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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케레이족의 복음화와 그 영향

[실크로드와 복음루트] 최하영 목사/ GMS 우크라이나선교사

(7회) 1007년 케레이트족의 개종

몽골 제국 초기의 대칸의 왕후의 대부분은 네스토리안 케레이트족으로부터 왔다. 케레이트 왕족과 귀족들을 통해 초기 몽골 제국의 왕족과 귀족에게 많은 기독교인이 있게 되었다. 특히 몽골제국에 네스토리안 케레이트 출신의 군인과 관리들이 많았다. 이렇게 몇 세기 동안 케레이트족의 칸들도 대를 이어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이었다.

10~12세기 요(Liao Dynasty, 916~1125)와 금(Jin Dynasty, 1115~1234), 송(Song Dynasty, 960~1279), 서하(Kara-Khanids, 1038~1227), 티베트(Tibet), 탕구트(Tanguts, Western Xia) 시대 때에 북방 투르크 몽골계(Turko-Mongolian) 유목민들은 여러 부족이 있었다. 나이만(Naimans)과 키르기즈(Kyrgyz), 케레이트(Keraites), 메르키트(Merkits), 타타르(Tatars), 몽골(Mongols) 등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몽골 고원 중북부에 흩어져 살던 유목민은 케레이트족(Keraits)이다. 케레이트족은 여섯 씨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케레이트 유목민족 전체가 복음화되었다.

13세기 야곱파인 역사가 바르 헤브라에우스(Gregory Bar Hebraeus)가 1007년 케레이트족의 개종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케레이트족의 마르쿠즈 부이룩 칸(Marghuz Buyruq Khan)이 높은 산에 사냥하다 길을 잃었다. 그때 그가 모든 소망을 잊고 있었을 때, 성자 세르기우스(Saint Sergius)가 나타나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는 다면 내가 당신을 죽지 않게 인도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에 칸은 안전하게 집에 돌아와 고비사막을 지나 무역여행 중인 소그드(Soghdian) 대상들(Caravaneers)을 만나,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이에 상인들은 “당신이 만일 세례를 받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마르쿠즈는 호라산(Khorassan) 지역의 메르브(Merv)의 네스토리안 대주교 에벧예수(Ebedyeshu)에게 서신을 보내 그와 그의 족속이 세례 받도록 사제들과 집사들을 요청하였다. 이에 에벧예수가 1009년 네스토리안 총대주교 요한 6세(John VI)에게 보낸 서신에서 “케레이트 왕과 그의 부족 남자 20만 명이 세례 받았다”고 하였다. 라쉬드 알딘(Rashid al-Din, 1250~1318)의 『연대기의 집성』(Jami al-Tamarikh)에서는 마르쿠즈을 ‘샤리크’ (Sariq)라고 하였다. 사실 마르쿠즈는 기독교식인 마가(Mark)로 바꾼 이름이다. 마르쿠즈는 1026년 금(여진)의 통치 벗어난 후 요(거란)로부터 왕권을 인정받았다.

어느날 마르쿠즈가 타타르족에게 기습당하자 나이만족의 바이루크 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때에 나이만족 바이루크 칸은 딸을 마르쿠즈 칸의 아들 쿠르쟈크(Kurchakus Buyruq)에게 시집보냈다. 이렇게 케레이트족과 나이만족은 긴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마르쿠즈는 타타르족의 나우르 뷔루크 칸(Nauur Buiruq Khan)에게 생포되어 요왕조에게 넘겨졌다. 네스토리안 기독교인 칸 마르쿠즈가 나무 당나귀에 못박혀 처형당하였다. 이에 마르쿠즈의 미망인 큐튝타이 이리크치(Qutuqtay-Irikchi)은 복수를 위해 타타르에게 술을 바치겠다고 속여 1백 온도르의 마유주(馬乳酒)를 준비해 타타르족에게로 갔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간 것은 마유주가 아닌 무장한 용사 백 명이었고 도착 하자마자 이들은 나우르 뷔루크 칸을 비롯한 타타르부족 사람들을 차례대로 죽임으로써 남편 마르쿠즈의 죽음에 대하여 복수를 하였다. 이는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Nights)의 몽골 스타일(Mongol style)이라 할 수 있다.

마르쿠즈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쿠르쟈크 부이룩 칸(Kurchakus)과 쿠르 칸(Gur Khan)이다. 쿠르쟈크는 위구르 제국의 옛수도 카라발가순을 본거지로 삼아 케레이트를 부흥시켰다. 그 후 마르쿠즈의 손자이며 쿠르쟈크의 아들 토그릴(Toghril, 1131~1203)이 계승하였다. 이 토그릴이 칭기즈칸의 아버지 예수게이 바토르(Yesugei Baatur, 1134~1171)와 의형제를 맺었다. 나중에 토그릴은 테무진(Temujin, Genghis Khan, 1162~1227)과도 의부자의 연을 맺었다. 테무진과 토그릴이 타타르족을 물리치자 그 공로로 토그릴은 금왕조로부터 ‘옹(왕) 칸’(Ong Khan, ~1203)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렇게 네스토리안 기독교인 마르쿠즈의 손자 토그릴 칸이 서구에서 십자군을 구원해 주기를 원했던 사제왕 요한(Prester John)인 것이다.

그 후 1206년 테무진이 칭기즈칸으로 즉위하면서 네스토리안 케레이트족은 칭기즈칸 인척으로써 몽골 유목민의 유력한 부족이 되었다. 칭기즈칸의 넷째 아들 툴루이(Tolui, 1190-1232)의 부인은 토그릴 웅 칸의 동생 쟈하감보(Jakha-gambu)의 딸 소르칵타니 베키(Sorghaghtani Bekhi, 1190-1252 )이다. 그녀가 몽케 칸(Mongke Khan)과 쿠빌라이 칸(Kublai Khan), 훌라구 칸(Hulagu Khan), 아릭 부케(Ariq Buke)의 어머니이다. 몽골 제국 초기의 대칸의 왕후의 대부분은 네스토리안 케레이트족으로부터 왔다. 케레이트 왕족과 귀족들을 통해 초기 몽골 제국의 왕족과 귀족에게 많은 기독교인이 있게 되었다. 특히 몽골제국에 네스토리안 케레이트 출신의 군인과 관리들이 많았다. 이렇게 몇 세기 동안 케레이트족의 칸들도 대를 이어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이었다. 이 기독교는 바그다드(Baghdad)의 네스토리안 총대주교 소속이었다. 라쉬드 알딘에 의하면, “그 다음 200년 동안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이 케레이트족 가운데 증가되었다”고 기술하였다.

더불어 당시 케레이트족과 결혼 등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나이만족(Naiman)에게도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었다. 13세기 중반의 역사가 주베이니(Juvaini)가 칭기즈칸의 공격을 받아 카라 키타이(서하, Qara Khitai)로 도주했던 나이만 족장 타양 칸(Tayan Khan)의 아들 쿠츨루크(Kuchlug)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이만족은 대부분 타르사(tarsa)였다”고 하였다 이 ‘타르사’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운데 ‘달사’(達娑)로 경교 성도를 지칭하며, 보통 중국측 문헌에는 야리가온(也里可溫), 즉 네스토리안을 말한다. 물레(A. C. Moule)에 의하면 나이만족은 기독교인이라 할 정도로 복음화 되었다고 하였다. 그 한 증거로 실크로드 천산북로를 따라 발카슈(Balkash) 호수와 이스크 쿨(Issy-kol) 사이의 세미레치(Semireche’e) 지역의 토크막(Takmak)과 피슈렉(Pishpek)에서 610여 개의 비석들이 발견되었는데, 네스토리안 특유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100여개의 비문은 시리아어로 그 내용은 투르크어로 기록되어 있고, 그 연도는 858년부터 1345년까지 분포되어 있다. 이들 민족은 주로 타타르(Tartar)족이었다. 이렇게 세미레치 지역이 9세기부터 14세기까지의 상당한 기독교 투르크 공동체의 정착지를 보여준다.

아부 하라지에 따르면, 11세기 초에 케레이트족과 나이만족, 옹구트족(Ongut)이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이라고 하였다. 특히 케레이트족은 위그르 문자를 사용한 문명화된 부족이라 하였다. 원래 네스토리안 기독교의 공식 예배 언어는 시리아어이다. 이란계 소그드인(Sogdian)들이 개종하면서 이들을 통하여 시리아어에서 소그드어로된 경전과 성구집들도 많이 번역하였다. 그리고 소그드인들은 소그드어에서 몽골어 근원이 되는 유오아문(維吾兒文)을 토대로 해서 위구르어(Uigurian)를 만들어 위구르어 성경을 번역했고 위구르어로 된 많은 기독교 문헌도 기록하였다. 이 위구르어 덕분으로 산스크리트(Sanskrit)어 불교 경전을 위구르어로 번역하여 위구르 문화를 한 단계 높여 놓은 계기가 되었다. 나우(F. Nau)는 말하길, 네스토리안 법학자가 완성한 판라비(Panlavi) 문자가 조선문자모(朝鮮文字母)에 기초를 놓았다고도 하였다. 수기야마 마사키(Sugiyama Masaaki)에 의하면, 당시 지배자들은 투르크어를, 주민들은 시리아어와 소그드어, 위구르어, 타타르어, 티베트어, 산스크리스트어 등을 사용했다고 하였다. 마르코 폴로도 투르크어로 말하는 네스토리안 기독교인이 카슈가르(Kashgar)와 그 부근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 카슈가르에는 네스토리안 대주교구가 있었는데, 케레이트와 나이만, 옹구트), 메르키트족 등을 관할하였다.

1905년 콕(Albert von le Coq)의 일행이 카슈가르 네스토리안 대주교구 관할권인 수도원 불라이크(Bulayiq) 근처 수이팡에서 400-500종의 기독교 문헌을 발견하였다. 8-13세기에 걸쳐 쓰인 이 문헌들은 시리아어와 소그드어, 투르크어로 된 것으로 시리아어 페쉬타 성경에 번역된 구절들과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대영광송, 성자와 순교자들의 전기 등 다양하였다. 심스 윌리암(N. Sims-Willimas)은 비록 발굴된 문헌들이 소그드어로 쓰인 문헌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인 이름들의 상당수가 투르크식인 것으로 보아 당시 투르판 네스토리안의 대부분은 투르크인(Turkish)들이었음을 말하여 준다고 하였다. 이렇게 10세기 북방 유목민 케레이트족 전체가 복음화되면서, 그 주변 나이만족과 웅구트족 등에게도 복음의 영향을 미쳤다. 나중에 초기 몽골제국때에 이 네스토리안 케레이트족 출신이 왕후와 관료들로 큰 역할을 감당하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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