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유크시론 > 날이 어두워갈수록, “소망의 빛을 밝히자”
유크시론

날이 어두워갈수록, “소망의 빛을 밝히자”

[유크시론 159호] 발행인 이창배 목사

자, 이제 한해를 마감할 수 있음이 감사라면, 다시 한해를 시작할 수 있음에 더 감사해야 한다. 정작 한해를 보내고 얻은 고백이 주님이 내 영혼의 닻과 같음을 인정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올 한해를 나름대로 경주해 왔다. 서재에 겹겹이 쌓여진 그 동안 발행된 신문의 두께만큼이나 그 시대, 그 때에 주어졌던 일들이 고스란히 남겨졌음을 돌아보며, 문득 감회가 서린다. 그래도 2014년은 이렇게 12월호와 더불어 마감하게 된다. 뒤늦은 후회도 못다한 아쉬움도 역사속에 묻는다. 그러나 감사하다. 다시 또 새해를 맞이할 소중한 기회를 맞이할 수 있음에 그렇다. 적어도 유크의 발행을 거듭해 오면서 쌓여진 필자의 고백이라고 해도 지나칠 것은 없다.

인생이란 늘 어떤 패턴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어려울 때마다, 혹은 어떤 결정적 선택의 시기가 다가올 때마다 두려움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자칫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통해 주어질 실패에 대한, 아니 생각치 못했던 어떤 결과가 가져다 줄지 모를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일종의 압박감이랄 수 있다.

이러한 압박감이 고조되는 때 마침 떠오르는 한 그림이 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인기 화가이자 조각가인 조지 프레드릭 왓츠(G F Watts·1817~1904년/ 1885년작,‘소망’/Hope·142×112㎝)의 그림이 그것이다. 이름하여 “소망”이란 작품이다. 런던 테이트갤러리에 소장된 왓츠의 작품‘소망’은 지구본 모형 위에 젊은 여성이 홀로 앉아 한 줄밖에 남지 않은 리라를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인데, 자세히 그림을 들여다보면 이 여인은 눈에 수건을 싸매고 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한가지 아는 사실은 이 여인이 지금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리라의 줄은 본래 일곱 줄이었으나 여섯 줄은 다 끊어진 채 한 줄만 남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그림이 주는 메시지는 온통 캄캄해서 앞은 보지 못하고, 일곱 줄 가운데 여섯 줄은 끊어졌지만 그래도 이 여인은 남은 한 줄을 가지고 연주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그림으로 말미암아 실의에 빠진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데 사람마다 보는 시야가 달라서였는지 처음 이 그림을 대한 미술평론가들은 ‘절망’이란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절망인가, 소망인가? 당신의 생각은

필자가 보기에도 이 지구상에는 온갖 내일에 대한 전망이란 언제나 불확실성에 쌓여진 절망적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꼭 절망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절망에 들면 들수록 한가닥 소망을 더욱 굳세게 붙잡기 때문이다. 이 그림이 그렇다. 상황은 절망적인데, 그 절망에 자포자기하는 모습이 아니라 남은 한가닥에 절대적인 소망을 부여잡는 듯한 모습이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서기 때문이다. 어쩌면 절망과 소망은 그 상황을 붙잡는 사람의 선택의 차이랄 수 있겠다. 그러나 왓츠는 이 작품의 제목을‘소망’이라고 고집했다고 한다.

미술평론가들에 의하면, 왓츠의 이 작품은 19세기 말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서구문명의 위기감, 물질에 대한 정신의 회복을 암시해 준 그림으로서 그 진가가 있다고 전한다. 또한 외신에 따르면 오바마는 정치 초년 시절 왓츠의 이 그림에서 미국 정치의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오바마는 자신의 담임 목사인 제레미야 라이트 목사가 1990년 버지니아 연설에서 이 그림 속의 여인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믿음과 희망의 ‘아이콘’이라며, 미국사회의 ‘희망’이라고 역설했을 때,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오바마는 이때 라이트 목사의 연설 내용을 메모해뒀다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를 인용해 “여성에 대한 편견과 탐욕, 인종차별,소외층에 대한 무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며 “끝까지 음악 연주를 해내려는 그녀에게 ‘대담한 희망’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강조했었다. 그는 “한 점의 그림을 통해 누구에게나 소망의 줄이 끊어질 때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자신의 정치적 역할도 모든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데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자서전 《버락 오바마 담대한 희망》(홍수원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에서도 털어 놓았다.

그렇다. 한 작가의 영감이 담긴 한점의 작품은 그 어떤 수백 수천 마디의 호소보다도 힘이 있다. 또한 이러한 작품에 영감을 얻은 한 사람, 그의 가치관의 변화는 놀라운 미래를 열어가는 원동력이 됐음이 결코 과장된 것도 아니다.  

우리시대, 교회의 아이콘은?

언제인가 고 한경직 목사는 똑같은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설교했는데, 이 여인에게 남겨진 한줄은 소망의 줄이라고 했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믿던 모든 줄이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그 소망의 줄만 끊어지지 아니하면 우리 인간은 계속해서 모든 것을 이기고 나갈 수 있다고 하는 뜻이라고 해석하면서, 그 소망의 줄은 바로 영원하신 하나님께 둔 소망이라고 표현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 6: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라고 증거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의 닻에 매인 자”로 연결된다. 이 영혼의 닻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에 대한 소망을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소망, 곧“영혼의 닻”이란 무엇인가?

「닻」이란 배를 일정한 곳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하여 밧줄이나 쇠줄을 매어 물에 던져 내리는 쇠로 만든 제구를 뜻하듯이 “영혼의 닻”이란 우리의 영혼을 튼튼히 묶어 흔들리지 않게 하는 힘의 실존을 말한다. 마치 우리 영혼은 배와 같고 우리 영혼의 소망은 닻줄로 우리를 묶어 놓고 깊은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는 닻과 같아서 언제나 안전성이 없고, 불안하고 흉흉한 바다 위에 떠있듯 온갖 이 세상의 시류와 풍랑을 겪으며, 또 견디어내도록 그리스도인을 요동치 않도록 붙잡아 주는 소망의 근거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러니 누가 우리를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는가?(롬8:35).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닻에 매여져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닻에 묶인 자이다(요 13:1). 그러므로 온갖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넉넉히 이기게 된다(롬 8:37-39). 아멘.

자, 이제 한해를 마감할 수 있음이 감사라면, 다시 한해를 시작할 수 있음에 더 감사해야 한다. 정작 한해를 보내고 얻은 고백이 주님이 내 영혼의 닻과 같음을 인정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더 적극적으로 이 시대의 풍랑을 이겨낼 든든한 소망의 근거가 되는 이 시대의 아이콘을 증거해야 한다. 날이 더욱 어두워갈수록, 소망의 빛을 밝히자.

이달의 말씀 : 히브리서 6:17-20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댓글 남기기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Previous Next
Close
Test Caption
Test Description goes like t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