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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안 총대주교 디모데 1세

[실크로드와 복음루트] 최하영 목사/ GMS 우크라이나선교사

(6회) 외방대주교구 제도

네스토리안은 처음부터 선교적이며 개혁적인 교단으로 주님의 지상명령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네스토리안 외방대주교구 연결망(network)은 아시아의 방대한 지역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효율적인 복음 전파를 위한 외방대주교구 전략은… 독립적으로 선교활동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무함마드(571-632)가 이슬람을 세워 통치한 후 족장칼리프와 우마야드 칼리프(Umayyad, 661-750)를 지나 압바시드 왕조(Abbasid, 750-1258)가 세워졌다. 압바시드 왕조도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헬레니즘문화의 혜택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2대 칼리프 알 만수르(al-Mansur, 754-775)가 762년에 수도를 바그다드(Baghdad)로 옮길때에 네스토리안 교회 본부도 옮겨왔다. 당시 수만 명의 기독교인이 바그다드에 살면서 압바시드 국가 공공 기관과 생활 속에서 고위직 학자와 부자 상인과 공무원과 의사와 교사 등으로 무슬림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압바시드 이슬람 정부는 기독교인들로부터 의학과 수학, 천문, 예술, 직물, 염물 등 각 분야에 걸쳐 상당한 교수를 받았다. 이런 시기에 총대주교(Catholicos) 디모데 1세(Timothy I, 779-823)는 제3대 알마흐디(al-Mahdi, 775-785)와 친분을 유지하여 영향을 미쳤다. 위구르제국(Uigur, 744-1250)도 마니교를 국교로 삼자, 네스토리안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제국 무종때부터 외래종교 배척이 있었다. 이처럼 네스토리안 기독교의 복음의 확산은 이런 강한 경쟁 환경 가운데 일어났었다. 이러한 여러 종교의 환경 속에서도 총대주교 디모데 1세에 의한 네스토리안 외방대주교구 연결망(network)은 아시아의 방대한 지역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스펄러(B. Spuler)는 이 지역에 “기독교인들이 오늘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하였다.
네스토리안은 처음부터 선교적이며 개혁적인 교단으로 주님의 지상명령에 충실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효율적인 복음 전파를 위한 외방대주교구 전략은 매 4년마다 있는 총대주교 선출과 종교회의에 참석하는 선거인단 대주교(metropolitans)와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선교사 대주교로 나누었다. 이 외방대교구에 파송된 선교사 대주교는 본부의 통제에서 완전히 독립적으로 선교활동 할 수 있었다. 이들 선교사 대주교는 총대주교의 동의 없이도 새주교를 세워 임직식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감독 일을 하였다. 그래서 이들 외방대주교구는 매 6년 마다 보고와 선물 대신에 매 4년 마다 총대주교의 방문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대주교의 확대된 권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선교에 있었다. 수도원 역사(Historia monastica)에 따르면, 이들 선교사 대주교의 중요한 일은 “야만 민족에게 목자요 교사가 되며… 설교자와 복음전도자가 없는 곳에 가는”것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네스토리안 총대주교가 아시아 기독교 세계에서 수장 역할을 하였다. 11세기 알비룬니(Albiruni of Khiva)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여기에 기독교 세 파인 멜키트파(Melkits)와 네스토리안(Nestorian), 야곱파(Jacobites)가 있다. 그들 중 가장 많은 수는 멜키트파와 네스토리안이다. 왜냐하면 그리스와 그 인접의 나라들이 모두 멜키트파이고, 시리아와 이라크, 메소포타미아, 호라산(Khurasan)이 네스토리안이기 때문이다. 야곱파는 거의 이집트와 그 주변에 살고 있다”.
네스토리안 신학과 신앙의 첫 본거지인 에데사에서 아르벨라로, 아르벨라에서 니시비스로, 니시비스에서 셀류키아 크테시폰으로, 셀류키아 크테시폰에서 다마스커스로, 다마스커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겨져 갔었다. 그런 가운데, 지경은 더 넓어졌고 복음의 활성화는 더 일어났었다. 1000년도에 바그다드의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약 250명 주교와 20개의 대주교구(archbishoprics)와 인도와 중국까지 관할하였, 당시 전 세계 2억 7천만명 인구 중에 5천만명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그 기독교인들 중에 네스토리안이 1200만명을 주관하였다. 그 당시까지 네스토리안 대주교구는 다음과 같다. 니시비스와 셀루키아 크체시폰, 바스라, 아르벨라, 카르카, 르와르다쉬르, 헤라트, 메르브, 장안, 홀완, 모술, 다마스커스, 바그다드, 라이, 사마르칸트, 간디스푸르, 인도, 알란, 예루살렘, 카쉬카르, 알말릭, 탕구트, 나베카드, 이스파한, 히르타, 카줄, 발크, 뻬이찡이다. 이들 대주교구 중 외방대주교구의 선교 대주교는 본부의 보고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새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또 새로운 주교구및 교회를 개척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네스토리안의 외방대주교구 제도는 처음부터 선교적이면서 개혁적인 신학에 기인한다. 3 · 4세기 안디옥 학파(Schola Antiochena)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양성론을 주장했고 알렉산드리아 학파(Schola Alexandria)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단성론을 주장하였다. 양측의 분쟁 속에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왕실과 부패된 수도사들, 음란한 민중을 교회와 수도원, 지역으로 부터 내쫓을 정도로 개혁적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뿐만 아니라 인성을 강조하여 온전하신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윤리와 도덕의 본보기가 되셨다고 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정치적으로 정죄되었다. 다시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양성론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되어 오늘날까지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후 네스토리우스의 신학과 개혁정신은 그의 추종자들로 인하여 원시 시리아 동방교회와 합하면서 네스토리안 교단을 이루어 아시아의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이후 네스토리안 신학은 실천적이고 선교지향적인 신학이되었다.
총대주교 디모데 1세가 남긴 서신에 의하면 투르크인과 티베트인 사이에도 네스토리안 교리가 퍼졌다고 하였다. 티베트(Tibet)의 서부에 있는 길기트와 라다크 지방에서 발견된 암각에 보면 825-826년에 새긴 네스토리안 특유의 십자가와 함께 소그드어가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카슈가르(Kashghar) 대주교구는 타림 분지 일대와 천산 부근의 초원지역까지, 야르칸(Yarkand)과 우루무치(Urumch), 토크막을 관할하였다. 또한 서역남도 호탄(Khotan)과 서역남도 끝 미란에도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다. 특히 천산남북로가 만나는 투르판(Turfan) 지역 블라이크의 네스토리안 수도원에서 8~13세기 걸쳐 쓰여진 400~500권의 문헌들이 발견되었다. 이 문헌들은 시리아어와 소그드어, 투르크어로 된 것으로 시리아어 페쉬타 성경에 번역된 구절들과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대영광송, 성자와 순교자들의 전기 등 다양하였다. 이 밖에도 명상생활을 강조하는 글과 하루에 일곱 차례 드리는 예배와 관련된 글, 혹은 설교집과 논설, 잠언, 은둔자의 미덕을 찬양하는 글 등도 포함되어 있다. 둔황(Tun-huang) 천불동에서도 시리아어 성경구절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네스토리안과 관련된 내용이 담긴 세 점의 티베트어 문서도 발견되었다. 이렇게 카슈가르의 대주교구의 영향으로 동쪽 투르크 몽골 족속인 나이만(Naiman)과 메르키트(Merkit), 옹구트(Ongut), 케레이크(Kerait)족 가운데도 복음이 확산되었다. 12세기 마리 이븐 술래이만(Mari ibn Suleiman)이 기록하길, 네스토리안 총대주교 디모데 1세가 “투르크 왕이 자기 백성과 함께 우상숭배를 버리고 기독교인이 되었기에, 자신의 나라에 대주교구를 세워달라는 서한을 내게 보내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당시 투르크 어느 왕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정도로 투르크 몽골계 세계에도 복음이 편만하게 퍼졌던 것이다. 이는 보다 앞선 선교전략인 네스토리안 외방대주교구 제도 덕분이라 생각된다.
한편, 당조 무종(841-846)은 845년에 두 번에 걸쳐 종교적 칙령을 단행하였는데, 기독교와 마니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 등 외래종교를 핍박하였다. 그 후 왕선지의 난과 황초의 난이 발생하자 이것이 바로 외래종교 때문이라 하여 외래종교의 신자들 102만여 명을 학살하였다. 이에 많은 네스토리안 기독교인들도 핍박을 피하여 북방 투르크 몽골계와 합하면서 그 지역이 더 복음화 되었던 것이다.
압바시드 왕조 초기까지 이슬람 정부는 기독교인들에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총대주교 디모데 1세의 친구였던 제3대 마흐디가 기독교 비잔틴제국에게 패하자, 압바시드 통치 지역의 몇몇 교회와 수도원을 파괴하였다. 이것이 이슬람속에서의 기독교의 핍박의 시작이 되었다. 제 5대 하룬 알 라쉬드(Harun al-Rashid, 785-809)는 기독교인들에게 공개적으로 표시 나는 옷을 입도록했다. 무슬림 앞에 증인으로 설 수 없고 무슬림의 법규에 따라 그 죄 만큼 벌을 받아 신체불구자가 되어야 했다.
위와같이 8세기 이후 이슬람 압바시드 왕조와 마니교 위구르제국, 외래종교 배척한 당제국 등의 환경속에서도 네스토리안 총대주교 디모데 1세의 앞선 선교전략인 외방대주교구 제도도 빛을 발하여 복음이 꾸준히 확산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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