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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안의 최대 부흥기

[실크로드와 복음루트] 최하영 목사/ GMS 우크라이나선교사 |

(16회) 일칸 제4대 아르군 칸의 서방 외교정책 |

“당신들은 어떤 방식으로 믿는가?” 나는 보이지 않고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단 한 분이신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다. 이 세분은 서로 동등하고 분리될 수 없으며, 처음도 마지막도, 혹은 더 젊지도 늙지도 않는다. 본질(substance)상 그들은 하나이나, 위격(person)상으로는 셋이다. 즉 성부는 낳으신 분(the Begetter)이고, 성자는 낳아진 분(the Begotten)이며, 성령은 움직이시는 분(proceeds)이다. …

1282년 4월에 네스토리안 보호자 일칸(Ilkhan, 1256-1353)의 제2대 아바가(Abaga, 1265-1282) 칸이 죽은 뒤 일칸 건국자 훌라구(Hulagu, 1218-1265)의 7번째 아들인 테구데르(Teguder, 1282-1284)가 제3대 일칸의 칸이 되었다. 테구데르의 어머니는 훌라구의 아내 쿤쿠라트족(Kunkurat) 네스토리안 쿠투이(Kutui Khatun)로 테구데르는 세례명도 받았었다. 이런 테구데르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자 일칸의 기독교인 몽골 장군들은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대략 20년 전 아인잘루트(Ain Jalut)에서 무슬림 바이바르스(Baibars (1260 – 1277) 맘룩크(Mamelukes, 1260-1517)에게 당한 패배와 그 무슬림들로부터 네스토리안 장군 키트부카(Kitbuqa, -1260)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당시 호라산 지방의 총독으로 가 있던 훌라구의 손자이며 아바가 칸의 장자 아르군(Arghun, 1284-1291)을 중심으로 기독교인 몽골장군들이 테구데르와 내전을 일으켰다. 1284년 8월에 아르군이 테구데르를 급습하여 몽골왕실 풍습에 따라 피흘림 없이 등을 부숴 처형하였다. 이에 아르군이 제4대 일칸의 칸이 되었다.

아르군의 아내 우룩 카툰(Uruk Khatun)은 케레이트족 네스토리안 토그릴 왕칸(Toghril, Wang Khan, 1131~1203)의 손녀이자 훌라구의 아내 도쿠즈 카툰(Doquz-Khatun, 1229~1265)의 질녀이다. 우룩 카툰은 아들 울제이투(Oljeitu, 제8대 일칸, 1306-1316)로 하여금 세례를 받도록 하고 교황 니콜라스 4세(Nicholas IV, 1288-1292)의 이름을 차용하여 니콜라스(Nicholas)라는 세례명을 받게 하였다.

1287년 아르군 칸은 몽골 투르계 네스토리안 총대주교 마르 야발라하 제3세(Mar Yaballaha III, 1281-1317)의 추천에 의하여 위구르인(Uighur) 랍반 소마(Rabban Sauma, 1225-1294)을 교황의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동시에 그에게 동로마제국을 비롯하여 이탈리아, 프랑스 및 영국 등을 아우르는 특사의 사명까지 부여하였다. 30여명의 사설단에 쿠빌라이 대칸이 보낸 통역관 이사(Isa Kelemechi)와 함께 제네바 은행의 은행원이면서 통역사인 토마스 안포시스(Thomas de Anfusis), 이탈리아어 통역사인 우구에토(Uguetus)도 있었다. 사절단은 먼저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 안드로니커스 2세(Andronicus II Palaeologus, 1282– 1328)를 만났고 소피아 대성당을 참관하였다.

1287년 6월에 나폴리에 입항하여 로마로 향하던 중 교황 호노리우스 4세(Honorius IV, 1285 – 1287)의 서거소식을 들었다. 새 교황의 선출을 위해 모인 열 두 명의 추기경 앞에서 회견을 가졌다. 이들 추기경들은 네스토리안에 대해서 이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학적인면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몽골 외교관이며 사제인 소마에게 질의하였다. “사도들 가운데 어느 분이 당신네 고장에 복음을 전파하였는가?” “도마(St. Thomas)와 아다이(St. Addai), 아가이(St. Aggai), 마리(St. Mari) 등이 전파했고, 그들이 전해준 관례(rites)들을 지금까지 받들고 있다. 우리의 많은 조상들이 몽골인과 투르크인, 중국인의 땅에 가서 그들을 가르쳐왔다. 오늘날 많은 몽골인이 기독교인이다. 거기에는 세례 받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왕들과 왕후들도 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개종을 한다. 아무도 우리에게 교황으로부터 동방 사람에게 보내주지 않았다. 그 거룩한 사도들은 앞서 우리에게 가르쳤고 그들이 우리에게 전수한 것을 오늘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나는 나의 믿음을 토론하거나 가르치기 위해서 먼 땅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나의 주 교황과 성인들의 유물에 대한 관심과 아르군 칸과 야발라하 3세 총대주교의 서신들을 전달하기 위해서 왔다. 기뻐한다면 토론을 끝내도록 허락하면 좋겠다”.

“총대주교의 거처는 어디인가?” “바그다드이다”. “당신들은 어떤 방식으로 믿는가?” “나는 보이지 않고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단 한 분이신 하나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다. 이 세분은 서로 동등하고 분리될 수 없으며, 처음도 마지막도, 혹은 더 젊지도 늙지도 않는다. 본질(substance)상 그들은 하나이나, 위격(person)상으로는 셋이다. 즉 성부는 낳으신 분(the Begetter)이고, 성자는 낳아진 분(the Begotten)이며, 성령은 움직이시는 분(proceeds)이다. 최후로 이 성 삼위일체 가운데 한 분이신 성자께서 성스러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완전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태어나셔서, 하나님과 본체상 하나가 되어 세상을 구원하셨다. 신성에 있어서 그 분은 영원히 성부와 같고, 인성에 있어서는 그 분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이 결합은 영원히 나누어질 수도 혼합될 수도 압축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합을 지닌 성자는 완전한 신이며 완전한 인간이시다.”

라반소마는 로마에 있는 교회들과 성인들의 무덤을 안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287년 9월에는 파리(Paris)에 도착하여 프랑스왕 빌립 4세(Pilip IV, 1285-1314)를 만났는데 그에 의해 파리의 교회와 종교, 문화를 일일이 소개받고 일칸에 십자군을 지원할 것을 약속하였다. 11월에 보르도(Bordow)에서 영국왕 에드워드 1세(Edward I, 1273-1307)를 만나 십자군 지원에 대한 약속을 받았고 소마에게 미사를 요청받아 네스토리안 주교로부터 성찬식을 받은 영국 왕이 되었다.

1288년 2월 20일 니콜라스 4세(Nicholas IV, 1288-1292)의 교황 즉위식을 기하여 로마에 돌아와 아르군 왕과 네스토리안의 총대주교 마르 야할라하 3세의 친서를 새 교황에게 전달하였다. 마침 사순절 기간이라 랍반 소마는 교황청에서 치르는 갖가지 의식을 관찰하였고, 그 자신이 교황이 참석한 가운데 네스토리안식 미사를 거행할 때 사람들은 그 광경에 놀랐다. “언어는 다르나 그 전례는 같다”고 말하였다. 이는 네스토리안과 로마 가톨릭교회와 사이의 최초의 연합미사예배가 된다. 랍반소마의 서구 여행기는 야발라하 3세전에 기록되어 있고, 현재 교황청에는 당시 그가 휴대하고 돌아온 서한 세 통이 보관되어 있다. 1288년 4월 2일자의 서신들을 랍반소마가 가지고 돌아왔다.

이와 같이 랍반소마의 덕택에 서구의 주교들에게 네스토리안의 신학과 신앙, 의식 등을 처음 소개하면서 주님 안에서 하나임을 발견했을 것이다. 또한 로마 가톨릭의 신앙과 기독교 유물을 보면서 감동했을 것이다. 아르군은 귀국한 사절로부터 유럽의 여러 가지 사정을 듣고 만족하였다. 그래서 라반소마에게는 일칸 궁전 문에 교회를 세우도록 하였다. 교회의 천막을 묶는 밧줄이 왕의 천막의 문과 너무 가까워 서로 엉킬 정도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르군은 그의 아들에게 세례 주는 것을 허락하였다. 아르군은 야발라하 3세 총대주교가 집전한 12명의 네스토리안 서품식 때 네스토리안이 종으로 사용하는 나무 판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총대주교에게 축복을 받도록 명령하면서 자신도 대열에 동참하였다.

이처럼 아르군의 통치 때에 아시아에서의 네스토리안 기독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번창하였다. 몽골의 총대주교 야발라하 3세는 로마의 교황 이상의 교회의 치리권을 행사하였다. 니콜라스 4세 교황은 1289년 7월 13일, 15일에 작성한 세 통의 편지를 프란체스코파 수도사 몬테코르비노(John of Montecorvino, 1246/7-1330)를 통해서 쿠빌라이 대칸(Kubilai Khan, 1260-1294)과 아르군 칸, 야발라하 3세에게 각각 보냈었다. 그 편지에 교황은 가톨릭 선교사를 쿠빌라이 대칸의 조정에 파견하게 되었으며, 파견된 수도사들에게 보호와 지원을 요청하였다.

아르군은 1289년에 자신의 측근인 제노바 상인 부스카렐(Buscarel of Gisolfe, 몽골의 유럽대사 1289 – 1305)을 통하여 니콜라스 4세 교황과 프랑스 필립 4세, 영국 에드워드 1세에게 일 칸의 군대가 이집트 미스르(Misr)쪽으로 출정하면, 자신들은 이쪽에서 출정하여 다마스쿠스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만일 선한 행운의 축복이 임한다면, 우리는 당신에게 예루살렘을 줄 것이다고 하였다. 하늘에 기도며 호랑이 해의 겨울 마지막 달(1291년 음력 1월)에 출정하여 봄 첫 달 15일(2월 15일)에 다마스쿠스에서 진을 치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아르군은 1289년 겨울에 카스피해 남방의 아란 지방에서 킵차크 칸국과의 내전으로 서방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1291년 3월 10일 아르군의 죽음과 함께 서방의 십자군도 끝났다. 이렇게 아르군은 서구의 십자군을 다시 일으켜 이슬람 이집트 맘룩크를 공격하길 원하였지만, 1260년 아인잘루트(Ain Jalut)에서의 첫 패배 후 몽골은 이 지역을 한번도 정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몽골제국 일칸 아르군 칸은 기독교 서방국가들과 가장 친밀하였고 또한 네스토리안 기독교가 가장 부흥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이 옛 페르시아 일칸 지역에 다시 한번 기독교의 부흥이 회복되길 소원해 본다.

필자: 최하영 목사
/ hydavidcho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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