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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저널

도마의 의심/The Incredulity of Thomas (1621)

[아트저널]  박심원목사/ 예수마을커뮤니티교회 담임/ 5회

조반니 프란체스코 바르비에리 (구에르치노) 작품 소개

제자들의 심리묘사…그러나 예술은 성경 본질을 넘어설 수 없다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의 상처를 만지는 순간 주님 뒤에 서 있던 베드로의 놀란 표정은 모든 이들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 베드로를 포함하여 다른 제자들도 도마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함부로 자신의 의심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도마가 모든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임을 화가는 그려낸다.

인생은 상상하는 것만큼 자기를 확장할 수 있다. 상상이란 꿈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비전이라 바꿔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꿈의 세계는 완성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씨앗이 외부의 영향력으로 주어지게 된다. 내게 심겨진 꿈의 씨앗의 시작은 외부의 영향력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지만 내 안에서 숙성되어 뿌리를 내려야 하고 그것을 키워 가야 하는 몫은 전적으로 내 역량인 것이다. 그러나 비전은 내 관점이 아닌 전능자의 관점에서 꿈을 해석해 낸 것이다. 인간이 꿈을 꾸는 것은 개인의 욕망을 이루기 위함이 아닌 전능자의 뜻을 내 삶을 통하여 이루어 내시려는 사명인 셈인 것이다.

꿈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보이지 않는 꿈의 세계를 보이는 세계, 이해할 수 있는 세계로 끌어와서 현실적인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히브리서 11:1-2에서 증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바라는 것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꿈은 생각에서 시작된다. 생각이 굳어버리면 현실의 삶만을 추구하게 된다. 내일을 기대 할 수 없다. 생각에서 시작된 꿈이 공동체적이라면 그것은 꿈의 울타리를 넓힌 비전일 것이다. 비전은 아직 현실이 되지 않는 미래적 사건을 현실의 삶으로 끌어당겨서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것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것이다. 다만 현실이 된 미래는 내 생각 속에서 완성된 관념의 세계일뿐이다. 내 인생의 꿈 중 하나는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다. 아직 현실이 되지 않은 것이다. 누구도 그 꿈이 현실이 될 것이라는 보장 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꿈을 신뢰한다. 꿈만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땀 흘려 글 쓰는 일에 매진하고 내 자신을 가꾸고 있다. 내 안에 존재하는 꿈을 현실화 시킨다고 해서 내 행동이 마치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처럼 행동하라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꿈은 비전으로 발전해야 하고 그것을 내 안에서 인내함으로 키워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키워진 비전은 십년, 이십년, 삼십년 후에 빛을 발하게 된다. 그래서 작은 비전은 아침에 계획한 것이 점심에 이뤄지기도 하지만 큰 비전은 자기 인생을 걸어야 할 만큼 오래 걸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쉽게 자라는 것은 오래 갈 수 없다.

갈릴리는 호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갈릴리를 바다라 부른다. 그들에게 있어서 갈릴리는 바다와 같은 넓고 넓은 곳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호수를 바다라고 부를 만큼 제한적 한계에 살았던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제자로 부름 받는다. 갈릴리에서 태어나 갈릴리에서 자라고, 갈릴리에 그들의 뼈가 묻힐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주님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갈릴리를 떠나야 했다. 그들이 꾸었던 소박한 꿈은 비전이 되었다. 꿈은 갈릴리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면 비전은 갈릴리를 떠나 사명자로 사는 것이었다. 꿈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며 인본주의 것이라면 비전은 현실을 넘어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명인 것이다. 그래서 꿈꾸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비전으로 사는 사람일 것이다.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첸토(Cento)에 한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어렸을 때 사팔뜨기였기 때문에 그의 본명 보다는 ‘구에르치노’ (Guercino) 라 불렸다. 바로 ‘조반니 프란체스코 바르비에리’ (Giovanni Francesco Barbieri) 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독학으로 그의 꿈을 키운다. 1621년 그레고리 15세 (Pope Gregory 15) 교황으로부터 부름을 받아서 제단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보이지 않은 영적인 현상을 보이는 화폭에 담아야하기 때문이다. 화폭에 담는 과정은 화가의 신앙심이나 종교적 상식, 당시의 교회의 타락된 권력의 힘이 화폭 안으로 구겨져 들어오도록 되어 있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했지만 그것은 실상 성경적이라 할 수 없는 허구인 셈인 것이다. 성화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보조적 역할일 뿐이지 성화를 통하여 성경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모습은 지성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도마는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다른 제자보다 늦게 접하게 된다.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부활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이성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 말하는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20:25) 도마가 이렇게 말을 하고 8일 후에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다. 도마가 말한 것을 주님이 말씀하셨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내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20:28) 도마의 행동은 손을 내밀어 주님의 상처를 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예수님의 행적을 그린 성화일지라도 성경의 본질을 초월할 수 없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종교적이면서 정치와 사회 문화적임과 동시에 개인 신앙의 담겨 있게 된다.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의 상처를 만지는 순간 주님 뒤에 서 있던 베드로의 놀란 표정은 모든 이들의 내면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을 실제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믿는 것, 그러면서 마음 한 구석에 의구심이 있게 마련이다. 베드로를 포함하여 다른 제자들도 도마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함부로 자신의 의심을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도마가 모든 제자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임을 화가는 그려낸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보고 믿으려 한다. 신앙의 본질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고 믿는 것이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확신시켜주는 신앙의 본질인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중세교회는 성경의 모든 사건을 그림으로 표현해 냈다. 그것이 옳을 수 있지만 그림이 성경을 해석해 내는 불신앙을 초래했던 역사적 오점을 남겼다. 성경에 기록된 본질의 내용 보다는 그림으로 그려진 내용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성경은 그 무엇으로도 해석해 낼 수 없다.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만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역사적 자료나 화가들의 신앙심으로 그려진 성화는 개인의 간증일 뿐이지 성경의 내용을 대변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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