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 09/07/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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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칼럼] 이창기 목사/ 프랑크푸르트 감리교회 – <1회>

약속과 맹세, 동맹에 관한 성서적 분석

한미상호방위조약, 줄여서 한미동맹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韓美相互防衛條約, Mutual Defence Treaty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으로, 1953년 10월 1일 워싱턴 D.C.에서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조인하였고, 1954년 11월 18일 정식 발효된 조약을 말한다.

서론- 주한미군 물러가라?

한미상호방위조약, 줄여서 한미동맹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韓美相互防衛條約, Mutual Defence Treaty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으로, 1953년 10월 1일 워싱턴 D.C.에서 변영태 외무장관과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조인하였고, 1954년 11월 18일 정식 발효된 조약을 말한다.

주요 내용은 상호 방위, 즉 한국이 침략 당했을 때 미국이 도와주고 미국이 침략 당했을 때 한국이 도와주는 것으로, 이 조약은 지금까지 유효하여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방지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보를 튼튼히 하여 경제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미동맹이 이렇게 중요한 동맹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 안과 밖에서 미군 철수 주장과 한미동맹의 해체 요구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가 있다.
한미동맹은 우리나라 안보와 경제 발전에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한미동맹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분석을 통해 이미 많은 이들이 역설해 왔다 (이 면에서는 서옥식 박사의 ‘한미동맹의 문제점 진단과 바람직한 방향’은 탁월한 논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성서적, 신앙적인 면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분석하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이 글의 목적은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성서에 따른 분석을 통해 강조하기 위함이며, 이 글의 범위는 성서에 따른 분석에 한하며, 그 이외에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분석은 이 연구에서 제외되었다.

1. 약속과 맹세의 엄중함

개인 간에 약속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서로의 신뢰 구축을 위해 필요하다. 이 신뢰 구축은 한 사회를 건전하고 안전하게 지탱해 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준다. 그러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민족, 어느 사회에서나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덕목들 중의 하나이다.
특별히 중대한 약속을 해야 할 땐 사람들이 맹세하게 되는데 맹세란 사전적인 의미로 “반드시 이룰 것을 굳게 다짐하는 것”을 말하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이행 의무를 위해 어떤 행위나 문서로 증빙한 약속을 말한다. 그러므로 맹세 역시 넓은 의미에서 약속에 속한다.
구체적으로 맹세하는 방법은 각 문화나 종족, 사회마다 달랐다. 고대 세계에서는 흔히 신들의 이름이나 신전(시 16 : 4, 암 8 : 14) 또는 하늘, 땅, 예루살렘, 심지어는 자기 머리(마 5 : 36)를 두고 맹세하기도 했다. 고대 헬라 사람들은 데메테르(Demeter)와 페르세포네(Persephone)의 신전에 들어가서 신성한 의식을 한 후에 여신의 자줏빛 망토를 입고 손에 횃불을 들고 맹세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황제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거나 돌 한 개를 손에 잡고, 만일 자신이 맹세를 어기면 이 돌과 같이 내던져지리라 서원하며 맹세했다.
구약 성서에서도 맹세는 엄중히 이행돼야 하는 것으로, 맹세를 위반하여 지키지 않는 것은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고 (레 19 : 12), 마땅히 벌 받을 일이었다 (겔 17 : 13, 16, 18-19). 맹세는 그것이 비록 사람에게 해롭거나 (시 15 : 4), 무모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지켜야 했다 (레 5 : 1-4). 구약 시대의 맹세는 상징적인 행위를 수반하였는데, 하늘을 향해 손을 들거나 (창 14 : 22, 신 32 : 4, 단 12 : 7, 계10: 5-6), 손을 족장의 ‘환도 뼈 밑’에 넣기도 하였다 (창 24 : 2, 47 : 29).
엄중함을 강조하는 맹세의 경우에는 동물을 둘로 쪼개고 그사이를 지나가며 맹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맹세를 어길 경우 그 동물과 같이 쪼갬을 당하게 될 것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창 15 : 10, 17, 렘 34 : 18).
맹세를 나타내는 구약의 히브리어에는 두 단어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스부아’는 단순한 형식의 맹세를 가리킨다. 이 말은 신비한 숫자 7이라는 글자와 그 어근이 같다. 맹세 자는 7이라는 신비의 수와 관련을 맺는다 (브엘세바란 지명의 의미는 ‘일곱 우물’, 혹은 ‘맹세의 우물’이다; 창 21 : 22-31, 아랍인들은 계약을 맺을 때 7개의 돌에 피를 발랐다).
다른 하나는 구약에서 흔히 사용된 ‘알라’(헬라어로는 호르코스)로서 보통 ‘맹세’로 번역하지만, 그 정확한 뜻은 ‘저주’이며 (성서백과대사전 3권, p. 789), 맹세와 저주, 이 두 의미가 결합하여 쓰였다 {예: ‘저주의 맹세’ (민 5 : 21), ‘저주로 맹세’ (느 10 : 29), ‘맹세대로 된 저주’ (단 9 : 11) 등}. 그러므로 맹세는 그 맹세가 지켜지지 아니할 때 저주가 동반되는 것을 전제로 한 약속이다.
구약 시대의 맹세 혹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했으며 그것을 지키지 아니했을 때는 저주를 받거나 둘로 쪼갬을 당하는 형벌을 전제로 했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성서의 맹세란, 생명을 담보로 한 약속이다. 구약 시대의 약속이나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저주와 죽음을 전제로 한 엄중한 약속이었다.

2. 서원의 엄중함: 무남독녀 외동 딸도 죽여야 하는….

그 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사 입다의 이야기이다 (삿 11 : 29-40). 입다는 암몬 족속과의 전쟁에 나가면서 하나님께 서원하였다: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30~31절).
그가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그 집 문에서 그를 영접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그는 자기의 서원한 바가 있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35절) 탄식하였고 결국 자기의 외동딸을 번제로 드릴 수밖에 없었다 (39절).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잔혹성 때문에 종종 이 본문은 의심을 받아 왔고, 따라서 그 잔혹성을 완화하려는 해석이 시도되곤 하였다. 즉, 여기에 언급된 번제는 불에 태워서 바치는 제물이 아니라 ‘바쳐 올리는 제물’(ascending offering)을 의미하므로 입다의 딸은 번제로 바쳐진 것이 아니라 평생 처녀로 성소에서 봉사하는 여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을 태워 바치는 제물은 율법에 엄금되었기 때문이다 (레 18 : 21, 20: 2-5; 신 12 : 31, 18 : 10).
그런 해석의 또 다른 근거로, 당시 암몬 족속이 몰록 우상 (혹은 ’밀곰’, 왕상 11 : 5, 33)을 섬겼는데 (왕상 11 : 7), 자기 자녀들을 불살라 그 우상에게 바치는 악한 미신(迷信)에 젖어 있었고, 입다가 암몬을 대적하면서 그런 미신도 미워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 그런 해석의 근거로 제시되곤 하였다.
그러나, 이 본문에 나타난 그 잔혹성은 오히려 서원, 혹은 맹세의 엄중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할 뿐이다. 서원이나 맹세는 지키지 않을 수 없다. 한 사람의 서원은 비록 무남독녀 외동딸이라도 번제로 드릴 수밖에 없음을 본문은 더욱 확증해 준다. 그 엄중함은 입다의 탄식과 그의 딸, 그리고 이스라엘 여인들의 애곡에 잘 나타난다. 입다는 탄식하기를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35절) 하였고, 그의 딸은 탄식하기를,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37절) 하였고, 이스라엘 여인들은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 (40절) 한다고 하였다.
만약 이러한 탄식이 단순히 그의 딸이 성소에서 평생 처녀로 살게 됨을 탄식한 것이라고 해석하기에는 본문이 너무나 과장되다. 평생 처녀로 살게 됨을 이렇게 애절하게 탄식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문의 애끓는 탄식은 입다가 자기 딸을 서원을 지키기 위해 번제로 드렸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서약은 외동딸도 번제로 드려야 할 만큼 엄중한 것이었다.

3. 동맹의 엄중함: 잘못 맺은 동맹도 지켜야 하는….

여호수아 10 : 9-14는 특이하고 놀라운 사실을 전해준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14절은 이렇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즉,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목소리를 듣고 태양을 멈추게 한 것, 사람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신 것은 역사에 다시 반복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는가? 전쟁이 벌어졌다.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군대는 기브온 사람들을 도와 아모리 다섯 왕의 연합군과 전쟁을 벌였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이스라엘 군대는 왜, 어떻게 하다가 기브온 사람들과 손을 잡게 되었나? 여기에 기막힌 사연이 있다.
기브온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원수요, 대적이었다. 싸워야 할 상대였고 정복해야 할 상대였다. 그러면 어쩌다 기브온 사람들과 손을 잡게 되었나? 여호수아가 속은 것이다. 사기를 당하고 기만을 당했다. 그들은 마치 멀리서 온 사람들처럼 가장하고 낡은 옷에 곰팡이 슨 빵을 들고 나타났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얼떨결에 그들과 함께 불가침 평화 조약을 맺어 버렸다. 여호수아의 실수가 분명하다. 성경에는 그가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수 9 : 14)….<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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