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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역사투어

그린란드 최초의 선교사 한스 에그더

[교회유적기행] 최용준 목사/ 한동대학교 교수 – <7회> |

18세기 초, 덴마크에 의해 재 개척된 그린란드 |

에그더는 베르겐 그린란드 회사(Bergen Greenland Company)를 설립하여 ‘희망’호 및 두 개의 작은 배를 타고 가족들 및 40명의 선원들과 함께 1721년 5월 2일 베르겐을 떠나 7월 3일 그린랜드의 누프 캉거루아(Nuup Kangerlua)에 도착하여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내 게르트루드(Gertrude)는 그보다 13살이나 연상이었지만 믿음은 남편보다 더 강하여 선교 사역 내내 큰 위로와 격려로 힘을 실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린란드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큰 섬인 동시에 인구는 가장 적은(약 5만 7천명) 덴마크의 자치령입니다. 또한 이곳은 여름에는 24시간 해를 볼 수 있지만 겨울에는 24시간 해를 볼 수 없는 어두운 계절입니다. 이 섬에는 캐나다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이는 원주민들인 이누이트(Inuit)족이 오래 전부터 살고 있었으나 986년에 노르만 족인 에이리크(Erik the Red)에 의해 발견되면서 이 섬의 이름을 ‘초록의 땅’이라는 뜻의 ‘그린란드’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 때부터 노르만 족이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나 원주민들과 충돌이 잦았고 척박한 환경 및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할 자원의 부족으로 인구 증가에 큰 어려움을 겪다가 유럽에서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교류가 완전히 중단되어 결국 노르만 족 거주지는 소멸되었습니다. (ko.wikipedia.org/wiki/그린란드)
하지만 18세기 초에 이곳이 덴마크에 의해 재개척되면서 이 섬에 최초로 복음을 전한 선교사는 노르웨이 출신인 루터란 선교사 한스 에그더(Hans Egede: 1686–1758)입니다(사진 1). 그는 1728년에 지금의 수도인 누크(Nuuk)에서 첫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지금도 그린란드의 사도(the Apostle of Greenland)로 불립니다.

그는 노르웨이 북극 근처인 하스타트(Harstad)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덴마크의 성직자이어서 그는 1704년에 코펜하겐 대학에 가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졸업 후 안수를 받아 로포튼(Lofoten)에서 목회를 하다가 그린란드에 관해 듣게 되었고 소명을 느껴 1711년에 그는 덴마크 왕 프레드릭 4세(Frederick IV)의 허락을 받아 그곳에 가서 선교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북유럽의 작은 나라 덴마크는 개신교 국가들 중 선교의 시급성을 가장 먼저 인식한 나라 중 하나로 당시 국왕이었던 프레드릭 4세는 독일 경건주의, 특히 할레(Halle)에서 활동하던 프란케(A.H. Francke)의 영향을 받아 1714년에 선교회를 설립하였고 이 그린란드 프로젝트를 후원하였습니다.

에그더는 베르겐 그린란드 회사(Bergen Greenland Company)를 설립하여 ‘희망’호 및 두 개의 작은 배를 타고 가족들 및 40명의 선원들과 함께 1721년 5월 2일 베르겐을 떠나 7월 3일 그린랜드의 누프 캉거루아(Nuup Kangerlua)에 도착하여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내 게르트루드(Gertrude)는 그보다 13살이나 연상이었지만 믿음은 남편보다 더 강하여 선교 사역 내내 큰 위로와 격려로 힘을 실어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선교 사역은 소위 자비량 선교(a tent-making program)이어야만 했습니다. 즉 원주민들과의 교역을 통한 선교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원주민들과의 접촉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샤머니즘적 미신이 너무 강해 처음에는 사역이 별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원주민들의 외모는 매우 불쌍해 보였으며 전혀 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특히 한번도 목욕을 하지 않아 냄새가 매우 심했다고 합니다.

선교지에서 첫 예배를 드렸으나 원주민은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한스도 다른 무역상인들처럼 조금 후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갈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헌신적으로 그들을 섬기자 원주민들도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었습니다. 그들이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죽으면 장례를 치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축복에 대해 전해 주었습니다.

특히 1733년에 천연두가 무역선으로부터 섬으로 들어와 섬 전체를 휩쓸자 한스와 그의 아내는 헌신적으로 이 원주민들을 돌보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감동을 받은 원주민들이 복음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아들 폴(Paul)은 현지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면서 성경을 번역하고 복음을 증거하여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1724년에 그는 처음으로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 중에 두 명이 덴마크에 와서 진젠도르프(Zinzendorf)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모라비안 그리스도인들의 그린란드 선교도 시작되었습니다.

에그더는 당시 덴마크 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담대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교도들이 존재하는 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선교의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과 단지 무역만 하는 데 만족한다면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gfamissions.org/pages/learn-and-promote/detail/3/32/)

그린란드에 천연두가 돌자 전체 인구의 절반이 사망했고 아내도 소천하게 되었습니다. 15년의 사역 이후 아내의 장례를 위해 에그더는 코펜하겐으로 돌아왔는데 그린란드 선교신학원의 총장으로 임명되었고 1741년에는 그린란드 루터교회의 총회장이 되었습니다. 1747년에는 그린란드에서 사용되는 요리문답이 완성되었으나 1758년 그는 72세의 나이로 덴마크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현재 그린란드에는 그의 이름을 딴 마을(Egedesminde)도 있으며 그를 기념하는 교회도 누크에 있고(사진 2) 그의 동상도 누크(사진 3)와 코펜하겐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의 자녀들 및 손자도 대를 이어 그린란드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눈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정녕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시 126:6).

사진 1/ 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1/10/Hans_Egede.jpg/242px-Hans_Egede.jpg

사진 2/ cdn.simplesite.com/i/c9/91/284571206596792777/i284571214387157376._szw1280h1280_.jpg

사진 3/ s3-eu-west-1.amazonaws.com/condidact.dk.images/0c52369fb48838f896581c3b371d7117-26922.no_watermark.302_45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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