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물] 빛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5>

  • 10/09/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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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토리]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 속편/ 편저자 박상원 목사/ 기드온동족선교회

“굶주림보다 더 큰 목마름” 속편 (연재) …

본 연재물은 북한선교를 하고있는 기드온 동족선교회 대표 박상원 목사가 제공했습니다. 어느 탈북자로부터 건네받은 간증 스토리를 책으로 출판한 원고입니다. 또한 이 내용은 곧, 영화로도 제작되어 배포할 예정으로 준비 중에 있습니다. 유크 독자들에게 많은 은혜와 감동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편집자주>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평양에서 목회를 하신 분...

마음에 내키는 일은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내가 스스로 마음의 안정을 얻고 이것이 응당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야 했으나 그렇게 생각하기는커녕 오직 저 사람들과 내가 다른 것이 무엇이랴. 같은 밥 먹고 왜 내가 저 사람들에게 뒤져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으니 모든 일이 항상 무거운 부담으로 다가왔다.
어쨌든 여러 차례의 군사행동과 실전교전을 통해서 나는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르자 부조장이라는 자리까지 일약 승진하게 되었다. 그 당시 나의 앞날은 창대해 보였다. 하지만 나의 가정환경(성분관계) 때문에 이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선배들은 군 생활을 마치고 요직에 배치되어 갔다. 이들을 보며 나는 저들처럼 출세의 창대한 길을 따라 줄달음치리라는 희망이 봄날의 새싹처럼 움텄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힘에 의지하는 군 생활이 신났다. 그러나 이 신나는 군 생활의 매 순간이 나를 운명의 시궁창에로 몰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의 고생이었다는 사실 앞에 섰을 때 운명의 상실감으로 해서 절망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건만

나는 드디어 13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귀향길에 올랐다. 13년 만에 처음으로 밟게 되는 고향, 얼마나 변했을까. 나는 몰라보게 변해 있을 고향땅에 도착해서 집을 찾는데 수고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에 차 안에서 별의별 궁리를 다 했다. 역에 내려서 집에 먼저 전화를 걸어 내가 도착했다는 것을 부모님께 알려야지. 그리고 기차역 앞 공원에서 부모님이 달려오는 것을 기다렸다 뜻 깊은 상봉을 한다. 얼마나 가슴 저릿저릿한 장면이겠는가?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시간이라는 관념 속에 잠시 포로가 되어 살아온 나의 군대 생활의 습관적인 타성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집을 찾아 나서는 것보다 전화를 걸어 놓고 부모님들을 기다리는 것이 더욱 낫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무척 변모되었을 것이라 생각한 나의 고향에 생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고향에 도착한 나의 눈앞에 펼쳐진 고향 전경은 변화는 고사하고 오히려 어두컴컴하고 음산하게 느껴져 왔다. 열차 안에서의 나의 생각은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3년간에 걸친 기나긴 세월 속 고향은 변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더 더욱 몰락한 듯 했다. 내가 그토록 어렵게 찾을 것이라 예상했던 집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변모된 것은 세월의 연륜 속에 빼앗긴 내 부모님의 젊음뿐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너무도 늙어 보였다. 그렇게 젊으셨던 아버지도 새색시 같던 어머니도 머리에 흰서리가 내렸고 얼굴엔 주름이 가 있었다.
나의 부풀었던 가슴은 순간 실망으로 가득 찼다. 너무도 서글펐다. 고향에 도착한 나에게 서글픈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누이는 출가하고 없었는데 출가한 곳이 살아서는 올 수 없는 섬(군사기지)이라는 것이다. 현재까지 나는 매형이나 조카들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나의 운명의 배는 이렇게 돌아온 고향땅의 암울함을 싣고 사회라는 세파 속으로 닻을 올렸다. 기약할 수 없는 운명의 파도를 헤치고 어두운 풍파를 헤치며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내 운명의 배는 긴 고동 소리의 연운을 남기며 불운한 인생 기슭의 파고를 헤치며 떠나가고 있었다.

나의 출신성분, 그리고 증조할아버지의 부탁

나는 나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함자를 모른다. 아버지께서 알려주시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공산제도하에서 제일 미워하는 일을 증조할아버지가 하셨기 때문이다.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평양에서 목회를 하신 분이다. 갖은 입에 욕설과 함께 입에 침을 튀기며 공산사상을 선전하는 사람들의 정신력을 무력케 하고 타락시키는 일을 증조할아버지께서 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에 대해서 묻는 나에게 항상 ‘너희 증조할아버지는 사랑의 너울을 쓴 위선자였다’ 하고는 씁쓸해 하셨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태도로 나는 증조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내가 증조할아버지에 대해 약간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은 명절날이나 기쁜 일이 생겨 아버지가 이따금씩 술을 거나하게 취하신 후 취중에 언뜻언뜻 들려주시던 옛말 같은 이야기가 전부였다.
아버지께서 증조할아버지에 대해 가장 정확히 이야기 해 주신 것은 어느 해인가 3.1봉기(31만세운동) 기념행사 소식이 방송과 라디오를 통해서 보도한 후였다. 그때 아버지는 3.1봉기를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관하여 진행했는데 나의 증조할아버지도 그 분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하셨다.
3.1봉기 여파로 일본인들의 탄압 대상이 된 기독교 지도자들은 수십 명이 잡혀가서 참형을 당했는데 증조할아버지도 그때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됐다고 한다.
진취성이 강한 증조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봉건제도를 반대하고 새로운 선진 사상을 갈망하신 현대인에 가까운 분이셨다고 한다. 그래서 증조할아버지는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힘쓰신 분이었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 당시 우리나라 선교를 위해 미국으로부터 여러 명의 미국 선교사들이 와 있었다고 한다. 그때 증조할아버지는 초대 미국 선교사들과 합심하여 평양에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셨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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