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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형상” 닮은 사람이 되라

[한국교회를 말한다] 김남준 목사/ 열린교회

⑦ 목양의 전통을 회복하자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는 목양의 아픔 속에 목회 영광 있다.
목회의 결국은 목회자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수천 명의 교인들을 목양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것은 한 사람을 목양하는 것이니, 그것은 바로 목회자 자신이다. 목회의 길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아직도 남아있는 자기 사랑과 교만을 못 박는 과정이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남준목사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목회자의 모습은 오늘날 그것과는 너무나 다르다. 그때 내 마음 속에 남겨진 목회자의 이미지는 약간 시대에 뒤떨어진 순박하고 선한 선생님 같은 분으로서, 무욕(無欲)의 삶을 살며 소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 낡은 가방을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교인들을 심방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 있으면 찾아가 위로하고, 새벽에 가장 빨리 교회에 나와 아침 늦은 시간까지 기도하고, 예배시간마다 열렬히 설교하는 모습이 ‘목자’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목회란 무엇인가?

언젠가 교리반에 모인 성도들에게 질문했다. “목사는 누구인가?” 대답은 “교회의 대표자”, “교인들의 인도자”, “교회 행정의 법적 책임자” 등 다양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 중 아무도 목사를 진리(眞理)와 연결 짓는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목회(牧會)는 문자 그대로 ‘양무리를 치는 것’이다. ‘목’(牧)이라는 표현 속에는 “영혼을 돌보되 그들을 어떤 질서로 인도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요 10:2). 널리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벳저-벨테의 교회사전>(Wetzer und Welte’s Kirchenlexikon)은 목회의 목표를 ‘영혼의 치료’(cura animarum)라고 규정하고, 목회란 “불멸하는 영혼들을 위하여 하나님과 그리고 교회에 의해 합법적으로 위임된 바를 따라 지역 교회 안에서 실행되는 행동들이다”라고 정의한다.
종교개혁은 중세 시대에 사라진 초대교회 목양의 전통을 다시 회복한 운동이었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은 사제에 의해 시행되는 성사는 ‘그 행위 자체로 유효하게 된다’(ex opere operato)는 미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교권에 의한 양떼들의 지배를 정당화 하였다. 그러나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배격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구원의 조건은 오직 믿음이며, 이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올바른 선포에 의해 불러 일으켜지고 보다 강화된다고 믿었다. 루터는 1517년 비텐베르크 선언 이후, 약 10년이 지났을 무렵부터 신앙에 있어서 개인적이고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뚜렷이 강조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따라 마틴 부써(M. Buccer)의 영향을 받은 칼빈(J. Calvin)과 요한네스 아라스코(Joahannes a’Lasco)가 이끄는 개혁교회 진영은 영혼을 돌보고 치료하는 것을 교회의 직제를 세우신 중요한 목적으로 받아들였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에 머무는 기간은 영적인 스승인 부써로부터 영혼을 돌보는 목양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소중한 기회였다. 칼빈이 제네바로 귀환하여 다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규칙적이고 정기적인 심방을 실천하였는데, 이는 스트라스부르의 목회자에게서 배운 것이었으며, 이것은 이후 칼빈주의를 따르는 개혁교회 목회의 전통이 되었다.
목회적 돌봄을 통한 ‘영혼의 치료’는 교회가 자의적으로 선택한 과업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위임받은 일이다(요 21:16). 교회는 세 가지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바로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교회 자신을 섬기기 위함이다. 이 세 가지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바라보지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하나님을 향한 섬김은 예배로 (2)세상을 위한 섬김은 전도와 봉사로 (3)교회 자신을 위한 섬김은 목양으로 나타난다. 교회는 자신의 품 안에 있는 양떼들을 잘 돌봄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으로 세워지도록 도와야 한다. 이는 구원받은 신자들을 온전하게 하고, 또한 그들을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하고자 함이다(딤후 3:17).

목자 없는 양들

오늘날 현대인들은 급격한 도시화에서 오는 많은 문제들을 겪고 있다. 생산과 유통, 소비의 인프라를 사용하기 위해 사람들은 도시에 모인다. 전 세계 인구 95퍼센트가 인구 2만 이상의 도시에 산다고 한다. 경제활동을 중심으로 구성된 도시문화 구조에서 그들은 치열한 경쟁과 심각한 소외를 경험한다. 도시를 중심으로 번성하는 향락문화도 어떻게 보면 이러한 소외감의 종교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영국의 사상가 체스터턴(G. K. Chesterton)은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라고 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교회에 다닐 필요성이 점점 감소한다고 생각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져야 할 필요성은 오히려 더욱 증대되고 있다. 따라서 참으로 교회가 목양의 전통을 회복하는 것은 교회 뿐 아니라 현대인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굳이 클라이드 레이드(C. Reid)의 ‘군중 속의 고독’이나 라인홀드 니버(R. Niebuhr)의 ‘도덕적 개인과 부도덕한 사회’에 관한 이론을 배우지 않더라도, 현대인이 향락, 절제력의 상실, 소통 능력의 저하, 우울증, 자살, 가족 관계의 붕괴 등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더욱 자신들의 영혼과 정신을 이해하고 삶을 나누며 따뜻하게 돌보아 줄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후기 산업화 사회에서 보편화 되어 있는 개인주의적인 삶의 양식은 더욱 목양적 돌봄의 필요성을 증대시키고 있다.

목양의 두 기둥: 지식과 사랑

‘목회학’을 영어로 ‘포이메닉스’(poimenics)라고 부르는데, 이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헬라어 ‘포이멘’에서 온 말이다(엡 4:11). 목동이 양을 사랑과 지식의 교감 속에서 돌보듯이, 영혼들을 진리와 은혜로써 돌보아 구원의 계획에 합당하게 살게 하는 것이 목회다.
마지막 교부인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면서 “그분의 선함은 자신의 성품이며 비본질적 은사가 아니다” 라고 말했다. 이는 그분의 섬김을 뒤잇는 목회자들이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비록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인간은 아니지만, 목회의 선함은 은사가 아니라 거룩한 성품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목회자는 교인들을 위한 목회자가 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로부터 목양을 받음으로써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했고, 또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목양의 목적은 단지 교회라는 구조를 지탱 가능하도록 세우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개혁교회의 목양 전통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종교개혁자 마틴 부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의 개혁에 관해 가장 엄중하게 요청되는 바는, 회중들에 대한 적절한 돌봄과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목회적 돌봄의 실행이다.”
‘영혼의 치료’ 혹은 ‘돌봄’은 단지 교회에 대한 사회적 비난에 대한 보상이나 과시로서의 구제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인 교회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교회의 직제는 격식차림(punctillio)이나 교인들에 대한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중생자로 하여금 회심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고 중생한 신자들로 하여금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고 그 소명을 완성하도록 돕는 영적 돌봄이다. 이것을 ‘영혼의 치료’라고 부르는 것은 목양이 끊임없이 인간 안에 있는 질병과 같은 죄의 성향을 다루는 섬김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친 바와 같이 그러한 치명적 질병에 대한 처방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약’(medicina) 뿐이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자신을 ‘도’(道)라고 하셨다(요 14:6). 이는 당신이 바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이르게 하고 참 행복을 누리게 하는 진리이심을 의미한다. 뛰어난 종교가들과 탁월한 철학자들이 그렇게 찾고 도달하기를 원했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던 ‘도’인 ‘그 진리’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 진리’로서 우리가 믿고 따르며 살도록 주어졌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떼들을 위한 목자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다(요 1:14).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랑과 지혜로써 하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에 계실 때 은혜와 진리로 양떼인 인간을 돌보셨다. 그리고 지금도 성령의 은혜와 당신의 진리인 성경으로써 교회를 돌보신다. 교회는 목양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왕 되심(kingship)을, 나아가 세상의 왕 되심을 구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구속하셨다. 또한 교회의 머리로서 지혜와 사랑으로 목회자와 성도들을 세우사 당신의 양떼들을 목양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인 성경 말씀과 은혜를 통한 사랑의 감화로써 양떼들을 돌보아 각 사람을 온전한 신자가 되게 하여야 한다. 이 일은 단지 목회자에게만 주어진 사명이 아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아 성장한 모든 성도들에 의한 영혼 돌봄의 사역들이 촘촘히 짠 그물과 같이 연결되어 소외되는 사람이 없이 목양의 혜택을 누리게 해야 한다.
교회에 여러 일꾼들을 세우신 것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각 사람을 온전하게 함으로써, 교회가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보여주어 온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며 창조 목적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성경 말씀으로써 창조와 구원을 위한 그분의 지혜와 사랑을 안 사람이어야 한다. 이 지혜는 곧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며, 목회자는 이 지식을 통해 교회가 사랑으로 점점 더 풍성해지도록 섬겨야 한다(빌 1:9, 3:8).

목양, 그 고난의 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완수하여야 할 목양의 사명이 이처럼 중요하지만, 그것을 실현해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희생을 감당하게 하는 것은 직무에 대한 헌신이나 야망일 수 없다. 그것은 우리를 목양의 사명으로 부르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목양의 사명으로 부르시기 전 그에게 오직 한 가지를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
그리스도의 고난은 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오직 구속주로서 그리스도만이 당하실 수 있는 배타적인 고난이다(마 26:31, 벧전 2:24). 둘째는 교회의 머리로서 신자들이 함께 하도록 허락하신 참여적인 고난이다(골 1:24). 목회자와 성도들은 모두 이 고난에 참여하여 그것을 자기의 ‘육체’에 채움으로써,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현재적 경험 속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자신 안에서 실재화되는 것을 경험한다. 양떼를 돌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목양의 길은 끊임없는 자기 죽음의 길이다. 그리고 이것은 목회자들로 하여금 “만물의 찌꺼기와 같이” 되게 하는 고난이고(고전 4:13),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여기게 하는 아픔이다(고후 1:9). 그러나 목회자는 목양을 위해 이렇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소명을 이루어 갈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 따라서 목회자가 성화되는 것과 목양을 하는 것은 하나다.
목회자의 야망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람됨’을 능가하는 지위에 오르려 하고, 자신이 소망하는 무엇을 ‘진실함’의 가치보다 더 높게 여기는 데서 비롯된다. 수천 명의 교인들을 목양하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것은 한 사람을 목양하는 것이니, 그것은 바로 목회자 자신이다. 목회의 길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아직도 남아있는 자기 사랑과 교만을 못 박는 과정이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회의 꽂은 회심이니, 그 꽃은 언제나 목양의 아픔 속에서 피어난다. 목회의 영광은 교인들이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이니, 그것은 목양의 수치 속에서 더욱 찬란해진다. 목회의 결국은 목회자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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