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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아트저널

돌아온 탕자

[아트저널]  박심원목사/ 예드림커뮤니티교회 공동담임/ 30회

렘브란트의 인생을 담은 자화상…

→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 – 1669, 네덜란드) 작품

렘브란트는 일생동안 백여 점에 가까운 초상화를 그렸다. 자화상을 그려내는 전문 초상화가 뿐 아니라 조국 네덜란드를 빛내는 인물로 굳게 자기 매김하고 있다. 영국을 셰익스피어의 나라라 부를 수 있는 것처럼, 네덜란드는 렘브란트의 나라라 불릴 만큼 그의 위치는 시대적 획을 그은 화가가 분명했다. 그의 미술사는 빛으로 조명된 세계를 만들어 냄으로 빛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사람마다 평가는 다르겠지만 그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돌아온 탕자는 렘브란트의 인생을 담은 자화상이다. 그것은 곧 그의 그림 앞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초상화의 일인자로서 돈과 명성을 비교적 젊었을 때 얻게 된다. 성공의 최정상에 있을 때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잃고 난 후 재산까지 탕진하게 되면서 최악의 고통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언저리에서 허덕이게 된다. 렘브란트가 죽기 전 10여 년 동안 미완성으로 완성한 자신의 인생을 함축한 돌아온 탕자는 자신의 얼굴이 담기지 않는 자기 삶의 초상이다.
그의 그림 앞에 서 있으려니 김석균 님의 돌아온 탕자의 복음성가 맴돈다. <멀고험한 이세상길 소망없는 나그네길/ 방황하고 헤매이며 정처없이 살아왔네/ 의지할 것 없는 이몸 위로받고 살고파서/ 세상 유혹 따라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네/ 무거운 짐 등에지고 쉴곳 없어 애처로운 몸/ 쓰러지고 넘어져도 위로할 자 내겐 없었네/ 세상에서 버림받고 귀한 세월 방탕하다/ 아버지를 만났을 때 죄인임을 깨달았네…>
렘브란트가 그의 인생을 담아내려 했던 누가복음 15장에 돌아온 탕자의 모습이다. 돌아온 탕자는 곧 렘브란트 자신을 그려냈다. 아들의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빛은 탕자를 향한 구원의 선물이다. 작은 아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 렘브란트는 그의 얼굴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그려냈을 것이다. 돌아온 아들의 어깨를 짚고 있는 양손은 바로 렘브란트가 담아내려 한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한 손은 여성의 손이라면 다른 한 손은 거친 남성의 손이다. 아들의 오른쪽 어깨를 누르고 있는 아버지의 왼손은 남성의 손으로 묘사했다. 그것은 능력의 손이다. 깨어진 아들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전능자의 손길이다. 반면 아들의 왼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오른손은 부드러운 여성의 손이다. 이는 아들의 깨어진 내면을 치유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묘사해내고 있다.
아들은 먼 길을 달려왔다. 이는 외적이면서 내적인 표현이다. 그의 벗겨진 신발, 더럽혀진 발이 말해 주고 있다. 아들이 집을 나간 후 아버지는 눈이 멀었다. 바로 사랑의 눈이 먼 것이다. 그것은 작은 아들의 잘못에 대해 눈을 감는 창조주의 사랑의 모습이었다. 허물을 묻지 않으시는 그 사랑이 아버지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창조주는 우리를 기뻐하신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우리를 기뻐하시는 창조주의 모습은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이다. 아직 회개하지 않은 상태 그 자체이다. 그 사랑은 창조주 자신이 죽음을 택하여 우리를 살리는 일이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5:6) 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눈이 가려진 소경의 모습으로 그렸다.
작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떠나게 한 것은 바로 어둠속에 감추어져 있는 큰 아들의 영적 이기심이었다. 그의 영적 자만은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께 이렇게 고발한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15:30)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은 아들을 탕자라 말하는 것에는 큰 아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물론 작은 아들도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했다.’(13절)고 표현하고 있다. 허랑방탕의 원문은 ‘아소토스’이다. 이는 자기 고백적인 회개가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주로 세 가지로 나타난다. 에베소서 5:18, 디도서 1:6, 베드로전서 4:4 말씀이다. 세상에서는 성공적으로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난 삶은 그 자체만으로 허랑방탕한 삶일 수밖에 없다. 작은 아들은 합법적으로 자기 분깃을 정당하게 아버지에게 받아서 이민을 간 것이다. 이방인은 성공할 수 없는 구조가 이민 생활이다. 물론 성공한 사람들을 우리는 뉴스로 접하게 된다. 그것은 정말 가뭄에 콩이 나는 기적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삶이 그러하다. 하나님을 떠난 삶이 그러하며 렘브란트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바로 작은 아들인 탕자의 모습이었다. 실상 탕자는 작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않았던, 그러나 실상 아버지의 품을 떠난 큰 아들이었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큰아들의 모습은 종교적 이기심으로 무장한 유대인들을 일컫는다. 비록 작은 아들인 이방인은 하나님을 떠나긴 했지만 그의 삶을 송두리째 회개하여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온 것이다. 초대교회시절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바로 큰 아들의 모습이었다. 분명 선지자들을 통해, 육신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단지 이스라엘의 조상뿐 아니라 열방의 아비가 되게 하시려는 창조주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으면서 유대인을 위한 예배처소 보다 이방인의 뜰을 더 넓게 한 인류를 향한 창조의 사랑을 그들을 잊고 있었다. 바로 아버지 품안에 있으면 아버지의 품을 떠난 큰 아들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렘브란트는 큰 아들을 어둠에 있게 한 것과 작은 아들을 향해 창조주의 빛이 쏟아지게 한 것은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창조주를 떠난 인류는 모두 작은 아들에 속한다. 회개하고 돌아올 때 벗겨진 신발을 신겨주시는 창조주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신에 관하여 선민이라 불렸던 사람들은 모두 신을 벗어야 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신을 벗어야 했고(출3:5), 그의 제자인 여호수아도 여리고 성과의 전투에 앞서 신을 벗어야 했다(수5:15). 신발을 벗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경배이며 동시에 자신만이 누렸던 영적 기득권을 내려놓는 회개이면서 창조주 하나님만을 경외하겠다는 영적 결단임을 담고 있다. 신약시대에는 둘째 아들에게 신을 신겨 주었다. 동시에 복음의 신을 신으라 했다.(엡6:15) 구약에서는 벗으라 했고, 신약에서 신겨 주신다. 이는 시대적 차이가 아니라 먼저 벗어야 함을 내포하고 있다. 둘째 아들은 하나님을 떠난 삶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신뢰했던 삶의 신을 벗어던졌다. 벗어야 신겨주시는 창조주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반면 큰 아들은 아버지 집에 있으면 아직도 그는 자기 아집의 신을 신고 있을 뿐이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는 곧 전 인류를 기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눈먼 사랑이며 동시에 아버지 품에 안겨야 할 우리들의 자화상이면서, 아직 신을 벗지 못한 큰 아들을 향한 회개의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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