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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성화” 바로 가르쳐야

[한국교회를 말한다] 김남준 목사/ 열린교회

⑥ 성화를 목표로 목회하자

목회의 꽃은 회심이며, 그 영광은 교회가 참된 신자로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힘은 사상과 윤리의 힘이니, 이는 곧 지식과 사랑이며 이 둘을 하나로 묶어 신자의 인격과 삶 안에서 성령의 은혜로써 역사하도록 돕게 하시려고 목회자들을 세우셨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회가 진리와 성령으로 가득하게 하자…

김남준목사

우리는 종종 조국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을 신화처럼 이야기한다. 현대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특별한 경우였음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전도에 헌신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예수 천당과 불신 지옥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며 원색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교회의 역량을 집중했다. 그리고 그러한 열정에 사로잡힌 전도자들의 헌신으로 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이 가능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교적 성과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 특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에 대한 오용은 구원에 대한 신학적 균형을 잃은 견해가 강조되며 나타난 어두운 그림자이다. 원래 마르틴 루터(M. Luther)를 비롯한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재발견된 ‘이신칭의’ 교리는 구원에 있어서 사제의 중보나 인간의 공로가 개입할 가능성을 일체 배격하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이며 믿음에 의해 수납되는 선물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쪽의 싸구려 구원

오늘날 조국교회에는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확실한 어조로 “아멘!”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구원의 증거라고 받아들이는 주관주의적 경향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나 어찌 구원 문제가 당사자의 확신 하나에 의존한단 말인가?
내가 어렸을 때, 교회에서 제시받은 기독교 신앙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높이 솟아 있는 좁은 길을 걸어가는 존재로 그 길의 양편에는 지옥 불이 펄펄 타오르고 있는데, 어느 지점에서 그 길은 가로지르는 큰 구렁으로 끊어져 있다. 그리고 그 구렁 건너편은 푸른 풀밭에서 천사들이 손짓하는 천당이다. 가로지르는 구렁을 사이에 두고 끊어진 두 길을 십자가가 다리처럼 놓여 연결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이미지였다.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풍경이 선명하게 마음에 새겨졌는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가능성은 신앙생활 잘못 하다가 지옥같은 낭떠러지에 떨어지든지 혹은 황금집이 있는 천당에 가든지 둘 중 하나였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 신학적으로 매우 잘못된 생각을 갖도록 만들었다. 즉, 종말에 누리게 될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선취적으로 누리는 영적 기쁨과, 아직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세상 나라와의 투쟁 가운데서도 종말을 기다리는 선(線)적 행복과, 매 순간 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누리는 점(點)적 행복이 균형있게 강조되지 않게 되었다.
예수 믿고 구원받기만 하면 하나님도 우리의 구원을 취소할 수 없다는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실한 삶을 격려하기보다는 무율법주의적인 삶으로 나아가게 만들었으니, 오늘날 개신 교회에 불어 닥친 도덕적 해이는 이미 예견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율법주의를 지나치게 경계한 나머지, 마치 신자의 도덕생활에 따라 구원이 취소되거나 다시 획득될 수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을 세밀한 논리적 순서, 소위 ‘구원서정’(ordo salutis)으로 나누어 극히 파편화 하는 것은 루터나 칼빈을 비롯한 1,2세대 종교개혁자들과 초기 개혁파정통주의자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이러한 구원서정의 파편화는 하나님 주권 중심의 구원교리를 논리적으로 변증해야 할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 1618년-1619년) 이후의 일이었다. 칼빈은 신자의 구원과정 전체를 ‘신생‘(新生)의 과정이라고 보고 통합적으로 이해했으니, 이러한 견해를 쉽게 요약하자면 ‘구원받은 자는 필연적으로 구원을 이루어 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구원에서 구원에 이르는 전 과정이 그리스도를 통한 삼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통치임을 강조하였다. 그것이 바로 칭의와 성화의 균형있는 강조였다.

‘성화’란 무엇인가?

신학적으로 ‘성화’(聖化)란 “죄인의 전 본성을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이다. 구원받은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은,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세상을 개척하고 돌보고 가꿈으로써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인류사회에 드러내도록 지은 바 된 인간 존재의 본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은 바로 죄 때문에 창조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들을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이었다.
구원받은 신자가 모든 죄를 용서받았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진 사람이지만, 여전히 잔존하는 죄가 있어서 죽는 순간까지 거룩한 은혜로써 잔존하는 죄의 영향력과 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 신자의 순종을 사용하셔서 은혜로써 불완전한 신자를 온전하게 하시는데 이를 ‘성화’라고 부른다.
신자의 성화는 곧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형상은 하나님을 닮은 영혼과 정신의 특성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의 근거가 된다. 나아가 인간의 육체까지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근거가 된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에 교회를 두신 것은 참 인간이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보여주고자 하심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통해 드러나야 할 하나님의 영광인데 이 영광의 크기는 신자 각 사람의 성화의 총합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바와 같이 세상에 있는 동안, 신자는 하늘의 새 성품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옛 성품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칭의의 구원은 필연적으로 성화의 소명을 내포한다.

행복에 이르는 길

오늘날 조국교회 안에 유포되고 있는 도덕적 해이는 그 문제의 뿌리가 윤리가 아닌 신학에 있다. 통합적인 사상과 균형 있는 구원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칭의의 구원은 성화의 교리 안에서 그 의미가 빛나며 값없이 주어진 은혜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그러나 진지하고 거룩한 열정으로 성화를 가르치는 교회가 얼마나 소수인가?
오늘날 조국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다음 신앙의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예수의 인격과 삶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할 절박한 소명도 못 느끼고 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칭의 받은 자의 소명인 성화라는 목표를 성공과 번영으로 대치하고, 불신자이던 때 자신의 힘으로 이루려던 세속주의의 꿈을 예수 믿고 난 후에는 예수 덕분에 이루어 보려고 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택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삶의 방식은 새로운 세계관과 인생관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영적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새로운 본성이 심겨졌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이미 받은 구원과 그 완성 사이에서 “이미~ 아직”(already…but not yet)의 긴장 속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미 구원을 얻었고 그것은 결코 취소될 수 없이 확정적이지만, 그 결국에 이르기까지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야 할 소명이 있기 때문에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간절히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토마스 아퀴나스(Tomas Aquinas)는『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제집 해설』에서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은 지성의 행복임을 역설하였다. 이는 인간의 참된 행복이 우선적으로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가 <인생의 행복>에서 말한 바와 같이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성공과 번영을 강조하는 현세적 소망의 전도방식이 전쟁 후 물질적 빈곤과 정신적 좌절에 빠졌던 많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 발자취의 밝은 길 이면에는 어두움이 있다.
지난 삼사십년 동안의 번영주의는 오늘날 신번영주의로 이름을 바꾸며 부정의 민낯을 감추었다. 그러나 생리적이고 물질적인 희구에서 에이브러햄 매슬로우(A. H. Maslow)가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욕망의 가장 높은 단계로 거론한 ‘자아실현’으로 그 목표가 상향되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러한 삶은 복음이 가르치는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 아니다(고후 5:17).
조국교회는 뜨거운 전도의 열정으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할 절체절명의 피 어린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가? 신자는 이미 하늘 생명의 맛을 본 사람들이다. 어찌 예수 이름 빙자하여 이 땅에서 이룬 성공과 번영, 의미를 모르는 세상 지위와 업적에서 그것과 같은 맛을 느끼겠는가? 거듭난 신자는 이미 하나님으로써만 행복을 누리도록 영혼이 변화된 사람이며, 그분께 순종하며 살도록 그의 본성에 믿음과 함께 사랑이 심겨진 새로운 피조물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한 것이 최고의 선교이니, 이는 그 행복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행복해지는 그런 차원의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행복은 지성이 하나님의 진리를 인해 즐거워하고 의지가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는 데서 오는 행복이다. 이러한 행복은 반드시 신자 자신의 영혼과 마음이 성령의 은혜로 덕스럽게 변화되는 데서 온다. 한 사람의 삶은 그의 마음이 그린 궤적이다. 둘은 하나다. 변화된 영혼과 마음의 성향, 본성과 인격, 거기서 흘러나오는 참스러운 생활이 하나가 될 때, 그는 참으로 세상을 향해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사람이 된다.

성화를 목표로 목회하자

목회는 교인들이 참 사람이 되도록 말씀으로 봉사하는 일이다. 그 ‘참 사람’에 이르는 길이 바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기에, 목회자 자신이 먼저 그 길을 감으로써 존재의 울림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빈부도 예수 안에서 발견한 진리를 따르는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귀천도 진리에 합치하고자 붙들고 있는 삶의 뜻을 바꾸지 못하고, 무력과 위협도 그의 뜻을 꺾어 무릎 꿇게 못하나니, 이런 사람이 바로 ‘성도’다. 참 ‘도’(道)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하고, 그 행복 속에서 아직도 그 분 때문에 행복해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이 성도다. 그래서 성도는 고난과 핍박, 시련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라는 질문에 기쁘게 대답한다. “그렇다.”
목회의 꽃은 회심이며, 그 영광은 교회가 참된 신자로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힘은 사상과 윤리의 힘이니, 이는 곧 지식과 사랑이며 이 둘을 하나로 묶어 신자의 인격과 삶 안에서 성령의 은혜로써 역사하도록 돕게 하시려고 목회자들을 세우셨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도록 부름 받은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회가 진리와 성령으로 가득하게 하자. 거짓과 허위, 과시와 허세를 버리고 본질적인 사명으로 돌아가자.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 번영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이바지하는 목회를 하자. 그리하여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앞에서 목회자의 면류관이 될 성도들이 성화를 통해 더욱 온전한 사람들이 되도록 진리와 은혜로 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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