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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크시론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유크시론 171호]  이창배 발행인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을 맞으며

이 세대에 대해서 분명하고 뚜렷한 메시지를 내야한다. 마태복음 24:32-33절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하시며 종말의 상황을 예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돌아보자. 

오후 4시 어림, 아직은 한낮인데도 어둡고 침침한 거리를 돌아보며 왠지 더 차가운 한기를 느낀다. 밤새 내린 빗방울이 그칠줄 모르고 종일 떨어지고 있다. 아스팔트는 축축히 젖었고, 자동차의 해드라이트 불빛이 포장도로 위로 번진 물기에 반사되어 눈으로 쏘아 들어온다. 두 주간 사이 훌훌 다 털어버린 듯 깡마른 가로수가 앙상한 가지들, 가녀린 속살까지 드러냈다. 스며든 비에 온 몸이 적셔져 추운가 보다. 바들바들 몸을 흔들 때마다 차가운 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내린다. 하루가 뭐라할까, 할일도 못 마친 것만 같은데 속히 어두워지고 만다.

익숙해진 독일 풍경이 이제 한해를 마감할 때가 됐음을 고지해 주고 있다. 11월, 이제 며칠을 남긴 한장이 떨어져 나가면 곧, 남게 될 달력의 한 장, 12월 카렌다를 언뜻 들여다보면서, 이제껏 뜯겨져 나간 지난 달, 달력종이의 흔적들, 그 켜켜이 남겨진 종이 부스러기가 356일 가운데 적어도 326일은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지, 달력고리에 남아있음을 새삼 보게 된다.

푸스킨은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멀지 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리고 지난 것은 그리워하느니라.” 그렇게 글을 남겼다. 그럴까? 지난 것은 그리워하는 것일까? 달력 종이에 박힌 한 달 숫자가 그 달을 넘기고나면 그것과 함께 안녕이었을지도 모를 잊혀진 날들이 얼마나 될까? 기억에 담아두기조차 껄끄러워했지도 모를 그 시간들은 또 얼마나 될까?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해도 서러워 말지어다./ 차라리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세월을 찾으소서./ 초원의 빛이여./ 그 빛 빛날 때 그대 영광 빛을 얻으소서./ 한때는 그토록 찬란했던 빛이었건만/ 이제는 덧없이 사라져 돌이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는 찾을 길 없더라도/ 결코 서러워 말자…” 그렇게 노래했다.

그런가? 늘 돌아보면 다사다난 했다. 언제고 한번도 안 그런 적이 있겠나 싶을 정도로 지나간 시간들은 저마다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다. 그 할퀴고 지나간 흔적이 깊고 클수록 인상적이다. 마치도 이 어두워진 도로 위를 강렬한 헤드라이트를 켜고 쏜살같이 지나가는 자동차처럼 긴 여운이 남는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남은 한달, 그런데 벌써 올해도 잊을 수 없는 다양한 사건들로 지구촌은 들썩거렸다. 좋은 일로, 기쁨의 일로 아닌 음울하며 사악한 인간성 배신의 냄새로 얼굴을 구기며 푸념을 거듭한 시간들로 이어지고 있다. 적어도 한 영혼을 진정 사랑하는 이들에겐 더욱 그랬다. 이미 지난 해 말미에도 썼을지 모를 세월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두지 말자는 주장이 무색해 질 정도이다.

지금이라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고, 곧 앞으로 다가올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소망하며 사는 한 그렇다는 긍정론도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인간은 언제나 후회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내일을 꿈꾸며, 영광스러운 내일을 기대하며 살지만 역시 지나고 보면 여전히 후회로 남겨지는 족적들을 보게 된다. 자꾸만 우리가 꾼 그 꿈들이 죽는 것만 같아 불길하다. 솔직히 견딜 수 없다. 무언가 해야할텐데 해야할 뾰족한 방법이 없다. 보이질 않는다. 내가 아니라면 차라리 누군가에게 기대라도 걸어야 할텐데 그럴 표상이 없다.

이 겨울을 그렇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 서글프다. 푸스킨의 독백과도 같은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이것이 최선일까?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처럼 어렵더라도 그 시기를 버티고, 지나고나면 역시 그 때가 그리워지게 될까? 언제까지 이렇게 떠밀려 가야할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떠한가? 과연 이 남은 한달, 30일을 어떻게 살아갈까? 이 골머리를 아프게 하는 2015년 12월을 사색해 본다.

이제 2015년 성탄을 준비해 가는 대강절 첫 주일을 맞았다. 하나의 초에 불이 켜졌다. 그 불을 붙이며 마음에는 마태복음 16:2-3절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문득 이 물음이 떠올랐다. “이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그래야 하겠다. 한해를 다 보내기 전에 남은 30일 동안 만이라도 이 일을 도전해 보자 그런 마음이다.

그 날과 그 때를 위하여

물론 오늘의 교회들이 해야할 사명의 당면한 과제이다. 이 세대에 대해서 분명하고 뚜렷한 메시지를 내야한다. 마태복음 24:32-33절에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하시며 종말의 상황을 예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돌아보자.

이 말씀에 일기를 보고 날씨를 알고, 나무의 변화를 보고 계절을 알듯이 시대의 징조를 보고 주님이 가까이 오셨음을 알라 하셨다. 그리고 그 일은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일어날 것이며,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당신의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이 말씀은 주후 70년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으로 성취가 됐다. 이는 또한 교훈을 남겼다. 왜 교회가 본연의 사명을 잃어버려 짠맛을 잃은 소금같이 타락하면 하나님은 성도들을 세상으로부터 악에게 짓밟히게 하시는지에 대한 정답이다.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 하셨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20).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위해 더욱 깨어서 기도해야 할 그 이유가 있다. 그리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막 13:22)

곧, 수많은 메시지와 가르침에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듣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한 대답이자,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예언이다.“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6) 항상 마지막 때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 곧 슬기로운 신부로서의 교회 본질이다.

이달의 말씀 ㅣ 마 24장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마 24:3)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마 24:32-33)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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