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때와 같은 시대의 풍조

  • 09/09/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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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크시론] 이달을 여는 창 | 발행인 이창배 목사

2020-09월을 여는 창

이 세상에는 미처 알 수 없는 조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는 빙산의 일각을 보고 빙산 전체를 알아내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어그러지고 거슬리는 말세의 징조가 뚜렷해진 세상 가운데 묵묵하게 믿음으로 순종해 최종 구원을 이룬 노아와 그 가족의 이야기가 오늘날 더없이 메말라 달라붙은 우리의 가슴에 촉촉한 단비가 되어 적셔져야 한다.

맑고 파란 여름 하늘이 사라지는가 싶다. 그동안 투명할 정도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로부터 뜨겁고 눈 부신 태양이 광휘를 발하던 여름이 한겹 씩 한겹 씩 덮어지는 구름층으로 가려지며 구월은 그렇게 시작됐다. 언제 그렇게 뜨거웠던가, 그리고 언제부터 서늘해졌는가, 일기의 변화가 참 조화롭다. 물같이 흘러가는 게 세월인지, 올 초 들어서 우한에서 발생 된 코로나 바이러스로 뒤숭숭하던 일로부터 펜데믹이 되기까지 그리고 지금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온 사태로 어떻게 세월이 흘러갔는지도 모를 정도이다.

그렇다고 지금에 이르러 세상이 회복되기는커녕 아직도 사람의 살을 떨리게 하는 코로나-19의 위력은 멈출지를 모르지 않는가. 백신이 나온다는 소문도 있지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고, 세상은 오히려 여러 가지 풍문들로 인해 오히려 어수선스럽다. 참 근간에 이르러 사람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왜 그런지 그 이유조차 불분명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한다는 것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유럽에 전해지는 속어 가운데,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여름이 된 것이 아니다.“ (One swallow does not make a summer.) 라는 말이 있다. 사실 독일에서 근 20년,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제비를 언제 보았는지 아무리 헤아려보아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만큼 독일에서 제비는 귀한 새인데, 그래도 제비하면 떠오르는 말이 ‘강남 갔던 제비 돌아온다’ 는 말이 언뜻 떠 오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유럽 제비도 철새이다. 영국에서는 4월인 봄에 찾아 왔다가 9월인 가을에 남쪽으로 간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제 제법 공기가 선선해진 9월이고 보니 제비가 다시 강남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 됐나 보다.

세상은 우울하다. 마음껏 하늘을 날아야 할 새를 새장에 가둬둔 것처럼 좀처럼 기분을 낼 수 없어 더하다. 이미 우한 코로나-19의 발발과 함께 반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뉴노멀이 몸에 밴 탓인지 선뜻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표현이 맞는지 몰라도, 그냥 세상을 보는 눈이 우중충해진 것은 사실이다. 뭐든 흥미를 잃었다고 해야 할까, 뭐 이렇다 할 관심거리가 사라진 것 같아 멜랑꼴리 하다고 할까? 아무튼지 그 감정선을 정확히 표현할 순 없지만, 대충은 그러하리라 싶다.

예사롭지 아니한 징조

그런데 언택트, 뉴노멀의 풍조가 그런 자그마한 수고까지도 멀어지게 만들어 버렸다. 누구나 외부인을 거리낌 없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더구나 바이러스라는 공포가 함부로 타인을 만나는 것도, 밖에서 남의 손을 탄 물건을 접촉하는 것도 모두가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때는 누가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귀찮아진다. 그러다 보니 아에 못 들은 척 귀를 막게 될 때마다, 마음에는 서늘한 찬바람이 휭하니 지나는 느낌이 든다.

인간은 환경적 동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적응력이 참 뛰어나다.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언제부터인가는 우편물이든, 택배 물품이던지 집으로 배달이 되는 게 아니라 집집의 문 앞에 놓여있던지, 엘리베이터 앞에 놓여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하기야 피차간에 불필요한 접촉을 줄일 수 있는 최상의 간격을 찾아낸 것이 아니었겠는가? 막히면 통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이 산다는 것은 누가 뭐라고 나서질 않더라도 다 그 방법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그때 다시금 깨닫게 됐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한마리 제비가 오거나, 하루 날씨가 화창하다 해서 봄이 온 것이 아니다“고 했다. 또한 “제비 한 마리 봤다 해서 겨울이 다 지나갔다고 생각하지 말라”고도 말했다. 그 말뜻은 좋은 징조가 한 번 나타났다 해서 모든 일이 잘됐다고 판단하지 말고 여러 주위 증거를 종합하여 판단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하찮은 먼지 티끌일지라도 집어서 하늘에 던져보면 부는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있고, 찬바람에 얼굴이 시리고, 이른 아침 마당과 뜰에 덮인 서리가 피어나면 얼음이 어는 겨울이 오듯이 세상일에는 갑자기 일어난 사태보다는 어떤 형태로든 예사로운 조짐이 있었기 마련이다.

시대의 징조를 읽자

이러한 일에 대해서 신약성경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씨가 좋겠다고 말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날씨가 좋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날씨를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는 알지 못한다“고 마태복음 16:3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한다. 그러니 믿는 이들은 먼저 자신의 주변 언저리에서 어떤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예민해야 한다. 그런 삶의 태도를 항상 유지하는 것이 영적인 삶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이집트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처럼 영통한 꿈을 꾸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시대의 징조를 읽어내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의 경건한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구약의 노아 시대를 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의 혼합성(6:1-2절), 둘째로 하나님의 신이 떠난 비극(3절), 셋째로 육체가 되어 버린 도덕적 부패상(3-4절), 넷째로 항상 악을 도모하는 비인간적 모습(5절), 다섯째 강포와 패악이 땅에 가득찬 시대상(11-12절), 여섯째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심에 한탄하실 정도(6-7절)로 한마디로 정리해 본다면, 인간의 악이 최고 정점을 찍은 그런 시대이다.

예수께서 이를 가리켜 말씀하시길,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하셨다. 어쩌면 우리의 시대는 그때처럼 역사의 황혼 녘에 서 있다고 보아야 한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는 이 시대가 노아의 홍수시대와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1) 사람이 매우 번성하였다. 2)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조롱을 받았다. 3) 죄악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관영한 시대였다. 4)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셨다. 5)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설교자가 있었다. 6)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싸우셨다. 7)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존재하였다. 8) 마귀가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9)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시대적 상황이 홍수 심판 전의 상황과 무척 닮았다고 했다.

그렇다. 이 세상에는 열거된 예를 벗어나서도 미처 알 수 없는 조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는 빙산의 일각을 보고 빙산 전체를 알아내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어그러지고 거슬리는 말세의 징조가 뚜렷해진 세상 가운데 묵묵하게 믿음으로 순종해 최종 구원을 이룬 노아와 그 가족의 이야기가 오늘날 더없이 메말라 달라붙은 우리의 가슴에 촉촉한 단비가 되어 적셔져야 한다.

이달의 말씀 ㅣ히브리서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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