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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 돌아보아야 할 것들

[유크시론 204호]  이창배 발행인

이달을 여는 창: 2018-11월호 사설

이사야가 본 2700년 전 유대 사회의 모습이다. 그런데 어쩜 오늘날에도 그 관행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 사회는 그렇다 치고 교회의 양극화는 어떤가? 이를 바꿀만한 힘도 능력도 없지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불평과 불만족은 늘어나고, 감사는 퇴색한 세태에 편승해 무감각해지고, 무정해지고, 경건함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말씀 앞에서 곧추세우자. 교회들이여, 그리고 돌아보자…

11월은 감사의 달이다. 봄, 여름, 가을의 약동과 번성과 추수를 마무리하고 안식에 들어가는 시기이다. 있는 자에게도, 없는 자에게도, 많이 거둔 자에게도, 적게 거둔 자에게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에누리가 없는 시간이다. 누군가를 위해 더 기다려 주는 그런 특혜도, 배려도, 미련도 없다. 이 엄정함 앞에 감사한다.
어느 누가 올봄, 겨우내 얼었던 땅을 파헤치며 밭을 갈고 그 위에 곡식의 씨앗을 뿌리지 않고, 여름의 긴 가뭄에 애간장을 태우며 까맣게 타들어 가는 밭에 나가 눈물로 비 오기를 기도했었던가? 누군가 허리가 꺾어지는 고통을 인내하지 않고 풍요의 계절에 곡식단을 추수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무엇도 노력하지 아니한 사람에게 가을 녘은 그저 부질없음을 알려주는 자명종과도 같으니 또한 감사치 아니할 수 없다.
위키백과에 따르자면,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하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는 라틴어로 덧없는 시간, 임박한 죽음에 대한 경고로서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죽음이 옆에 있음을 기억하라’란 의미이다.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라는 경종의 의미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
역시 위키백과에서, 인디언 나바호족에게서도 이와 같은 “메멘토 모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했다 한다.
참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잠시 잠깐 지나는 초침을 보고 있노라면 그 지나는 속도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진다. 가볍고, 빠르고, 날쌔다. 이 순간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그 생각조차 유치하여 가벼이 넘기다 보니 1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난다. 그렇게 지난 다음에야 어찌한단 말인가? 그러니 그때그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항상 지금이라는 시간은 이미 그 결과를 내포한 시간이다. 갈 6:7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선언한다. 이 공의 앞에 감사할 따름이다.

유로지비의 제자도
“나에게 마지막 5분이 주어진다면 2분은 동지들과 작별하는데, 2분은 삶을 돌아보는데, 그리고 마지막 1분은 세상을 바라보는 데 쓰고 싶다. 언제나 이 세상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은 단 5분뿐이다”라는 유명한 문장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에 나온다. 어쩌면 도스토옙스키의 가치관이랄 수 있을 “삶은 5분의 연속이다”라는 의미를 이 장엄한 가을에 다시 생각한다.
이 가을에 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다면, 아니 5분간이라는 마지막 남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감사이다. 모든 조건과 환경을 떠나서 전적으로 감사뿐이다. 길게 보고, 멀리 보고할 것도 없이 ‘지금 감사’인 것은 그 시작이 감사였고, 그 나중이 감사인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솔직하게는 나의 믿음이다.
얼마 전 러시아 정교회에서 회자하는 ‘유로지비’ 사상에 대해서 듣게 됐었다. 순수 러시아 말인데, 그 의미로 보면, ‘바보 성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도를 말한다. 또한, 러시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보는 시각이기도 하다.
그 예로, 바보라고 불린 한 성직자가 있었는데, 그는 죽은 사과나무를 안타까워해 포기하지 않고 물을 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그렇게 1년 동안 변함없이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이듬해에 나무가 살아났고, 예쁜 사과 열매를 맺게 됐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그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바보 성자이다”라고 말을 맺었다.
누가 봐도 죽은 나무가 분명해 마땅히 뽑아버리고, 땔감으로 써야만 했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그의 행동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어찌 봤을까? 겉으로는 몰라도 속으로는 바보라 비웃었으리라. 그것도 한 달이면 몰라도, 적어도 한 철이 지나 봄을 맞으면 싹이 나고 잎이 돋아야 할 나무가 아무런 기척도 없이 고목처럼 서 있다면 의당 포기했어야 할 일이고, 헛된 수고를 그쳤어야 상식에 맞을 텐데 그 사과나무 한 그루를 향해 여전히 살아있어 열매를 맺을 나무처럼 대했을 그의 바보스러움이 내겐 감동이었다. 그 유로지비의 마음을 이 가을에 마음에 되새긴다.

들포도의 정체
무엇보다 이 시대를 분별할 지혜를 구해야 하겠다. 이사야서 5:1-3을 보자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었도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라고 말씀한다. 진정 두려운 말씀이다. 이 시대 우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말씀일까?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 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포도원 사이에서 나온 열매를 보고 잘잘못을 판단하라는 것이다. 극상품이 될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먹지도 못할 들 포도를 맺었다고 진노하신다. 이 포도원의 운명이 뚜렷하게 그려진다.
들 포도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사야는 이어지는 7절에서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라고 찾았다. 이어서 8절 이하에서 구체적으로 두 가지 결과를 지목했다. 하나는 부의 편중과 집과 땅의 독점이다. 다른 하나는 향락과 소비문화에 젖어서,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12절) 라고 했다.
그렇다. 이사야가 본 2700년 전 유대 사회의 모습이다. 그런데 어쩜 오늘날에도 그 관행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 사회는 그렇다 치고 교회의 양극화는 어떤가? 이를 바꿀만한 힘도 능력도 없지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불평과 불만족은 늘어나고, 감사는 퇴색한 세태에 편승해 무감각해지고, 무정해지고, 경건함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말씀 앞에서 곧추세우자. 교회들이여, 그리고 돌아보자. 지금 이때가 어디쯤 와 있는지를…. 그래서 11월은 감사의 달이다. 우리 앞에 감사로 돌아보아야 할 것들이 많지 않은가?

이달의 말씀 ㅣ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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