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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 됨을 바로 알자

[유크시론 202호]  이창배 발행인

이달을 여는 창: 2018-9월호 사설

그야말로 야성이 사라진 교회를 가리켜 예수님의 핏값으로 사신 교회라 부르진 않을 것이다. 고전 1:27-28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말씀하신다. 복음은 겨자씨로 비유되듯 작지만, 그 자체가 힘이요, 능력이다…

지난 8월은 참 뜨거웠다. 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프라하를 방문했다가 유럽에 닥친 더위를 실감했다. 제법 규모를 갖춘 호텔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했는데, 이때 배정받은 방은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는 방이라 한낮에는 뜨거운 열기로 인해 이용을 거의 할 수 없었다. 저녁에도 낮의 열기가 식지 않아서 방의 창문을 활짝 열고 잠을 청했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우정 참석자들에게 어려움을 주려고 한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그 주된 이유는 이렇게 더워질지 예측을 못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프라하 인근의 호텔들은 전통적으로 예년의 여름철이 그다지 뜨겁지 않았기에 냉방시설을 골고루 갖추지 않았다 한다.
유독 뜨거운 여름철을 지루하게 보내면서 언제부터인지 모르는 가운데 비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시원스레 비 한번 내렸으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 종일 맑던 하늘이 급작스레 변화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먹장구름으로 순식간에 덮여 금세 사위가 어둑해졌다. 그뿐인가? 온종일 더위에 지쳐 축 늘어진 나뭇가지가 급작스레 흔들리더니 걷잡을 수 없는 강력한 바람이 지난다. 가까이 공간을 가르는 번개가 내려치고, 굉음을 지르며 천둥소리가 땅을 진동시킨다. 무슨 큰비가 오려나?
그러잖아도 천둥 번개와 소나기의 예보가 있었기에 당연히 한바탕 무더위를 가르고, 오랜 가뭄을 해갈시켜줄 큰비가 내릴 것을 기대한 터라 내심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십여 분 요란을 떨더니만 이윽고 사방이 조용해진다. 세차게 불던 바람과 함께 비구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금 하늘이 환해지고 말았다. 허탕한 생각이 든다. 그럴 바에야 요란을 피지나 말 것이지.
유난히 더운 여름, 비 없이 버텨온 나무들을 보니, 때 이른 가을인 듯 착각이 생긴다. 바싹 말라 고사한 나무도 있고, 늦가을 단풍처럼 색바랜 나뭇잎을 길바닥으로 뿌려대는 나무도 적잖다. 길가의 들풀은 이미 누렇게 타버린 지 오래다. 이전에 언제 그렇게 비 오기를 갈망해 본 적이 있던가? 비 올만 한 징조만 보여도 그리 기쁜 적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기다림도 아닌데 한낱 비 소식에 마음이 끌리다니 생각해 볼수록 스스로 우습기만 하다. 그래도 한편에 야속한 마음이 가셔지질 않는다. 누구를 향한 야속함인가? 아무 근거도 없는 이 비릿한 여운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비교 프레임에 갇혀서
왜, 그런 날이 없겠는가? 기상의 이변과도 같이 뜻밖의 일들이 만들어지곤 한다. 적잖이 경험하면서도 한동안 잊고 살다 보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가 머리만 갸우뚱거리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사실 많았고 지금도 많다. 지금 겪는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또한 그렇지 않은가?
금세 뭔 일이 터질듯하다가 갑자기 스러져버리는 일, 소리 없이 사그라지는 일, 자취도 없이 스며드는 일 같은 경우를 겪어보지 않았던가? 남들은 전혀 관심이 없는데 혼자만 열 내고, 들뜨고, 서둘다가 끝내는 시무룩해지는 감정의 반복도 결국엔 비교 프레임의 작용이 아닐까 싶다.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가 펴낸 《프레임》(2011, 21세기북스)에서 ‘지혜롭게 사는 법’에 소개된 내용을 인용해 보자면, “1995년, 미국 코넬 대학교 심리학과 연구팀이 1992년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메달 색깔이 결정되는 순간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분석했다. 분석 결과, 동메달리스트의 행복 점수는 10점 만점에 7.1로, 은메달리스트의 행복 점수는 4.8로 나타났다. 객관적으로 보면 은메달리스트가 동메달리스트보다 더 큰 성취를 이룬 것이 분명한데 감정은 이와는 반대였다. 대체 왜 은메달리스트가 동메달리스트보다 불행한 것일까?”
그 이유는 자신이 얻은 것과 얻을 수 있었던 것을 비교하는 ‘비교 프레임’의 작용 때문이란다. “은메달리스트는 ‘내가 거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갔어도 금메달이었는데….’ 하고 금메달리스트와 자신을 비교한다. 하지만 동메달리스트는 까딱 잘못했으면 ‘노메달’이었기 때문에 동메달을 땄다는 사실에 큰 만족감을 느낀다. 즉 비교 프레임을 통해 현실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라고 실험결과를 인용했다.
곧, 심리학에서 정의하는‘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을 의미한다.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세상을 관조하는 사고방식, 세상에 대한 비유,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하기에 결국 자신이 설정한 프레임을 벗어나는 것이 지혜라고 한다.

메뚜기 프레임을 벗어던져라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가?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마 13:31).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란다. 물론 천국의 비유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의 눈은 내 손안에 들려진 겨자씨의 크기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현실이 아닌가? 거기에서 비교 프레임의 싹이 튼다.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 상대방은 아낙 자손과 같은 거인의 족속 정도로 비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내가 가진 복음을 세상이 보는 잣대로 규정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는 꺼리는 것이요, 지혜나 철학과 웅변과 변론이라면 모를까 그러니 경청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조롱과 경멸의 대상에 불과할 따름으로 여기게 된다. 이제 세상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높고, 장대한 데 비해 오뉴월 메뚜기쯤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여기며 “그냥 되는대로 살자”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자존감을 높이고 살리는 일이 무얼까? 곳곳에서, 또한 만나는 사람에게서 이 같은 패배주의적 향취를 맡는다. 그 향기는 비릿하고, 고약하다. 오히려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것은 아닌가? 모르긴 몰라도 이따금 로마의 카타콤에서 느껴지던 그 음습한 기운을 떠올리게 된다. 정말로 그럴 수는 없다. 그렇게 내버려 둬서도 안된다.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었든지, 세상이 그렇게 씌었던지 이제 원점에서 메뚜기 프레임을 벗어던져야 할 때이다.
그야말로 야성이 사라진 교회를 가리켜 예수님의 핏값으로 사신 교회라 부르진 않을 것이다. 고전 1:27-28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말씀하신다. 복음은 겨자씨로 비유되듯 작지만, 그 자체가 힘이요, 능력이다. 최첨단과 마천루와 최대 크기를 우상으로 삼는 세상 앞에 맞서 다윗처럼 영적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 부와 권세와 권력 앞에 물러서지 말고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한다. 나의 나 됨을 바로 알자. 겨자씨 한 알일지라도 그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심을.

이달의 말씀 ㅣ 마13:31~32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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