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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앞에 바로 서자

[유크시론 208호]  이창배 발행인

이달을 여는 창: 2019-3월호 사설

우린 진정한 복음의 목표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옛말에도 知彼知己(지피지기) 百戰不殆(백전불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질 않는가? 자기를 안다는 것은 이만큼 중요하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우린 조금의 불편조차 인내하지 못한다. 조급하고 조악하다. 자기만족을 먼저 내려놓지 못한다. 내 것은 자랑하고, 남의 것은 깎아내린다. 그런 바탕에서 어떤 복음의 진전이 이뤄질 수 있을까,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니던가? 오늘 우리의 시야는 어떤가? 아니 시야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3월이 오는 길목에, 삼일절 백 주년 한국교회 기념대회가 열려 이 자리에 초대를 받아 급히 한국을 방문했고, 3월의 첫날을 서울에서 맞이하는 감회가 남다른 가운데 한 주간을 보냈다.
차가운 기운이 아직 조금 남겨진 3월 초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봄날이 온 것을 느끼기에는 충분할 만큼 풀린 기온과 살랑살랑 훈풍이 얼굴을 스쳐 가는 사뭇 고국에서의 새봄을 맞이하는 감격이 남달랐다.
하지만 꼭 그런 감회만 깊은 것은 아니었다. 불운한 것인지, 마침 고국에서 머무는 한 주간 서울에서 심각한 공포를 느껴야 했다. 아침 창문을 통해 바라본 시가지는 희뿌연 미세먼지에 휩싸인 체 온통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처음엔 유리 창문에 쌓인 먼지 탓에 그러려니 생각하고 아예 창문을 열어 밖을 보고자 했지만, 급히 창문을 닫아야만 했다.
가뜩이나 기관지가 약한 필자에게 삽시간에 목이 막히는 듯 탁한 느낌이 느껴짐과 동시에 기침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 짧은 시간에도 가까이 있는 빌딩이 흐릿하게 보이고, 먼발치로 남산이 보이는데, 빛바랜 사진을 보는 것처럼 눈앞이 희뿌옇게 보이는 것이 충격이었다. 한낮에 한강을 끼고, 강변도로를 자동차로 달리면서 바라본 맞은편 여의도는 자욱한 안개에 덮인 것처럼 희미하게 빌딩 숲이 보였다.
신문과 방송은 마치 모래폭풍 속에 가려진 것처럼 누르스름한 미세먼지가 깔려 하늘이 보이질 않고, 건물들이 보이질 않는 서울의 모습을 대서특필했다. 미세먼지 방지 마스크를 썼지만 그래도 목이 갑갑하고 따갑고, 기침은 나오고, 숨을 쉬기가 점차 어려워지는데, 어디 한 곳 피할 곳이 없다는 점이 두렵게 느껴진다.
대한민국 전체가 미세먼지로 뒤덮여 어디 한 군데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이 놀라움, 그 자체로 다가온다. 빨리 떠나 독일로 가고 싶다는 간절함마저 생긴다. 이 미세먼지로 뒤덮인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가엾게 느껴지던지 슬픈 마음마저 차오른다.
길가에 오고 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마스크를 착용한 채 서로의 표정도 읽을 수 없는 답답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일상이 되어간다는 그 사실이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마스크로 임시방편, 미세먼지로 뒤덮인 환경을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 점차 현실로 굳어지고 있으니, 어쩌다 금수강산이라는 내 고국 땅이 이 정도로 변했는가 하는 격세지감마저 드는게 사실이다.

푸르고 맑은 키프로스
지난 2월 코발트색 바닷물이 환상적인 키프로스를 다녀왔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 밝은 햇살과 동글동글한 조약돌로 덮인 해변, 봄의 꽃잔치가 펼쳐지고 있는 들판을 가로질러 달리며 수천 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아름다운 땅을 밟았다.
라르나카에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무덤에서 부활하고 난 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초대교회 박해를 피해와서 정착하고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증명하는 목회를 하다가 생애를 마쳤다고 전해지는 기념교회가 있고, 그 교회 지하에는 나사로의 무덤이 있다.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 여정에서 안디옥을 떠나 배를 타고 첫발을 내디딘 해안, 살라미를 찾았다. 현재는 남북으로 나누어져 북쪽은 터키가 지배하고 있는 땅으로 남쪽에서 북쪽을 가기 위해서 국경을 넘어가야 했고, 심사를 받아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살라미는 돌무더기로 남겨진 고대 유적지로 만났다. 엄청난 규모를 엿볼 수 있는 그 유적을 넘어 들판 가운데 서 있는 바나바 기념교회를 찾았다. 깔끔하게 단장되지 못한 채 숱하게 찾아오는 그리스도인들을 맞이하는 교회를 보면서 이슬람이 지배하는 문화 가운데 그래도 본래 모습을 유지해가는 그 힘겨움이 쉽사리 느껴진다. 그곳에 바나바의 무덤이 있다. 지하에 놓인 바나바의 석관이 방문객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바나바의 고향 땅인 이곳에서 바나바는 목회하다가 유대인들의 폭동 때 돌아 맞아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곳에서 약 200km 정도 떨어진 남키프로스의 바포시까지, 바울과 바나바는 키프로스의 중앙에 나 있는 험난한 산길을 걸어갔다. 우리는 해안 길을 통해 자동차로 바보까지 가서, 바울이 돌기둥에 묶여서 40에서 한대를 감한 매를 맞았다고 전해오는 바울채찍기념교회를 찾았다. 로마 총독인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하기까지 겪었던 숱한 고초가 눈에 아물거리는 것만 같았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허 참, 세상은 왜 그리 미세먼지가 난리인가? 내일의 삶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요소가 어찌 한둘이겠는가? 내일에 대한 꿈을 상실한 숱한 사람들이 거리를 배회하는 일상을 어찌 보아야 할까? 특히 젊은 세대가 내일에 대한 꿈이 없다는 그런 푸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서울에서 만난 지인이 그런 말을 던졌다. “누구 탓할 수 없지, 자업자득이야. 자기의 불편 조금만 참으면 될 일인데, 자기의 욕심 조금만 버리면 될 일인데, 저마다 내로남불이 따로 있나? 돈이라면 남의 불편 정도야, 그까짓 거지 뭐”
그렇다. 남을 도외시하는 욕심이 미세먼지의 출처이다. 내가 하는 것은 로맨스가 되고, 남이 하는 것은 불륜이라고 하는 속어가 바로 내로남불이다. 이 또한 나는 말고, 너야말로 그렇다고 판단하는 그 순간부터 적용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7:3-5) 그러고 보면 우린 진정한 복음의 목표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옛말에도 知彼知己(지피지기) 百戰不殆(백전불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하질 않는가? 자기를 안다는 것은 이만큼 중요하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우린 조금의 불편조차 인내하지 못한다. 조급하고 조악하다. 자기만족을 먼저 내려놓지 못한다. 내 것은 자랑하고, 남의 것은 깎아내린다. 그런 바탕에서 어떤 복음의 진전이 이뤄질 수 있을까,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니던가?
오늘 우리의 시야는 어떤가? 아니 시야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2천 년 전 바울과 바나바가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행13:4-5). 이 행간의 의미가 마음에 와닿는다. 자기를 먼저 포기하지 않고는 좁은 길로 갈 수 없다. 자기희생 없는 사랑은 없다. 우리가 이 부름을 받은 게 아닌가? 가슴에 손을 얹고, 복음 앞에 바로 서자.

이달의 말씀 ㅣ마7:3-4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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