나님의 집을 깨끗게 하는 사건이 삽입돠어 있습니다(15-19). 즉 무화과 나무는 마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비유된 것입니다. 건축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신앙의 상징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성전을 무화과 나무에 비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에서 열매를 찾으시는 예수님을 통해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에게 가서 무엇이 있을까 찾으신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오셔서 무언가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마가는 여기서 “찾는다”(eurezei)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도 특별한 상황에서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을 찾는 배경에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8.8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표준번역)라고 말씀하실 때에 동일한 단어가 사용됩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믿음을 찾으시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때에 믿음을 찾지 못하신다면 참으로 실망스러우실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신실하다하는 뜻과 유사합니다. 즉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좇아 신앙으로 사는 삶 자체를 말합니다.

우리가 무화과 나무 스캔달에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인생은 무화과 나무처럼 열매를 맺도록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초청을 하십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 즉 구원을 통해 그 열매를 삶 속에 맺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강조합니다 (빌 2.12). 예수님은 요한복음의 참포도나무 비유 말씀에서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자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신다” (요 15.2) 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반드시 양적이고 외형적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 옥함흠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위한 나의 비전과 기도” (2005.9.9)라는 설교에서, “열심과 바른 교리가 있어도 타락할 수 있다”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한국교회를 보면 새벽과 저녁에 모여 기도를 많이 합니다. 그러나 뜨겁게 기도한다고 반드시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럽교회처럼 세속화의 물결이 교회에 스며들어, 오랜 전통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것같으나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교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라면 우리 교회를 어떻게 평가하실까요?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예수께서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소아시아 7교회에 대해 평가를 보면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교회 건물을 크게 잘 지었구나!”, “교인수가 많구나!” “헌금액이 많구나!” 라는 평가를 하진 않습니다. 외형적이고 양적인 것보다는 질적인 것을 보고 책망도 하시고 칭찬도 하십니다. 그의 교회를 향한 책망은 이렇습니다: “너의 행실에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노라” “네 행위가 이단을 용납했도다” “네가 이름은 살아있으나 죽은 자와 같도다” “네가 뜨겁지고 차지도 않아 또해버릴 정도로 쓸모없게 되었구나!” 라고 책망하십니다.

반면 그분의 칭찬은 이러합니다: “수고하고 인내했구나” “이단을 배척하였구나” “환난과 궁핍을 감당했구나” “충성했구나” “말씀을 지키었구나” 등 양적인 것보다는 질적인 면을 보시고 칭친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예수님의 교회에 대한 평가는 신앙의 열매가 삶 속에 나타난 것을 보시고 책망 또는 칭찬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게 만듭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리는 종교적 행위보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진실되게 변화되었는가를 보실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순종하여 살면서 얼마나 이 땅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았는 가를 보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일한 것을 그 열매로 찾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부단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마음의 중심을 찾으실 것입니다. 또 이 땅에 살면서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영적 가치관과 믿음을 찾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 15.5). 또 열매를 많이 맺으면 예수의 제자임이 드러나 보이며,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15.8).

결론적으로, 마가복음에 나오는 무화과나무 스캔달을 통해 주님은 우리의 구원주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주권자가 되심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를 지키시며,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 삶이 그 안에서 더욱 더 풍성해 지도록 인도하십니다. 십자가의 스캔달이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충격을 주었다면, 무화과 나무 스캔달은 구원 받은 우리 삶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이 되도록 충격을 줍니다. 이 시간 여러분 모두가 주안에 거하면서, 사시사철 좋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측복된 삶이  되도록 축원합니다. 또 언제 어디서든지 주께서 원하실 때 열매를 드릴 수 있는 칭찬받는 종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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