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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

라스팔마스, 33명의 선원들, 타이타닉 (2)

[유럽에서 보는 유럽이야기] 김학우 목사 »

죽음 앞에서, 죽은 자 앞에서, 무덤 앞에서… 

“…오대양을 누비며 새 어장을 개척하고 겨레의 풍요한 내일을 위해 헌신하던 꽃다운 젊은이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허망함이여. 그들은 땅 끝 망망대해 푸른 파도 속에 자취 없이 사라져갔지만, 우리는 그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중략)” 스페인령 라스팔마스 산 나자로(San Nazaro)공원묘지 비문에 새겨진 박목월의 시이다.
 
죽음 앞에서…
 
호산나호의 조난 소식을 전해 졌을 때에 한국에 있는 회사를 비롯한 온 라스팔마스 교민사회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했다. 가끔 걱정스러운 조난들이 있긴 했지만 이처럼 엄청난 충격은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비보를 듣고 한국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유가족들이 현장에 속속 도착했다. 선박회사 사무실은 이미 박살이 난 상태였고, 조난 사고가 난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희망의 소식 대신  조난당했다는 다수의 증거물만 확보했다는 소식뿐이었다. 조난 사실이 확실해 보이자 유가족들은 더욱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남편을 잃고 슬퍼하는 아내, 결혼식을 올려야 할 것이 어쩌다가 장례식을 하게 되다니…”라며 통곡하는 아버지, 동생의 죽음 앞에서, 참을 수 없는 슬픔과 애통만이 하늘을 메아리쳤다. 이들 대부분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스페인에 온 이유를 모를 정도로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이해하지 못할 당황함, 삶에 대한 허망함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걷잡을 수 없는 이런 와중에 목사인 나 또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저는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입니다. 종교가 다르겠지만,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예배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라는 목사의 정중한 호소에 모든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다. 기독교인, 불교인, 유교,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섞여 있긴 했지만 노골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 모든 유가족들이 예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막무가내로 낯선 땅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던 절박함이 나의 제안을 수용한 것 같았다. 폭풍전야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울분을 삭이고 끝까지 침묵을 지켜 준 것만으로 안심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한 구의 시신도 없이, 한 조각의 유품도 없는 상태에서 33인의 이름만 새겨놓은 위패만 올려놓은 채 장례예배를 드려야 했던 그 순간만큼 목사직에 대한 허탈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일주일 전에 “만선으로 귀항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외쳐놓고,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죽음 앞에서 참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죽은 자 앞에서…
 
1998년 3월24일 미국 L. A에서 125개국 10억 인구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70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었다. 이 시상식에서 카메론이 감독한 영화 “타이타닉”은 작품상을 비롯 11개 부분에서 수상했는데, 이는 1960년 32회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한 ‘벤허’가 세운 최다 수상 기록과 타이기록을 세웠다. 영화 “타이타닉”이 특별히 나에게 감동을 준 부분은 현악 4중주단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물에 잠겨 가는 갑판 위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했던 그 절박함 속에서 4 중주단은 승객들을 위해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란 찬송가를 연주하면서 자신들의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 들였다. 죽은 자들 앞에서 경비원을 매수하는 사람들, 구명보트를 탈취하다 총탄에 맞는 사람들, 철망 안에 갇혀 절규하는 사람들, 비탄과 공포에 빠진 사람들과 전혀 달랐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으며, 더욱이 죽은 자 앞에선 사람들도 두려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난 이후 일주일이 지나자 하루가 다르게 상황은 달라졌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너무 큰 슬픔을 당하면 “이제 울 힘도 없다.” “눈물이 다 말랐다.”라곤 하는데, 호산나호의 유가족들 또한 비통함을 가슴에 담고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일주일 전만 해도 실신한 유가족들이 많았고, 식음을 전폐 했지만, 보상 문제가 제기되자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슬픔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보상에만 집착을 보였다. 희생한 사람의 생명을 어쩔 수 없이 돈으로 계산하여 보상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 자리는 마치 물건을 거래하는 시장과 다를 바 없었다. 유가족들은 한 푼이라도 보상을 더 받아 내기 위해 안 갓 힘을 다했고, 선박 회사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적게 주려했다. 돈으로 사람의 목숨을 흥정하는 자리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자리였다.
 
무덤 앞에서…
 
어처구니없는 선원들의 죽음, 생사를 전혀 모른 채 치러진 장례식이 이뿐만이 아니다. 스페인령 라스팔마스는 1970년대 초부터 한국 선원들이 몰려들면서 대서양 원양어업의 전진기지가 되어 왔다. 한국 원양어선들은 라스팔마스를 기점으로 서부아프리카에서 조업을 했으며, 기지와 수 천 킬로 떨어진 중서부 아프리카인 기니, 시에라리온, 가나까지 조업을 했다. 어선들은 수시로 라스팔마스를 드나들기도, 잡은 고기를 운반선을 통해 실어오기도 했다. 생선 중에 최상급으로 분류되는 오징어, 문어, 참치 등은 일본으로 전량 수출했고, 새우 등은 주로 유럽으로 수출했다.

지금껏 한국인들의 식탁에 자주 오르내리는 조기, 민어, 갈치, 서대 등, 상당수는 한국 원양어선원들이 아프리카 해안에서 잡은 것들이다. 그러나 90년대 이르러 원양어업은 전반적으로 국민소득의 증가와 국내 급료에 미치지 못하는 적은 급료로 인해,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노후 된 선박에서 그것도 1년 이상을 견뎌내야 하는 고된 조업을 감내할 선원이 더 이상 없게 된 것이다. 현재 라스팔마스에서 어업에 종사자는 거의 없으며, 그나마 남아 있는 선주들은 다국적 선원들을 데리고 서부아프리카 기지로 전전긍긍하면서 고유가와 씨름하며 고전분투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도 90년대부터 “국민소득 6,000달러를 넘어서면 선원의 숫자는 감소한다.”라는 해운업계의 불문율이 적용된 셈이다.

이후 나는 그 옛날을 추억하며 라스팔마스를 되돌아보고 왔다. 특히 선원들이 묻혀 있는 공원묘지에 새겨진 “우리는 푸른 파도 속에서 자취를 감춘 꽃다운 젊은이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는 위령탑 헌사에도 불구하고 조국 근대화의 밑거름이 된 역군들 상당수는 이미 잊혀진 지 오래였다. 200여개 이상 되는 무덤과 무덤에 새겨진 비석들 가운데 상당수는 깨진 묘비, 이름조차 희미한 묘비, 파손된 무덤, “Si no hay recontrato de la tumba quiero anular totalmente”(재계약하지 않으면 처분하겠음)라고 하는 경고문이 적힌 계약 만료된 묘비를 볼 때마다 아는 이 없이 이국땅에 묻힌 서러움이 더없이 커보였다. 다소 늦었지만 지난 2002년 한국정부가 경제발전에 이바지하다 희생된 원양어선원들을 위해 봉안당을 마련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박목월의 헌시처럼 원양어선원들은 80년대 조국의 풍요를 위해 말 그대로 오대양을 누비며 몸바쳐왔다.

라스팔마스를 뒤로하고 비행기 트랩에 오르면서 문득, 중국 조선족의 작가 허련순씨가 본국을 떠나 타국에 사는 이민자들을 “바람꽃”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바람이 불면 그에 실려 정처 없이 떠다니다가 바람이 멈춘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뜻에서 그렇게 비유한 것이다. “사랑의 괴로움”이란 꽃말처럼 온갖 괴로움을 갖고 이국 땅, 이곳저곳에서 살아가는 바람꽃들이 얼마인가? 꽃다운 젊은이들이 푸른 파도와 싸우다 바람결에 훌쩍 떠나버린 원양어선원들,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고상하고 기품 있는 바람꽃들이 아닐까 싶다.
글 / 김학우(kmadrid@hanmail.net)/ 스페인 마드리드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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