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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죽크 제국과 네스토리안 기독교

[실크로드와 복음루트] 최하영 목사/ GMS 우크라이나선교사

(9회) 술탄 셀죽크 왕조, 칼리프들이 기독교를 실제 통치

압바시드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에는 네스토리안 총대주교구가 있어서 수만 명의 기독교인이 살면서 칼리프의 국가 공공 기관과 생활 속에서 기독교인 고위직 학자와 부자 상인과 공무원과 의사와 교사 등이 무슬림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또한 에데사와 안디옥과 유프라테스(Euphrates) 서부의 주요 도시에도 실제적으로 네스토리안과 야곱파 기독교인이 다수파로서 의사와 변호사, 상인, 은행원 등 중류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술탄 셀주크 왕조 내에서는 종교적 통치자 칼리프들이 기독교를 실제적으로 통치하면서 기독교의 암흑기를 맞이하였다.

초대교회 예루살렘 공회 이후 431년 에베소 공회때에 그리스도의 양성론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최초로 분열되어 나와 사도 도마와 그의 제자들이 이미 복음을 전했던 동방교회들과 연합하여 네스토리안교단(Nestorian Church)을 세웠다. 이들은 당시 페르시아 사산제국(226~651) 안에서 핍박을 참아내며 실크로드따라 북방 유목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632년 당왕조에까지 주교를 파송할 정도로 왕성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622년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무함마드(Muhammad, 571~632)가 이슬람교를 만든 이후 족장 칼리프(632~661)와 수니파 우마야드 칼리프(Umayyad, 661-750)때에 아랍과 북아프리카, 스페인까지,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중국과 인도 국경까지 점령하면서 동시에 이들 지역을 이슬람화하였다. 그런 어려운 상황 중에서도 네스토리안 총대주교들은 정치적으로 무함마드와 칼리프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면서 네스토리안 성도들은 전문직으로 협력하면서 믿음을 지켰다.
그 다음 수니파 압바시드 왕조(Abbasid, 750-1258)때에도 네스토리안 성도들은 차별과 핍박 중에서도 수준높은 전문직 지식을 이 칼리프 정부에 전수하였다. 그런 중에서도 네스토리안들은 북방 유목 투르크족인 케레이트족(Keraite)과 나이만족(Naimans) 등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들 유목민족들 중에 중앙아시아 중심으로 대제국을 이루었던 투르키스탄 제국(Turkestan, 552~734)의 열린사고 덕분에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더 확장할 수 있었다. 다시 위구르 제국(Uigurs, 744-840)이 세워져 키르기즈(Kirgiz)와 호라산(Khurasan)에까지 복음의 영향을 미쳤다. 그러면서 다양한 투르크계 왕조들이 세워졌다. 중앙아시아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중심의 카라가니드 왕조(Karakhanids, 922-1211)와 아프카니스탄 중심의 가즈나비드 왕조(Ghazavids, 962~1186)가 세워졌다.
그런 중에 950년 무렵 케레이트족 계열인 오구즈(Oghuz)족의 셀주크(Seljuk)가 카라가니드 왕조의 용병으로 있다 시르다리야(Syr Darya) 하류의 젠드(Jend)에서 세력을 얻었다. 셀죽크의 아들들의 이름이 미카일과 이스라일, 무사, 유누스인 등이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미하일과 이스라엘, 모세, 요나에서 유래한 이름들이다. 그의 손자는 다우드 즉 다윗 등 기독교 이름을 가졌다. 헌터(E. C. D. Hunter)는 메르브뿐만 아니라 케레이트 오구즈족 가운데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1007년 케레이트족 20만명이 회심한 사건이 있었다. 이 케레이트족에게 메르브(Merv)의 네스토리안 대주교 에벧예수(Ebedyeshu)가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당연히 바그다드(Baghdad)의 네스토리안 총대주교 소속이 되어 나중에 몽골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셀주크가 페르시아계 최초 이슬람 사마니드 왕조(Samanids, 819-1005)와 동맹을 맺어 투르크계 카라가니드를 공격할 때인 985년에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셀죽크의 손자이며 미하일의 아들 투그릴 베그(Tughril Beg, 1038~1063년)이 동생 차그릴베그(Chaghril Beg, 1040~1060)와 함께 1055년에 바그다드로 입성하여 페르시아 부이드 왕조(Buyids, 945-1055)를 무너뜨리고 셀주크 왕조(Seljuqs, 1038-1194)를 세웠다.
페르시아 시아파 부이드 왕조는 압바스 왕조 22대 알 무스타크피(al-Mustakfi, 944-946)때에 이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수니파 압바시드 왕조의 실제적인 통치자 아미르(amir)가 되었다. 압바시드 왕조의 칼리프는 단지 종교적인 권위만 가졌다. 이 부이드 아미르 왕조 기간을 “페르시아 르네상스”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페르시아(이란)의 문화를 회복시켰던 것이다. 아미르 아두드(Adud, 949-983)는 기독교인 나스르 이븐 하룬(Hasr ibn-Harun)을 행정 장관(vizier)으로 임명하여 전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의 기독교 교회들과 수도원들을 세우거나 수리하도록 권한을 주었다. 이 부이드 왕조때에 네스토리안 총대주교들은 임마누엘(Emmanuel, 938-960)과 이스라엘(Israel, 962), 에벧예수 1세(Ebedyeshu I, 963-986), 마레스(Mares, 987-1001), 요한 5세(John V, 1001-1011), 요한 6세(John VI, 1013-1020), 예수압 4세(Yeshuyab IV, 1021-1025), 엘리아스 1세(Elias I, 1028-1049), 요한 7세(John VII, 1050-1057)였다.
그러나 셀주크의 손자 투그릴 베그가 시아파 부이드 왕조를 무너뜨리면서 네스토리안 기독교도 위기를 만나게 되었다. 이미 1000년경에 바그다드의 네스토리안 총대주교는 아시아에서 약 250명 주교와 20개의 대주교구(archbishoprics)와 인도와 중국까지 관할하였다. 또한 당시 전 세계 2억 7천만 인구 중 5,000만명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이 기독교인들 중에 1,200만명의 기독교인을 네스토리안 총대주교구가 관할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058년 압바시드 왕조 칼리프 알 카임 1세(al-Kaim)는 이 셀주크 왕조 투그릴 베그에게 부이드 왕조때에 정치적 지배자로 불렀던 아미르대신에 술탄이라는 칭호를 내려 아부하였다. 더구나 알 카임은 투그릴 베그의 여동생 하지자(Khadija)와 결혼하였다. 이에 알 카임은 네스토리안 총대주교 에벧예수 2세(Ebedyeshu II, 1074-1090)에게 모든 기독교계의 수장으로 간주하여 임명장을 주었다. 이는 칼리프가 주교들이 총대주교를 선출하는 권리까지 유린한 것이 되었다. 또한 모든 기독교계, 즉 네스토리안과 야곱파, 멜키트파의 주교의 임영권까지 포함된 것이다. 이렇게 이 지역의 기독교는 완전히 이슬람 칼리프에게 예속되게 되었다. 오늘날 터키(Turkey)와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 등이 셀주크 왕조의 조상으로 여기는 것을 보면, 종교적으로는 여전히 칼리프 권위를 인정하여 오늘날까지도 기독교를 핍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셀주크 왕조 제1대 투그릴 베그가 자녀가 없자 조카인 차그릴 베그의 아들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 1063-1072)에게 제2대 셀주크 왕위를 계승하였다. 알프 아르슬란은 1064년 기독교국인 아르메니아(Armenia)와 조지아(Georgia)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1068년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의 아나톨리아(Anatolia)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이곳에 룸 술탄국(Sultanate of RUM)을 세웠다. 그 다음 1071년 비잔틴 제국의 군대와 만지케르트(Manzikert)에서 대회전을 벌여 황제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Romanus IV Diogenes)를 포로로 잡으면서 서구 기독교권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제3대 말릭크 샤 1세(Malik Shah I, 1072-1092)가 카라가니드 왕조와 가즈나비드 왕조를 셀죽크 제국의 통치지역으로 만들었다. 그 후 900년간 페르시아는 투르크족이나 몽골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말리크샤 1세의 치세에 셀주크 제국은 전성기를 이루어 소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이에 1087년 압바시드의 칼리프에게서 “동방과 서방의 술탄”의 칭호를 얻었다. 1079년 말릭크 샤는 이집트의 시아파 파티마 왕조(Fatimids) 지배 아래 있던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Jerusalem)도 점령하였다. 파티마 왕조의 역대 칼리프들은 성지 순례를 허용해왔지만, 셀주크 왕조는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성지 순례를 금지하였다. 이는 서구 기독교에게 십자군 운동(1095-1291)을 일으키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네스토리안도 1065년에 예루살렘에 네스토리안 순례자들을 위해 교구를 세웠었다. 이미 1009년 카이로(Cairo)의 칼리프 알 하킴(al-Hakim)이 예루살렘 성묘교회(the Holy Sepulchre)를 파괴하자 이때부터 십자군을 계획하였다. 결국 200년 전 신성로마 황제 샤를마뉴(Charlemagne)와 압바시드 칼리프 하룬 알 라쉬드(Harun al-Rashid, 785~809)의 조약에 의하여 예루살렘에 서방에서 온 기독교 순례자들의 안전한 예배드림에 대하여 거부한 것이 십자군을 실행하게 하였다.
사실 압바시드 왕조와 부이드 왕조때까지만 해도 무슬림인들은 기독교를 좋게 생각하였다.압바시드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에는 네스토리안 총대주교구가 있어서 수만 명의 기독교인이 살면서 칼리프의 국가 공공 기관과 생활 속에서 기독교인 고위직 학자와 부자 상인과 공무원과 의사와 교사 등이 무슬림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또한 에데사와 안디옥과 유프라테스(Euphrates) 서부의 주요 도시에도 실제적으로 네스토리안과 야곱파 기독교인이 다수파로서 의사와 변호사, 상인, 은행원 등 중류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술탄 셀주크 왕조내에서는 종교적 통치자 칼리프들이 기독교를 실제적으로 통치하면서 기독교의 암흑기를 맞이하였고 결국 십자군을 불어들이고 말았다. 사운더(J.J. Saunders)의 중세이슬람역사(A History of Medieval Islam)에서 이 시기에 “기독교의 힘은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다”고 평하였다.
1092년 셀죽크 술탄 말리크샤 1세가 죽자 그의 아들들과 친척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이런 셀죽크 왕조의 정치적 혼란은 1095년 1차 십자군이 쉽게 들어 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제1차 십자군은 니케아와 안디옥, 예루살렘을 차례로 정복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기독교 국가를 세웠다. 결국 이 셀죽크 왕조는 부하라 중심의 호레즘샤(Qwarezmshahs)왕조(1077-1231)에 의해 1157년에 멸망하였다. 그리고 케르만 셀죽크(Kerman, 1041~1187)와 룸 셀죽크(Rum, 1060~1307), 시리아 셀죽크(Syria, 1076~1123), 하마단 셀죽크(Hamadan, 1118~1194) 등으로 각각 분열 독립하였다.
이렇게 투르크계 셀죽크 왕조때에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잠시 암흑기를 맞이했지만, 서구 기독교의 십자군 운동으로 인해 이 지역의 네스토리안 기독교와 무슬림과의 공존은 어떻게 될까?

필자: 최하영 목사/ hydavidcho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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